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중용이 본래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음을 뜻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兩非論)의 천사’가 너무 많단다.
맞다.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공부해야 한다. 그가 공부한 내용을 사람별로 모으면 박노자, 송시열, 다치바나 다카시, 마르크 블로크, 이종오, 고미숙, 시마자키 도손, 모차르트, 조봉암, 바그너, 촘스키, 오이디푸스, 엘리자베스1세 등등. 이쯤해서 뭘 공부했는지 감이 잡히는가?
‘장정일의 공부’라는 새로운 제목을 붙이고 띠지에는 ‘우리 시대 독서광 장정일이 사회를 향해 던지는 지적 반성문’이라는 광고문구로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사실 이 책은 성실하게 쓴 독서일기다. 기존의 책읽기 책들이 특정 책을 골라 내용을 소개하고 저자의 주관적 감상을 덧붙이는 수준이었다면, 장정일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했든, 하나의 주제로 시작했든 그와 관련된 지식들을 매트릭스처럼 엮어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를 읽으며 인조반정은 잘못된 쿠데타였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더니, 군약신강의 문치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승만·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를 갈망하게 된 것은 아닌지 묻고, 송시열의 북벌론이 허구이듯 우리나라 보수우익이 국부로 떠받드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도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몰아붙인다. 결론은 다음과 같은 ‘한국 주류의 기원’에 대한 자문자답.
“오늘까지도 일제와 영합했던 서인 계열의 척족들이 일부 기업의 대주주가 되어 있다는 현실은 권력과 부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과 혐오의 근원을 짐작케 한다.”(김인호·박훤, ‘우리가 정말 몰랐던 조선 이야기2’)
‘장정일의 공부’ 주제는 봉건성과 국가주의, 교양, 근대의 신화로서 민족주의, 이광수의 변절, 성공한 파시즘의 나라 일본, 미국 극우파, 모차르트와 영재교육, 역사의 종언과 과두제, 레드콤플렉스, 나치 근대화론, 시오니즘, 조봉암과 이승만 등 럭비공처럼 튄다.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툭툭 던져주는 형식이다.
그래서 책 전체가 정리가 덜 끝난 상태의 노트를 보는 것 같다. 저자도 이 점을 인정한다. 이미 서문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공부의 내용들은 그야말로 하나의 시안에 불과하고,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원래 공부란 ‘내가 조금 하고’ 그 다음에는 ‘당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내가 다 하면 당신이 할 게 뭐 남아 있느냐”고 너스레도 떤다. 밉지 않다. 밥벌이의 지루함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지적 자극이면 충분하다.
백과사전적 지식인이 쓴 사전
‘장정일의 공부’가 산만한 필기노트였다면 자신의 공부 이력을 사전식으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책이 있다.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들녘)이다. 남경태란 이름은 주로 인문사회과학 책의 번역자로 알려졌지만 ‘종횡무진 한국사’ ‘종횡무진 서양사’ ‘종횡무진 동양사’ 의 저자이기도 하다. 특히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동서양의 역사를 동시에 정리한 ‘트라이앵글 세계사’에서 남경태는 백과사전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가 ‘고삐 풀린 망아지가 종횡무진 초원을 누비듯이’(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지적 세계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겪고 부딪힌 개념들을 정리해 ‘사전’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이 상품의 취급 주의사항 중 하나는 사전이라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 각 개념의 사전적 정의는 없다. 사실 설명보다는 주장에 가까운 내용이 많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쓴 용어풀이라면 적당하다.
‘가상현실’이라는 첫 번째 개념을 어떻게 설명했나 보자. 1991년 미국이 주도한 걸프전쟁은 한마디로 ‘가상전쟁’이다. 불과 42일 만에 15만명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전쟁에서 병사들은 컴퓨터 화면의 가상 이미지와 싸웠을 뿐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시뮬라크르(모방)라는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의 말이 인용되고,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말이 1980년대 윌리엄 깁슨의 SF소설 ‘뉴로맨서’에서 나왔다는 것도 놓쳐선 안 된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도 슬그머니 끼어든다.
이 책 역시 ‘열린 상태’로 독자를 맞는다. 저자는 “특정한 개념어에 관해 지은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는 스스로 그 개념어에 관한 또 다른 시안을 구성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울 것”이라며 슬쩍 공을 독자에게 넘긴다. 그래서 두 책의 가치는 ‘완성’이 아니라 ‘시도’에 있다. 열심히 공부한 흔적을 이런 식으로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올해는 나도 공부 흔적을 남겨볼까? ‘중용’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人一能之어든 己百之하며 人十能之어든 己千之라.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라. 이것이 ‘곤지(困知)’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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