
프롤레타리아트 예술운동의 선구자였던 김기진은 정어리 공장, 금광, 잡지사, 인쇄소 경영에 차례로 실패하고 명치정 주식시장에서 동신주 투기로 일확천금을 꿈꾼다.
문인으로나 언론인으로서의 명예는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욕망을 좇아 시작한 금광이었건만, 금광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첫 삽을 뜬 지 두 달이 지나도록 금광에서는 노다지는커녕 금싸라기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자금을 대던 투자자는 더 파봐야 손실만 커질 것으로 판단하고 일찌감치 손을 털었다. 투자자를 잃은 김기진과 김웅권은 스스로 운전자금을 융통해야 했다. 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로 돌아온 김기진에게 집에서 정양하고 있던 김복진이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금광은 접은 것이냐?” “돈 주선하러 왔는데 돈만 마련되면 다시 금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얘 기진아, 네 금광이 어디 있는지 내가 가르쳐주랴? 여기 있다. 이 책상 위에 있다! 여기서 네가 원고지 한 장 쓰면 한 척 두 장 쓰면 두 척 이렇게 너는 네 광맥을 파고들어가는 거야. 이걸 버리고 어디로 가니?” (김기진, ‘우리가 걸어온 30년(4)’, ‘사상계’ 1958년 11월호) |
자금을 마련할 길도 막막하고, 형의 고언(苦言)에 깨달은 바도 있어 김기진은 금광사업을 정리했다. 노다지를 캐내 신문사를 차리겠다는 행복한 꿈은 불과 넉 달 만에 뜬구름처럼 사라졌다.
금광에 실패한 후 김기진은 일확천금의 꿈을 접고 ‘청년조선’이라는 잡지사를 차렸다. 밑천이라곤 살림살이를 저당 잡히고 마련한 약간의 자금과 문인 겸 언론인으로 10여 년 살면서 확보한 인맥이 전부였다. 1934년 10월에 ‘청년조선’ 창간호를 간행하고, 부동산값 폭등으로 돈벼락이 떨어진 나진으로 직접 광고영업을 나가 7000원 상당의 축하광고를 유치했다. 잡지 제작비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인쇄비를 줄이기 위해 광고료를 털어 ‘애지사’라는 인쇄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시운(時運)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1934년 12월 ‘청년조선’ 2호 제작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김기진은 ‘전주 사건’이라 알려진 사회주의 문인 검거 사건에 연루돼 구금됐다. 보름 남짓 혹독한 신문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풀려나 사무실에 나가보니, 동업자가 잡지사와 인쇄소의 자산 일체를 매도하고 도주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청년들에게 사회과학지식을 전파하면서 안정적으로 생활비도 벌겠다는 계획은 반년 만에 또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1935년 3월, 실직과 연이은 사업 실패로 실의에 젖어 있는 김기진에게 ‘매일신보’ 이상협 부사장이 입사를 제의했다. 김기진은 1924년 ‘매일신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총독부 기관지 발행사에 다니는 것이 꺼림칙해서 몇 달 만에 월급이 반밖에 안 되는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긴 바 있었다.
10여 년 세월이 흘렀어도 ‘매일신보’는 여전히 총독부 기관지였다.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사회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그가 정상적인 직장을 가질 기회는 흔치 않았다. 내일이라도 출근하라는 이상협 부사장에게 김기진은 한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신문사에서 직위는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오전에는 출근을 하지 않고, 오후 늦게 출근해서 조간신문 편집만 맡을 수 있게 양해해주십시오.”
밤낮이 바뀌는 생활을 해야 하는 조간신문 편집은 기자들이 기피하는 보직이었다. 이상협 부사장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기진은 ‘조선일보’ 사회부장 자리를 박차고 나온 지 2년 만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언론계에 복귀했다. 김기진은 생계를 위해 밤에는 어용신문 기자 노릇을 하더라도, 낮 시간만큼은 ‘보람 있게’ 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