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부잣집 방탕아와 기생, 그 질긴 연정이 부른 비극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7-12-06 1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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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내가 있다. 집은 부유했으나 의지는 보잘것없었다. 고향에서 이미 두 차례나 결혼해 아들 둘을 둔 그는 권번 기생과 사랑에 빠져 끊임없이 인생을 허비했다. 헤어지겠다고, 목숨을 끊겠다고 몇 번을 다짐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산을 물려받으려는 속셈에 밀어붙인 유학파 신여성과의 사랑 없는 결혼마저 신혼집에 옛 애인을 불러들인 그의 몰지각을 정점으로 무너져 내리는데…. ‘얼굴 반반한’ 사내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삶을 망친 여인들의 기구한 운명, 그 질긴 비극의 끝.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사진은 유영혜가 ‘중앙’ 1936년 9월호에 기고한‘제2의 노라 : 결혼의 비극’으로 사진 속 인물이 유영혜다.(위) 최옥희(아래 좌) 김상한(아래 우)

    1936년 6월27일, 아침부터 장맛비가 내렸다. 오후 3시가 가까워오자 김상한과 유영혜의 결혼식 하객들이 식장인 중국요릿집 ‘봉래각’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신랑 김상한은 경상북도 왜관의 천석꾼 자제로 일본 니혼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경기도청에서 일하다 사업을 준비하는 엘리트 청년이었고, 신부 유영혜는 도쿄에서 보육학교를 졸업하고 조양유치원 보모로 일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신부의 아버지 유일선은 목사면서 경기도 지방과 촉탁이었다. 부호와 명문가의 혼사치고는 검소한 결혼식이었다. 하객도 가까운 일가친지 수십명만 초청했다.

    식장으로 들어오는 하객들의 상의는 장대비에 흠뻑 젖었고, 하의는 흙탕물이 튀어 여기저기 얼룩이 졌다. 그래도 하객들은 봉래각 입구에 서서 굳은 표정으로 하객을 맞는 신랑에게 싫은 내색 없이 환하게 웃으며 덕담을 건넸다.

    “이렇게 좋은 날 신랑 표정이 그게 뭔가. 난처해할 것 없네. 결혼식 날 비가 오면 백년해로한다지 않는가.”

    하객들의 덕담이 이어져도 김상한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표정이 어두운 것은 신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하객을 맞는 내도록 신랑 가족들도, 신부 가족들도 어색한 미소 한번 짓지 않았다.

    아수라장이 된 결혼식



    오후 3시 정각, 사회자는 곧 식이 시작될 것임을 알렸다. 식장 밖에서 삼삼오오 모여 환담을 나누던 하객들은 식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고, 신랑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식장으로 입장할 준비를 했다. 사회자가 신랑 입장을 선언하려 할 때, 오른쪽 다리에 붕대를 두르고 양장을 차려입은 여인이 신랑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천천히 식장으로 걸어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머리 모양과 옷차림새를 보면 누구든 한눈에 기생임을 알 수 있었다. 하객들의 시선은 난데없이 출현한 기생에게 쏠렸다.

    불청객의 출현으로 결혼식장은 삽시간에 대혼란에 빠졌다. 신랑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급기야 신부 대기실로 몸을 피했고, 양가 가족들도 신랑을 쫓아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다. 하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아보느라 웅성거렸다. 얼마 후 신부의 오빠 유의탁이 식장으로 들어와 불청객에게 다가갔다.

    “그만 나가주시죠.”

    “….”

    불청객은 대꾸도 하지 않고 버텼다. 유의탁은 기생과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식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마 후, 유의탁은 본정(오늘날의 충무로)경찰서 경관과 함께 식장으로 돌아왔다. 서슬 퍼런 경찰이 나가라고 명령해도 기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완력으로 끌어내려 하자 급기야 기생은 울음을 터뜨렸다. 경찰은 난감한 듯 쳐다보다가 유의탁과 나직이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최후통첩을 내렸다.

    “좋소. 정 결혼식을 지켜봐야겠거든 자리에 앉아 있어도 좋소. 하지만 만일 결혼식을 조금이라도 방해한다면 그땐 경찰서로 끌고 가 즉결에 넘기겠소.”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때 개성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상한, 유영혜, 유의탁.

    어정쩡한 타협이 이루어진 후 결혼식은 예정보다 한 시간 지연된 오후 4시에 시작됐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기생은 분노에 타오르는 눈으로 신랑과 신부를 번갈아가며 응시했고, 그런 기생을 경관이 한시도 놓치지 않고 감시했다. 주례는 준비한 원고를 절반도 읽지 않은 채 대충 주례사를 마무리했고, 주례사가 진행되는 동안 신랑은 차마 주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식장 분위기는 어색했지만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다.

    결혼식이 끝나자 신랑 신부는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라타고 허겁지겁 식장을 떠났다.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보낼 본정호텔에 짐을 풀었을 때, 호텔방의 초인종이 울렸다. 신부가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아까 그 기생이 떡하니 서 있었다. 기생이 신부의 두 손을 덜컥 움켜쥐며 말했다.

