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소통’을 꿈꾸는 작가 김연수

벽돌 같은 문장으로 빚어낸 ‘떨켜’ 같은 소설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7-12-10 13: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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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나이에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하며 우리 문단의 별로 떠오른 소설가 김연수는 확실한 자기 독자를 가진 몇 안 되는 작가다.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그의 소설은 차곡차곡 쌓여 담이 되고 집이 되는 벽돌처럼 단단하고 견고하다.
    ‘소통’을 꿈꾸는 작가 김연수
    나쁜 일들은 한꺼번에 몰아닥친다. 좋은 일은 몰라도 나쁜 일의 경우 이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2007년 11월8일 목요일 오전과 오후는 정말 개 같은 날이었다. 오래전에 도착한 우편물인 ‘자동차 정기검사 통지서’를 그날 아침에야 확인했는데, 하필 검사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부터는 고액의 벌금이 부여된다. 불행 중 다행이다 싶어 아침 일찍 검사소에 가니, 불합격 판정이 나왔다. 자동차 출력이 수준 미달이었다. 어쩐지 요즘 차가 빌빌댄다 싶었다.

    허겁지겁 정비소에 가서 불합격 통지서를 보여주니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가격이 예술이다. 정품은 110만원, 중고는 45만원이란다. 기가 막힌 표정을 하고 있는 내가 불쌍했는지 정비사가 현찰을 주면 40만원까지 해줄 수 있다고 한다. 며칠 전에 50만원을 들여 차를 정비했는데….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매일 원고를 보내는 곳에서 원고가 너무 딱딱하니 다시 쓰란다. 정비소엔 나중에 오겠다고 하고 허겁지겁 집필실로 돌아와 급하게 원고를 고쳐 다시 보냈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배가 고팠지만 뭘 먹고 싶지 않아 공원 근처의 커피 하우스에 가서 낙엽 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잠시 쉬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온다. 다시 보낸 원고 역시 딱딱하다는 말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커피를 반쯤 마시다 다시 집필실로 돌아와 처녀 볼기짝 살처럼 무지하게 부드러운 원고를 썼지만, 컴퓨터에 저장을 잘못했는지 원고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 정말 뭐 이런 날이 다 있나 싶었다. 원고가 낙엽 같으면 다시 줍기나 하지, 막막한 우주공간과 같은 컴퓨터 화면 안에서 적어도 내 실력으로는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세계로 날아갔다.



    그 와중에 고 박정만 시인의 마지막 시 ‘나는 사라진다. 저 막막한 우주의 공간으로’가 떠올랐다. 방금 쓴 야들야들한 원고가 건방지게 한 고독한 시인 흉내를 낸다.

    “제기랄” 하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는데, 모서리에 부딪혀 손가락을 삐었다. 겨우 마감시간을 맞추어 다시 원고를 써서 보내니 오후 4시10분. 그런데 끝까지 속을 썩인다. 하필 때를 맞춰 집필실 인터넷이 고장 났다. 가까운 피시방으로 가 원고를 보냈다. 사용료 700원을 내고 나오는데 기분이 참담했다. 아, 오늘 같으면 인생 못 살겠네 싶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10분까지 먹은 것이라고는 커피 반 잔. 배가 고픈데 화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집필실로 돌아와 석가모니 흉내를 내면서 책장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잠시 명상에 들었다. ‘생은 고행이고, 나는 보리(깨달음)를 얻어야 된다’라고 되뇌자, 오늘 저녁 6시30분에 김연수(金衍洙·37)를 만나기로 한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가 이번에 펴낸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는 제목이 떠오른다.

    작가 김연수는 알고 있었구나.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인생은 기러기처럼 날아가야 된다는 걸. 그래서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야 된다는 걸. ‘그래 기러기처럼 날아가 김연수를 만나야 된다’를 되뇌며 그날의 후반생이 아름답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를 읽는다. 이번 장편소설 첫 페이지에 인용된 시인데, 작가는 그 시의 한 구절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소설 제목을 따왔다. 메리 올리버는 아직 국내에 작품이 번역되지 않은 시인이다. 김연수는 이 시인의 시와 산문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영문과 출신이고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다). 그래서 자신이 번역을 해서 읽는다.

    김연수가 번역한 그 시를 한 단락 인용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소통’을 꿈꾸는 작가 김연수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들,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을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는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메리 올리버 ‘기러기’

    김연수는 미소년형이다. 불혹이 가까운데, 소년 같은 인상과 단정한 말투가 매력적이다. 날카로우면서 부드러움을 품은 좋은 인상이다. 우리는 커피 하우스 ‘가자니아’에 마주 앉았다. 일산에서 서너 시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기 적당한 장소다. 이 집에는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바리스타가 있다. 상당한 미인이다. 오랫동안 안 보여서 어쩐 일인가 싶었는데, 좀 쉬었단다. 미인을 보니 일단 기분이 좋아진다.