    “나는 나의 행복까지 두 사람에게 주면서 오늘의 결혼식을 길이길이 축복하겠소.”

    신랑은 분노와 공포에 떨고 있는 신부를 달래 소파에 앉히고 기생을 문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신랑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신부 곁에 앉았을 때 기생이 문 밖에서 호텔이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유 여사, 나는 본처이니 첩 노릇을 잘해주시오!”

    이튿날 김상한과 유영혜는 평양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신문에는 ‘결혼식장에 연출된 삼각연애전 일막’이라는 장문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모름지기 청춘의 사랑은 괴로움의 연장이며 눈물과 한숨의 ‘플러스’다. 이것을 증명하는 ‘삼각연애 쟁의극(爭議劇)’이 27일 명치정(오늘날의 명동·편집자) 봉래각에서 발생했다. 오후 3시에 거행될 예정이었던 김상한과 유영혜의 행복한 ‘웨딩 마치’는 신랑의 옛날 애인인 조선권번 기생 최옥희 때문에 한 시간가량 지연돼 시작되었다. (‘결혼식장에 연출된 삼각연애전 일막’,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28일자)


    한여름 새벽의 활극

    김상한과 유영혜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내수정에 집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한동안 술자리의 안줏거리로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그들의 결혼식 이야기도 한 달쯤 지나자 시들해졌다.

    무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8월2일 새벽, 유영혜는 내수정 신혼집에서 나와 어둑어둑한 새벽 거리를 넋이 나간 듯 걸었다. 종로 화신상회까지 걸어가서 첫 전차를 타고 충신정 친정집으로 갔다. 유영혜는 친정집 문을 두드렸다. 새벽 5시도 되기 전이었다.

    “언니가 꼭두새벽부터 어쩐 일이우?”

    새벽잠을 설친 여동생이 놀라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아버지는 평소 새벽잠이 적었지만 그날만큼은 그 시간까지 자고 있었다. 유영혜는 아버지가 깰까 봐 동생을 데리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대강의 내력을 들려줬다. 여동생은 분개했다.

    “아니, 언니는 그 꼴을 보고만 있었단 말이우? 언니 바보야?”

    잔뜩 화가 난 여동생은 말리는 언니를 뿌리치고 안방으로 달려가 잠자는 아버지를 깨워 언니가 찾아왔다고 알렸다. 집안은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아버지는 이부자리도 걷지 않고 유영혜를 불러 새벽부터 찾아온 사연을 들었다. 유영혜가 눈물을 흘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꾸짖었다.

    “네가 경솔하다. 돌아가라. 이보다 더한 일이 있더라도 참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못 가요.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으면 죽었지 김상한이 있는 집에는 다시 가지 않겠어요.”

    유영혜는 울면서 안방에서 뛰쳐나왔다. 대청마루에서 오빠 유의탁이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아버지와 누이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뛰쳐나오는 유영혜를 붙잡아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유영혜는 오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다가 입을 열었다.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최옥희가 ‘사해공론’ 1936년 9월호에 기고한 ‘나의 비련기’.

    “오빠,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1~2년 동안 살 붙이고 산 것도 아니고 피차 사랑이라곤 꿈에도 느껴보지 못한 사이인데 어찌 참고만 살 수 있겠어요. 그가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요. 쳐다만 봐도 역겨워요. 그와 타협하는 어리석은 짓은 다시 하지 않겠어요.”

    “영혜야, 그만 울고 방에 들어가서 좀 쉬렴.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 같은데. 내가 잠깐 다녀오마.”

    유의탁은 침착한 태도로 넥타이까지 단정히 매고 집을 나섰다. 누이의 신혼집으로 가는 길에 남대문시장 용천철물점에 들렀다. 철물점에서 물건을 사서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내수정행 전차에 올라탔다. 유의탁이 찾아갔을 때 김상한은 안방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이보게 김 서방, 할 말이 있으니 잠깐 일어나보게.”

    김상한은 못 들은 척 몸만 뒤척였다.

    “어허, 깬 거 다 아네. 그러지 말고 일어나게. 잠깐이면 된다네.”

    유의탁은 잠자는 척 드러누워 있는 김상한과 40분 넘도록 실랑이를 벌였다.

    “깼다고 생각하고 묻겠네. 자네, 결혼 전 약속한 대로 실행했나? 영혜가 오늘 아침에 울면서 친정에 온 것은 웬일인가? 그간 남편의 의무를 다했는가?”

    등을 보이고 자는 척하고 있던 김상한이 갑자기 몸을 돌려 드러누운 채 버럭 고함을 질렀다.

    “형님도 정말이지 대단하시오. 잠 좀 잡시다, 잠 좀. 남편의 도리를 다했소. 됐죠? 그럼 다시 잡니다. 안녕히 돌아가세요.”

    김상한이 뻔뻔스럽게 대들자 유의탁은 분노가 폭발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 양복 안주머니에 품고 있던, 철물점에서 사온 물건을 꺼냈다. 식칼이었다. 김상한이 놀라 몸을 일으키려 하자 칼날이 안면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이 뻔뻔스러운 녀석! 눈알을 빼주마.”