    불혹의 미소년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그녀가 뽑아낸 커피를 마시니 기분이 풀리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김연수는 늦가을인데도 짧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다. 건강하게 야윈 몸매다. 역시 건강한 웃음을 짓는다. 김연수와는 그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부터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만난 횟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술자리에서 어울리거나 우연히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 같은 후배다.

    요즘에 어떠냐고 근황을 물었다. 얼마 전에 황순원문학상을 탔으니 우문일 수도 있으나, 소설말고 뭐 다른 일은 하는 것이 없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담백하게 대답한다.

    “번역을 하고 있어요.”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번역 중이란다. 소설과 번역 일을 같이 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되었다. 김연수는 우리 문단에서 중요하고 매우 뛰어난 작가다.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탔으니 이제 누가 상 준다고 하면, 상금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점잖게 거절할 수도 있으리라. 이런 작가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작품에 매진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번역하는 일이 어떠냐고 물었다.

    “우선 재미있어요. 그리고 책을 꼼꼼하게 읽는 훈련도 됩니다. 게다가 돈도 받으니, 저에게는 꿩 먹고 알 먹고 식의 일이에요.”

    그는 번역을 오랫동안 했다. 농구잡지의 쪼가리 글을 번역하면서 시작된 번역 일은 어린이 그림책들을 비롯해 비소설과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번역 일은 그가 소설가로 살아가게 하는 생계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한다.

    전업작가 생활을 하기 전 ‘출판저널’ 기자로 근무했고, 인터넷 서점인 리브로에서는 과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근무했다. 출판저널 기자 시절과 리브로 과장 사이에도 잠시 공백 기간이 있었다. 역시 글만을 쓰고 싶어서였다. 모 백과사전 편집자가 매달 일정액의 원고료를 보장해주는 일을 의뢰해서 출판저널을 그만둔다.

    그런데 그 일이 만만치 않았다고 했다. 필자가 오전에 마감 원고를 쓴 이야기를 하자, 씩 웃으면서 자신도 그 기분 잘 안다고 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쓰는 글은 문학이 아니라 일이다. 일은 항상 그런 것이라는 말에 동감했다. 하지만 매달 일정액을 월급처럼 넣어주던 그 일도 어느 날 아내와 시장을 보고 있는데 걸려온 사무적인 전화 한마디, “오늘부터 원고 안 보내주셔도 됩니다”로 끝이 났다고 했다.

    ‘소통’을 꿈꾸는 작가 김연수
    “황당하더군요. 한 달 전쯤에 미리 예고라도 해주었다면 무슨 대책을 세웠을 텐데. 당일 아침에 전화해서 오늘부터 원고 보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앞이 캄캄하더군요. 그땐 그 수입으로 살고 있었으니까요.”

    몇 달 버티다 다시 취직한 곳이 인터넷 서점인 리브로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도저히 글을 쓸 시간이 나지 않았다. 출판저널에 있을 땐 기자였으니까 어느 정도 글 쓸 시간이 있었는데, 이곳은 과장으로 있다 보니 회의가 너무 많아 이러다가는 한 자도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는 대신 생활비를 벌충하는 수단으로 선택한 게 번역 일이었다. 번역 일은 다른 원고와 달리 스트레스가 덜 하고, 하면 할수록 쉬워지는 일이라고 부연한다.

    문태준과 김연수

    김연수는 전업작가로 안정적인 작품을 쓰고 있는 싱싱한 작가다. 그에게서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필자는 ‘신동아’에 글을 쓰기 위해 그간 11명의 작가를 만났는데, 많은 분이 유년시절의 고독하고 가난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성석재 형도요?” 하고 물어본다. 그 사람은 예외라고 했더니 씨익 웃으며 “저도 그래요” 한다.

    김연수는 경상도 김천 역전사거리에 있는 ‘뉴욕제과점’의 막내아들이다. 세련되고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다. 김천 출신 작가들 중에 이동하 선생, 이승하 시인과 문태준 시인이 얼른 떠오른다. 좁은 동네여서인지 모두 이웃이다.

    언젠가 문태준 시인을 만나 “김연수와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는데, 학교 다닐 때 친했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는 문과였고, 연수는 이과였기 때문에 가까이 지내지는 못했다”고 했다. 문태준 특유의 어눌한 말씨로 간단하게 답을 해서 그런가 보다 싶었는데, 거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었다. 역시 김연수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우선 문태준은 자신과 같이 김천 역전 중앙에 있는 가겟집 아이들과는 달리 시골 출신이라는 것. 중앙 역전 아이들은 그때부터 텔레비전을 비롯한 수입품까지 문화적인 혜택을 받고 자랐는데, 주변의 ‘촌놈’들은 일단 외모부터 촌티가 나서 우리와 어울릴 수 없었고, 문태준은 그중에서도 유별난 ‘완전 촌놈’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문태준은 중학교 시절 전교 일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수재였다는 거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문태준과 잘 안 놀았다고 한다.