    유의탁은 매부의 눈을 찌르려 했지만, 칼날은 이마에 깊은 상처를 내고 이부자리 위로 미끄러졌다. 김상한은 몸을 일으키려다 머리에 또 한 번 상처를 입었다. 유의탁은 피를 철철 흘리며 울부짖는 매부를 내버려두고 집 밖으로 나왔다.

    오전 9시, 유의탁이 식식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옷소매에 피가 묻어 있었다. 온 가족이 달려 나와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유의탁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고많은 해결 방법 다 놔두고 어쩌자고 그런 크나큰 죄를 지었느냐.”

    유일선은 아들을 크게 꾸짖은 후 아침밥도 먹지 않고 부랴부랴 사위집으로 달려갔다. 안방에는 피 묻은 이부자리만 덩그러니 깔려 있을 뿐 사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식모가 ‘건넌방에 사는 친구가 김상한을 경성의전병원으로 데려갔다’고 일러줬다.

    유일선은 대문을 박차고 나와 병원으로 달려갔다. 상태를 묻자 담당의사는 김상한의 피가 1000g이나 소실됐으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혀를 쯧쯧 찼다.

    “내 피라도 뽑아 쓰시오.”

    유일선이 소매를 걷어 올리자, 병실을 지키던 김상한의 친구가 ‘노인의 피를 어떻게 뽑겠느냐’고 뜯어말렸다. 유일선은 헌혈을 하는 대신 새벽까지 사위의 병실을 지키며 아들의 잘못을 대신 사죄했다. 새벽 4시, 유일선이 긴 하루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의탁은 집에 없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지 얼마 후 종로경찰서 경찰이 들이닥쳐 오빠를 잡아갔어요.”

    그때까지 자지 않고 아버지를 기다리던 유영혜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얼마 후 배달된 조간신문에는 ‘문제 많은 삼각연애! 유혈의 참극을 연출’이라는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한동안 항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기생 최옥희와 김상한 사이의 연애는 6월28일 봉래각에서 거행된 김상한과 유영혜의 결혼식에서 최옥희가 일장풍파를 일으키고 잇따라 최옥희가 입원치료까지 하게 된 것으로 이들의 ‘로맨스’가 일단락을 짓는 듯했지만, 또다시 최옥희와 김상한의 연애가 부활해 마침내 김상한의 신혼의 단꿈은 여지없이 깨어지는 동시에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의 일대 난투극이 연출되어 변화무쌍한 이들의 ‘로맨스’는 또다시 암흑의 장막에 싸이게 되었다. (‘문제 많은 삼각연애! 유혈의 참극 연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3일자)


    유일선은 기사를 훑어보다 거칠게 신문을 구겼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가 꽝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사위 한번 잘못 얻었다가 하루아침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이었다.

    잘못된 만남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결혼식 난동 이후 다리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최옥희.

    김상한이 최옥희를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이었다. 니혼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경기도청 산업과에 갓 취직한 김상한은 1933년 5월 요릿집 회식에서 조선권번 소속 기생 최옥희를 만났다. 김상한은 첫눈에 최옥희의 미모에 반했고, 최옥희 역시 거드름 피우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는 김상한이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 만날 때까지 평범한 기생과 손님 사이였던 두 사람은 세 번째 만남에서 서로의 인생관과 처지를 이야기하며 급속히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그날 밤 요릿집에서 함께 지냈다. 이튿날 아침, 김상한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몹시 괴로워하며 말했다.

    “당신을 너무 빨리 만나 안타깝소.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서는 내가 성공하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희생하셨소. 나는 반드시 성공해 부모님께 영광을 보여드려야 할 의무가 있소. 내 비록 도청에 말단 관리 자리를 얻었다 하나, 그 정도로 어디 성공이라 하겠소. 고등문관시험에 통과해야 하오. 합격할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김상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리컵을 들더니 탁자에 내려쳐 깨뜨렸다. 깨진 유리컵으로 오른손 검지를 찍어 피를 흘리며 혈서를 썼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여자는 금물입니다. 나는 다시 여자를 만나지 않고 반드시 어머니께 영광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상한은 최옥희에게 ‘성공할 때까지 절대로 만나지 말자’는 말을 남기고 요릿집을 나섰다. 최옥희는 야속한 이별의 말을 던지고 사라지는 김상한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 다옥정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최옥희는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서 머물렀다. 밤이 깊어 문 앞에 인력거 한 대가 서더니 술에 취한 신사가 내려 최옥희를 불렀다. 대문을 여니 김상한이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술에 너무 취해 집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잠깐 들어가 이야기 좀 나누다 가면 안 되겠소?”

    하숙에 혼자 사는 김상한이 술이 취했다고 집으로 못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날 밤도 최옥희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이튿날 김상한은 최옥희와 함께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본정통을 한번 휘 돌아본 후 내일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하숙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상한은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쓴 혈서 같은 것은 까맣게 잊은 듯 하루에도 몇 번씩 최옥희의 집을 찾아왔다.

    그는 날마다 단 10분만이라도 나를 만나보겠다고 점심시간에도 도청에서 다옥정까지 한달음에 뛰어와서 나와 만나고 안타까운 몇 분이 지나면 또다시 어린아이처럼 달음질을 해서 도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대문 앞에 나가서 그가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무한한 순정에 감격했습니다. 당시 나는 그가 세상에 다시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인간으로만 보였고, 그렇게 착한 애인을 가진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세상은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해서 있는 것 같았고, 천지도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고, 모든 것이 행복했습니다. (최옥희, ‘사랑의 패배자’, ‘중앙’ 1936년 8월호)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3일자 ‘문제 많은 삼각연애! 유혈의 참극을 연출’ 기사.

    하지만 김상한을 향한 딸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최옥희 부모의 근심은 커져만 갔다. 김상한이 수시로 찾아오는 바람에 딸의 수입이 급감했고, 연애하느라 쓰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최옥희는 돈을 벌자니 연애할 시간이 없고, 연애를 하자니 수입이 적어지고, 수입이 적어지니 부모의 구박이 심해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렸다.

    두 사람은 부모의 구박에 시달린 나머지 세상을 저주하며 죽음으로 모든 번민을 깨끗이 청산하려고 결심했다. 유서를 써놓고 약을 사서 영도사 뒷산으로 가 동반자살하려 했다. 자살하기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고 약 봉지를 펼쳤을 때,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김상한이 말했다.

    “아니다. 죽는 것조차 무섭지 않은데 살아서 무서울 것이 무엇이랴. 차라리 살아서 싸워보자!”

    두 사람은 자살하러 갔다가 오랜만에 교외 바람만 쐬고 돌아왔다. 두 사람이 생업을 전폐하고 연애에만 매달리자 최옥희 어머니가 김상한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제발 우리 딸을 단념해주게.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는가. 정 못 떨어지겠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만나게. 그마저도 못하겠거든 사흘에 한 번씩만이라도 안 되겠나? 만나더라도 제 할 일은 하고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김상한은 그러겠다고 다짐했지만 말뿐이었다. 두 사람은 일주일은커녕 사흘도 참을 수 없어 매일같이 만나고 또 만났다.

    부모의 구박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나는 부모를 원망하며 발악해 집안이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가 하숙에서 외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해 요릿집에 갔다가 퇴근하는 길에 그의 하숙에 찾아가는 것이 나의 일과였고, 내가 오기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길가에서 혹은 집에서 기다리는 것이 또한 그의 일과였습니다. 어느 때는 그와 그의 가정을 위해 또 우리 부모 동생을 위하여 마음을 모질게 먹고 단념하고 안 만나기로 결심했으나 그는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찾아와서 같이 울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최옥희, ‘나의 비련기’, ‘사해공론’ 1936년 9월호)


    기생이 매일같이 김상한을 찾아오자, 같은 집 하숙생들이 풍기가 문란하다며 합심해 김상한을 내쫓았다. 김상한은 숭사동 하숙에서 나와 다옥정 최옥희의 집 근처에 새로 하숙을 얻었다. 애인이 집 근처로 이사 오자 최옥희는 그곳에 살다시피 했다.

    뜨거운 사랑

    사랑의 단꿈과 집안의 구박 사이를 오가다 보니 어느덧 한 해가 저물었다. 고등문관시험이 코앞에 닥쳤지만, 김상한은 책 한번 펼쳐보지 않고 최옥희와 연애에만 몰입했다. 김상한과 사랑에 빠진 열 달 동안 최옥희의 수입은 반으로 줄었다. 고등문관시험을 한 달여 앞둔 2월20일, 급기야 최옥희의 아버지는 김상한을 찾아가 심하게 꾸짖었다. 연락을 받고 최옥희가 달려가자 김상한은 ‘아무리 당신 아버지지만 이번에는 좀 심했다’고 화를 내며 횡 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최옥희는 애인의 하숙에 혼자 남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울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김상한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옥희는 그간 쌓인 설움이 복받쳐 올라 자살을 결심하고 하숙에서 나와 이 약국 저 약국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사 모았다. 수면제를 품에 안고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김상한의 방으로 돌아갔다. 저녁 8시가 넘었지만, 김상한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최옥희는 김상한이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러 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상한은 술을 마시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최옥희는 새벽녘 술에 취해 돌아올 애인이 자신의 시체를 발견하고 흐느껴 울 모습을 상상하며 수면제를 한 주먹 집어삼켰다.

    수면제를 마신 후 나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곧 잠이 들었습니다. 그 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하숙집 식모가 일어나라고 잡아 흔드는 바람에 나는 그만 영원히 깨어나지 말았어야 할 잠을 깨어났고, 늦도록 안 들어오리라고 생각했던 김상한은 친구와 같이 돌아와 내 곁에 앉았습니다. 너무도 허무했지요. 나의 운명은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김상한은 의사를 부른다, 우리 어머니를 부른다, 야단이었습니다. 나는 냉소를 띤 어조로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으나 약 10분 후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뒤 몇 시간이나 경과했는지 모르지만 잃었던 의식을 다시 회복하였을 때 나는 대학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가족과 친구들이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김상한도 섞여 있었지요. 그들은 내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몹시들 반가워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더욱이 김상한은 밤이 깊어 모두들 돌아간 뒤에도 나흘 동안이나 나를 지켜주었습니다. (최옥희, ‘나의 비련기’, ‘사해공론’ 1936년 9월호)


    최옥희가 퇴원한 지 일주일 후 김상한은 고등문관시험을 보러 도쿄로 떠났다. 도쿄에서 두 달 열흘을 지내며 김상한은 최옥희에게 매일 편지를 보냈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그동안 써놓은 일기를 보여주었다. 그토록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반대하던 최옥희의 어머니도 매일밤 정화수를 떠놓고 김상한이 합격하기를 기원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김상한은 시험에 떨어졌다.