    아이들 생각에 오죽 할 게 없으면 저렇게 우직하게 공부만 하나 싶어 우습게 보았다고 했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질투심은 있었는지 김연수는 ‘너만 일등 하냐, 나도 일등 한다’는 마음으로 죽어라 공부했는데, ‘완전 촌놈’ 문태준을 넘지 못하고 겨우 4등 했다면서 웃었다.

    “학교 선생님 중에 가죽점퍼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깡패 같은 분이 계셨는데, 전교생이 그 선생님에게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태준이만 안 맞았어요. 깡패 선생님이 반 아이들을 모두 체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창문으로 교실 안을 봤는데, 태준이 홀로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사람입니까? 전 아직도 태준이가 왜 시를 쓰는지 궁금해요. 문태준은 사법고시 봐서 판검사가 될 거라고 전교생이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하지만 사법고시형 인간인 문태준이 시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연수가 시인으로 등단하고 나자, 문태준이 시를 한 무더기 들고 자신이 살던 정릉 집에 찾아와 “시 좀 봐달라”고 했을 때였다. 그때 김연수는 문태준의 시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사법고시를 봐야지, 왜 시를 쓰냐?”

    그 밖에도 늘 파리채를 들고 다니면서 문방구에 오는 아이들을 파리 쫓듯이 때리는 무서운 문방구 아저씨를 비롯해 역전 중심에서 펼쳐진 다정다감한 김천이야기를 하면서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더 시켰다.

    소설가 김연수는 시로 먼저 등단했다. 그가 시인이 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는 고교시절 서울대 천문학과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그 시절의 꿈은 천문학과를 나와 소백산 천문대에 근무하는 것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6개월 이상 하늘의 별을 보면서 지낼 수 있는 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싶은 거였다. 그리고 천문학과 과학은 문학과 달리 우주 탄생을 숫자를 이용해서 풀어낸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와 같은 말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증명해내는 데 매력을 느낀 것이다.

    천문학자를 꿈꾸다

    ‘소통’을 꿈꾸는 작가 김연수
    고교시절에는 문과를 가볍게 여기고 심지어는 우습게 봤다며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영문과에 다니게 됐을까. 그리고 문인이 되어 지금처럼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러게요. 그런데 지금도 말보다는 숫자가 더 확실하다고 믿어요.”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환유가 아닌가 싶다. 그의 소설은 숫자와 같은 매력이 있다. ‘난 글이 좋아요’라는 말 대신에 자신은 이과 체질이고 숫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은 일종의 위악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연수에게 소설을 쓰게 하려는 ‘문학의 신’의 의도였는지, 고교시절 꿈에 그리던 천문학과에 낙방하고 나서 심하게 좌절을 했다. 목표점을 잃어버렸으니 날아갈 곳을 잃어버린 철새처럼 이젠 뭘 하나 하는 생각에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 있었다고 한다. 낮에는 자고, 밤엔 빈둥거리는 생활을 보다 못한 부친이 외삼촌을 불러 혼을 내주라고 하셨다.

    어느 날 외삼촌이 낮잠을 자고 있는 자신을 발로 차서 깨워, 홧김에 후기 대학이라도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고 한다. 마침 성균관대 원서가 보여 그걸 들고 학교에 갔다.

    희망학과로 영문과를 적어놓은 것을 보고, 담임선생이 “넌 꼭 의대에 가야 된다”고 강권했다. “해부가 하기 싫어 도저히 안 된다”고 대답하니, 그럼 산에 가서 약초만 캐는 심경으로 한의대라도 가라고 했다. 김연수는 무조건 의대는 싫다고 했고, 그때 옆에 있던 한 선생이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성균관대 영문과 원서에 도장을 대신 찍어주었다.

    전형적인 이과 체질이 문과의 본령이기도 한 영문과에 들어갔으니 오죽했을까 싶다. 덜컥 합격을 해서 일학년 때는 학과 공부보다는 도서관에 ‘처박혀’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갑자기 시를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황지우의 시를 읽고 그런 생각을 한 거죠. 다른 분들 시는 어려워 보였는데 황지우의 시는 자료를 따다 붙이기도 해서, 쉬워 보였다고나 할까. 뭐 그런 기분이 들어 나도 한번 써볼까 하는 다분히 장난스럽기도 한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시로 쓸 수 없는 풍경

    시작은 장난스러웠지만, 시를 쓰는 과정은 엄정했다. 거의 매일 한두 편씩 시를 써서 시집 분량이 되면 옥석을 가려 대학노트에 정서해 한 권의 시집을 만들었다. 앞 페이지에 서문도 쓴 시집 모양을 갖춘 필사본 시집을 5권 만들었을 때 시인으로 등단할 생각을 한다.