    김상한이 도쿄에서 돌아온 뒤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최옥희는 날마다 김상한의 하숙을 찾아가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상까지 차려줬다. 김상한은 가정을 갖고 싶어 하는 최옥희의 바람을 하루 속히 들어주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그 해 8월, 김상한은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버지의 병환이 오늘내일하는 와중에도 김상한은 서울로 약을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아침차로 와서 최옥희를 만나고 저녁차로 내려가기까지 했다. 얼마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김상한은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돌아왔다. 최옥희를 다시 만난 김상한은 그간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실 나는 시골에 숨겨놓은 아들이 둘 있소.”

    김상한의 과거

    최옥희가 움칫 놀라는 표정을 짓자, 김상한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우리집은 양반 가문은 아니지만 아버님께서 자수성가하셔서 천석 재산을 모으셨소.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님께서는 어서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집안의 외아들인 나를 장가보내셨소. 열일곱 살 때 아들 하나를 낳았소. 이듬해 서울로 와서 배재학교를 다녔는데, 여학생과 연애를 해서 또다시 혼인했소. 그 해 두 번째 부인에게서 아들 하나를 보았소.

    그 후 나는 혼자 도쿄로 유학을 떠나고 두 번째 부인은 시골로 내려가 시집살이를 했소. 군수의 딸로 곱게 자란 여학생이 시골에서 시집살이하기란 몹시 힘들었나 보오. 더구나 본처와 한 집안에서 살면서 하는 시집살이였으니…. 고된 시집살이에 지친 두 번째 부인은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친정으로 돌아갔소.

    철없을 때 아버님의 강요로 혼인한 본처와는 1928년 법적으로 이혼했소만, 그 여인은 아들을 돌보겠다며 아직도 시골집에서 시집살이를 계속하고 있소. 이제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천석 재산은 당연히 외아들인 내가 물려받아야 하지만 어머님께서 나를 못미더워하셔서 아직 물려받지 못했소. 서울에 조그마한 회사라도 하나 차리려면 무엇보다도 어머님의 마음을 붙잡아야 하오.”

    최옥희는 ‘어머니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 곧 자신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임을 눈치로 짐작하고 애인의 장래를 위해 그만 놓아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서울에 머물러서는 잊기 어려울 것 같아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집안사람에게만 말하고 떠나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김상한은 얼마 후 금강산으로 쫓아왔다. 최옥희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받아들였다. 그 후로도 김상한과 최옥희는 헤어지고 만나기를 거듭하면서 끓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관계를 지속했다.

    1935년 10월, 김상한은 신경쇠약으로 경기도청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내려가서도 최옥희를 향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애절한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유별나게 사랑하면서 둘도 없는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니 만일에 소원을 들어줄 하나님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소원하겠습니다. 부모도 자식도 지위도 명예도 다 버리고 최옥희와 같이 살게 해주소서. 한시도 내가 어찌 당신을 잊고 살겠나이까.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했으며 오늘까지 당신을 향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나의 아내요, 나의 애인이요, 나의 반려자입니다.”

    1936년 2월, 김상한은 다섯 달간의 요양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다나카(田中) 빌브로커 회사 지배인으로 취직한 후 최옥희를 찾아왔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맞는 최옥희에게 김상한이 말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값지고 위대한 것인지 알았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절대로 떨어져서는 못 살 것이오. 당신과 함께 지낼 수 없다면 그깟 돈이 있으면 무엇하고 명예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겠소.”

    다시 몇 달이 지났다. 김상한은 예전처럼 최옥희를 자주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일단 만나면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사랑을 주었다. 최옥희는 김상한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 남자의 결혼식

    6월14일, 최옥희는 김상한이 유영혜와 약혼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김상한이 약혼한 날 밤에도 최옥희는 호출을 받고 요릿집으로 일을 나갔다. 최옥희를 부른 사내는 뜻밖에도 김상한이었다.

    “나는 오늘 유영혜와 약혼을 했소. 지난 시간 당신과 나눴던 사랑과 앞으로 당신과 영원히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당신이 더욱 그리워지고 양심이 괴로워 견딜 수 없소. 이제 나는 불행한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오.”

    김상한은 밤새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며 유영혜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늘어놓았다.

    “다나카 빌브로커 회사에서 일하면서 사업 욕심이 생겼는데, 사업을 시작하자니 밑천이 없소. 어머님께 자본을 청구했더니 기생과 놀아나느라 그간 집에서 갖다 쓴 돈이 자그마치 8000원(현재 가치 8억원)이라며 거부하셨소. 그간 잃은 신용을 회복하자면 당신과 헤어져야 하고, 관계를 깨끗이 청산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야 하오. 유영혜와 결혼해 평범한 가정을 꾸리면 어머니도 나를 믿어주실 것이오.”

    김상한은 ‘너 없이는 못 산다 유영혜와 파혼하겠다’ ‘아니다 사나이가 한번 작심한 이상 돌이킬 수 없다’며 밤새 횡설수설하다가 날이 훤히 밝은 후에야 하숙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최옥희는 유영혜가 어떠한 인물인지 수소문했다. 유영혜는 최옥희의 언니 결혼식 주례였던 유일선 목사의 둘째딸이었다. 유영혜의 여동생과 최옥희는 보통학교 같은 반 친구였다. 집도 가까워 가족들도 서로 알고 지냈다. 유영혜는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 가서 보육학교를 마쳤다. 귀국 후에는 조양유치원 보모로 일하면서 경성보육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이름난 인텔리 여성이었다. 명문가 집안의 신여성이, 두 차례 결혼했고 아들을 둘씩이나 두고 3년간 기생과 사실상 동거생활을 한 방탕한 부호 자제와 굳이 결혼하려 한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유를 찾는다면 도쿄 유학 시절 결혼한 남학생과 떠들썩하게 연애한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최옥희는 후일 잡지 ‘중앙’에 기고한 수기에서 유영혜가 “보육학교 다닐 때…해서 신문에 기사가 난 일이 있는 여성”이라고 과거를 폭로했고, 유영혜도 같은 잡지 다음호에 기고한 반박문 격의 수기에서 과거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내 과거도 비뚜로 아시는 분이 더 많으실 것 같아 한 말씀 첨부합니다. 이는 불초한 딸 때문에 너무 욕설을 많이 들으시는 아버님이 애매해서입니다. 과거 내가 사랑하던 그이가 인격이 없어서 아버님이 반대하신 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 그와 혼인을 못하게 하신 것은 더욱 아닙니다. 다만 거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그의 집안을 우리 아버지가 나보다 더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의 전처 되시는 분이 어찌나 현명하고 알뜰한지 그가 사는 동네에서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착하고 좋은 부인의 앞길을 막는다면 네게는 반드시 큰 죄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님께서는 한사코 혼인을 방해하셨던 것입니다. (유영혜, ‘제2의 노라’, ‘중앙’ 1936년 9월호)


    최옥희는 아무리 생각해도 김상한을 그냥 떠나보낼 수 없었다. 우유부단한 김상한을 설득해봤자 언제 또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는 신부 집에 자신과 김상한의 관계를 털어놓으면 그쪽에서 알아서 파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식을 사흘 앞둔 6월25일 최옥희는 유영혜의 집을 찾아갔다. 난데없는 기생의 출현으로 결혼식 준비로 들뜬 집안 분위기는 일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최옥희는 유일선 부부와 유영혜 세 사람과 마주 앉아 지난 3년간 김상한과 겪은 일들을 낱낱이 말했다. 최옥희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유영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끝내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유일선은 가끔씩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길 뿐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최옥희의 장광설이 끝나자 유일선은 담담히 말했다.

    “결혼이야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이지만 최양이 김군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김군의 체면과 인격을 돌보아주어야 할 것 아닌가. 최양이 기어이 파혼을 시킨다면 김군의 신상과 명예에 크나큰 오점을 남길 게 아닌가.”

    김상한과 관계를 털어놓으면 조금이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부모라면, 또 자존심을 가진 신부라면 결혼을 허락할 리 없을 것이라는 최옥희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도리어 이튿날 신부의 오빠 유의탁이 찾아와 결혼식은 예정대로 거행될 것이니 단념하라는 충고까지 하고 갔다. 최옥희는 분한 마음에 그 길로 김상한의 집을 찾아갔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파혼하고 내게 돌아오세요.”

    “결혼식이 바로 내일이오. 다 끝난 일이오. 그만 나를 잊으시오.”

    최옥희는 흥분해서 김상한에게 달려들었지만, 결혼 준비를 도와주기 위해 와 있던 김상한의 친구들이 말리는 바람에 발버둥치다가 유리창을 걷어찼다. 유리창은 산산이 깨어졌고 최옥희의 발과 다리에 유리조각이 더덕더덕 박혔다.

    상처에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자 김상한은 황황한 태도로 자기의 잘못을 용서하라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단연히 파혼하겠다고 하기에 나는 뻔히 그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정신을 수습했습니다. 김상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병원에 가자고 졸랐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어기기가 싫어서 둘이서 병원에 갔지요.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할 때 고통이 어찌 심하던지 차라리 그 순간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김상한은 나의 다리에서 빼낸 유리조각을 자기 양복주머니에 싸 넣고 나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최옥희, ‘나의 비련기’, ‘사해공론’ 1936년 9월호)


    소식을 듣고 유일선과 유의탁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유일선 부자는 김상한을 병실 한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한참 동안 대책을 숙의했다. 의사는 3주 동안 입원하라고 권유했지만, 최옥희가 한사코 퇴원을 고집하는 바람에 김상한은 최옥희를 택시에 태워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후 유일선이 나타났다.

    “내일 결혼식은 예정대로 거행될 거요. 행여 어리석은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저는 비록 천대받는 기생일망정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 단언하건대 이번 결혼을 내 손으로 깨뜨리겠습니다.”

    독기를 품고 내뱉는 저주에 유일선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최옥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튿날 아침 모든 것을 깨끗이 단념하고 병원에 입원할 작정이었다. 집에서 입원 준비를 하고 있는데, 경찰서에서 호출장이 왔다. 지난밤 최옥희가 내뱉은 저주에 놀란 유일선이 최옥희를 단속해달라고 경찰에 손을 쓴 것이었다. 최옥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장대비를 뚫고 결혼식장인 봉래각까지 찾아갔다. 김상한과 유영혜의 결혼식은 최옥희의 등장으로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경찰의 삼엄한 감시하에 거행됐다.

    신혼 아닌 신혼

    유일선은 3년 전 경기도청 회식 자리에서 김상한을 처음 만났다. 당시 유일선은 경기도 지방과 촉탁이었고, 김상한은 산업과 주사보였다. 김상한의 첫인상은 활기차고 똑똑해 보였지만 유일선은 그저 장래성 있는 청년이거니 하고 지나쳤다. 3년이 흘러 이 해 6월 초순, 김상한은 고양군청에 근무하는 이강희를 중매로 넣어 유영혜와 약혼을 청했다. 유일선은 김상한을 직접 만나 단순치 못했던 딸의 과거를 자세히 들려주고 그런 딸과 혼인할 수 있겠느냐고 여러 번 확인했다. 김상한은 과거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영원히 사랑하며 살겠다고 말해 유일선의 환심을 샀다. 도쿄 유학생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없던 유명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 덕분에 혼삿길이 막힌 딸과 결혼하겠다는 ‘쓸 만한’ 사윗감이 나타나자 유일선은 혼사를 서둘렀다.

    중매가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약혼식을 올렸다. 김상한은 두 차례 결혼했다가 이혼했으며 아들이 둘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새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 유영혜는 김상한의 복잡한 과거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지 않는 진솔한 태도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김상한의 과거는 털어놓은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결혼을 사흘 앞두고 최옥희가 나타나서 김상한과 자기는 죽어도 못 헤어진다고 야료를 부렸다. 유영혜는 처음엔 파혼하겠다고 펄펄 뛰었지만, 이번 혼사마저 파혼하면 윤영혜의 혼삿길은 영영 막힌다고 판단한 아버지와 오빠가 거듭 설득해 겨우 진정했다. 그날 밤 유의탁은 김상한을 찾아가 그러한 사실이 있는지를 다그쳤다.

    이튿날 새벽 2시 김상한은 헐레벌떡 우리 집을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깨끗이 청산해 버리고 참다운 사람이 될 터이니 내 과거를 용서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 목석이 아닌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어찌 동정이 가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아버님께서는 지저분한 과거를 가진 김상한의 장래를 살려주는 것이 오직 나에게 다행으로 생각하시고 관대히 그를 용납하시었습니다. 아버님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이 서로의 과거를 용서하고 새로운 앞길을 개척하겠다는 필사적 결심을 나누던 그 심각한 장면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어도 오히려 또렷할 것입니다. (유영혜, ‘제2의 노라’, ‘중앙’ 1936년 9월호)


    6월27일 결혼식 날, 유영혜의 가족들은 최옥희가 잠잠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경찰의 힘을 빌렸다. 사람들은 그처럼 거북살스럽게 결혼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웃었지만, 유영혜는 과거를 반성하며 새로운 길을 걷겠다는 김상한의 의지를 격려하고 김상한을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는 결심에서 조롱과 비난을 꾹꾹 참았다. 유의탁은 사랑하는 동생에게 혹시 불행이 닥쳐오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서 몇 번이나 김상한과 따로 만나 동생의 장래를 부탁하고 다짐을 받았다. 결혼 첫날밤 최옥희가 본정호텔에 찾아와 행패를 부렸을 때도 유의탁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문제를 조용히 해결했다. 이튿날 김상한과 유영혜는 평양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평양호텔에 도착한 후 김상한은 나를 위로하며 남달리 문제가 많았던 결혼이었던 만큼 이후로 부디 떳떳하게 살아보자고 부탁했습니다. 또한 결코 내게 불행이 미치지 않도록 자기가 맹세한다는 것을 일기에 써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늙은 후에 일기를 보면 얼마나 감개무량할 것이겠냐며 자기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빼먹지 말고 적어서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7월 초하룻날이었습니다. 최옥희가 야료를 부렸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알고 우리는 혹여 김상한이 하려는 사업에 방해나 되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습니다. 김상한은 과부의 외아들로 어머니가 사업자금을 대주는 터인데 신문에까지 떠들어댄 자기의 사정을 이해치 못하는 어머니는 결코 돈을 안 대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에 대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대동강에 나가 바람을 쐬면서 이제부터 둘이서 협력해 연명해갈 길을 찾자고 다짐했습니다. (유영혜, ‘제2의 노라’, ‘중앙’ 1936년 9월호)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한동안 유영혜의 친정에서 머물렀다. 며칠 후 김상한이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 유영혜는 아마 급한 볼일이 생겼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김상한이 나간 직후 속달우편이 날아왔다.

    “형님! 최옥희가 와 있으니 어서 와주시오.”

    편지를 보낸 사람은 김상한과 앵정정 집에서 같이 하숙하던 후배였다. 유의탁은 편지를 보고 곧장 앵정정으로 달려갔다. 하숙에는 김상한이 최옥희와 다정히 앉아 있었다.

    “아니 김 서방,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형님, 오해 마세요. 옥희는 결혼식 날 자기가 한 일이 너무 경솔했다고 사과하러 온 것일 뿐이니.”

    김상한은 유의탁에게 할 말이 있으니 부민관으로 같이 가자고 하면서 최옥희를 기생으로 데리고 가자고 했다. 유의탁은 집으로 돌아와 집안 망신을 톡톡히 시킨 최옥희와 매부가 아직도 같이 다니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했다. 유영혜는 밤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그저 제발 웃음거리만 되지 말아달라고 타일렀다.

    김상한은 신접살림을 차리기 위해 내수정에 집을 얻었다. 집을 계약하던 날, 김상한은 새살림을 시작하는 자기 결의를 밝히겠다며 명월관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술자리에 불려온 기생 중에는 최옥희도 끼어 있었다. 유의탁은 별일이 없으려니 생각하면서도 최옥희가 그냥 있지 않을 것 같아 하인을 시켜 술자리를 감시하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7월17일, 김상한 부부는 내수정으로 짐을 옮기고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김상한은 처가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밤마다 자정이 넘어서야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해 들어왔다. 유영혜는 참고 또 참았다. 맑은 정신을 가진 남편을 단 한 시간이라도 만날 기회를 가졌다면 간곡히 충고라도 해봤을 것인데, 불행히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남편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와서 늦도록 자고, 눈만 뜨면 집을 나갔다.

    아! 사랑 없는 결혼이란 이렇게 괴로운 것인가! 하고 한숨을 지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최옥희가 찾아와서 사람이 왔는데 본 체도 안 하느냐며 ‘신여성 가정을 구경 왔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무슨 일감을 정돈하느라고 최옥희가 온 줄을 몰랐던 것인데 내게는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인지 오해인지 몰라도 뾰로통한 소리를 하건만 그저 내가 관대하게 그를 대하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는 생각에서 변명을 하는 대신 친절한 태도를 가졌습니다. 최옥희는 9시에 와서 11시 넘어서야 돌아갔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김상한의 태도가 의심스러웠습니다. 최옥희를 보면 쩔쩔 매는 꼴이 무슨 약점을 잡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젯거리 최옥희인데 저쪽을 살살 구스를 수밖에 없다고 변명했습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는 듯했지만 내 의심은 풀리지 않았고 점점 커졌습니다. (유영혜, ‘제2의 노라’, ‘중앙’ 1936년 9월호)


    질긴 비극의 끝

    살뜰한 말 한마디 주고받지 못한 채 한 달이 지나갔다. 8월2일 새벽 2시 유영혜는 김상한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김상한은 집에 들어올 때 문간에 달린 종을 흔들어 자는 사람을 깨우곤 했는데, 그날은 건넌방에 있는 친구를 조용히 깨워 그 쪽 들창으로 들어왔다. 김상한의 술 취한 목소리에 깨서 원수 같은 인간 인제야 들어왔구나 생각하고 그냥 돌아누웠는데, 윗목에 두었던 담배를 꺼내는 인기척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안방에는 자기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건넌방에 가보니 드러누운 김상한의 가슴팍에 시커먼 것이 꿈틀거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최옥희였다. 기어이 김상한은 신혼집에까지 최옥희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언젠가 바뀌겠거니 하는 믿음과 기대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김상한과 한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것조차 구역질 났다.

    ‘이제는 이 구덩이를 빠져나가자.’

    유영혜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날이 새기를 기다려 집을 나왔다. 새벽 5시 유영혜는 친정집 문을 두드렸고, 그날 아침 김상한은 처남의 칼에 맞아 경성의전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것으로 그토록 질기고 질기던 비극의 막이 내렸다.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김상한의 부상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유의탁은 살인미수죄로 기소됐다. 김상한의 집에 가기 전 철물점에 들러 식칼을 산 것은 우발적인 폭행이 아니라 살인 의도를 가졌음을 증명할 결정적 증거였다.

    법의 심판대에 오른 사람은 유의탁이었지만, 정작 여론의 질타를 받은 사람은 피해자인 김상한이었다. 왜 하필 이마를 찔렀느냐는 판사의 신문에 유의탁은 “다시는 고운 얼굴을 미끼로 젊은 여자를 농락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고 진술했다. 유의탁은 살인미수죄가 인정된 것치고는 이례적으로 가벼운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판사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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