    “그때 시집을 만들면서 느낀 건데, 한 권을 만들고 나서 다음 권으로 넘어갈 때 시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 같기도 했어요.”

    하지만 부실한 학업태도로 학사경고를 여러 번 받았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군에 입대한다. 현역이 아닌 방위로 근무해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시간이 남아돌던 군 시절에는 소설을 썼다. 시와 소설을 번갈아 쓰는 이 시기는, 김연수 문학이 시냐 소설이냐 행로를 정하기 위한 일종의 사전 탐색기간 같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도 가끔 연락을 하는 동년배인 군대 고참이 그가 쓴 소설을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야. 이거 소설 같다.”

    “정말 소설 같습니까?”라고 되묻자 고참은 흥분된 목소리로 “소설 같아, 진짜…”라고 대답해주어, 그 소설을 장편으로 만들었다. 원고지 1500매가량의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쓴 후, 어느 날 한동네에 살던 시인이 이문재 시인을 만나러 같이 가자며 ‘대남문’으로 향했다.

    대남문이 근처 어디쯤에 있는 문인 줄 알고 동네 놀러 나가듯이 나섰다가, 서너 시간 걸어 북한산의 대남문에 올라가자 이문재 시인 가족이 먼저 산에 올라와 신문지를 깔고 김밥과 사이다를 먹고 있었다. 산을 올라오느라 허기가 져, 남은 김밥을 다 먹고 나자 국민일보 ‘제1회 1억원 고료 장편소설 모집’ 공고기사가 눈에 띄었다. 김밥을 올려놓은 그 신문을 주위 사람 모르게 살짝 찢어 주머니에 넣고 내려와선 군 시절에 쓰기 시작한 장편을 국민일보사에 응모했다.

    그러곤 잊고 지냈는데, 우연히 교보문고를 나오다가 국민일보를 보고 자신의 작품이 최종심에 올라가 심사평까지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니 내가 당선될 뻔했잖아라는 경이로움. 그때 당선자는 소설가 김형경이다. 그래서 그 작품을 버리지 않고 한 번 더 퇴고해서 다음해 ‘작가세계’에 응모해 당선, 소설가로 등단한다. 이미 일 년 전에 ‘작가세계’에 ‘강화에 대하여’ 외 4편으로 당선, 시인이 된 후였다.

    복학하고 나서 시인이 되었을 때는 기분이 몹시 좋아 학교 식당에서 소리 내어 웃으며 “난 시인이다”라고 외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가가 되었을 때는 덜컥 겁이 났다고 한다.

    “소설을 어떻게 써야 되나 하는 두려움이 들더군요. 그래서 작가상을 받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받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소설은 세상과 사람을 향한 소통

    ‘소통’을 꿈꾸는 작가 김연수
    시와 소설을 병행하다 어느 순간부터 시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한때 ‘나는 시인이다’를 외치면서 즐거워한 그는 어떤 이유로 시를 쓰지 않게 되었을까.

    “어느 해 여름이었어요. 출근길에 방금 내린 비로 광화문 가로수 나뭇잎에 빗방울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황홀하더군요. 그 풍경을 보는 순간, 저 풍경을 시로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부터 시에 대한 생각은 접었습니다.”

    그는 소설을 세상과 사람을 향한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들은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이 있다. 김연수에게 즐겨 읽는 소설이 뭐냐고 묻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라고 했다. 그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고교시절에 집안 책장에 꽂혀 있는 전집판 설국에서부터 대학시절, 서른 넘기고 나서, 시간만 나면 계속 읽는다는 것이다.

    “문장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서른을 넘기고 나서 읽으니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게 보이더군요. 행간의 의미랄까. 그게 소설의 매력이고, 좋은 소설이란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한 문장에 그가 쓰지 않은 의미들이 현란하게 떠다닙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 더 많을 걸 이야기하는 식이랄까요. 이 소설은 마흔 살을 넘기고 읽으면 더 많은 걸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유럽 소설로는 ‘보바리 부인’이 그렇습니다.”

    ‘자기 독자’ 확실한 작가

    ‘보바리 부인’과 ‘설국’이 김연수의 ‘내 인생의 책 한 권’인 셈이다. 이 소설들은 평생 같이 갈 친구 같은 책이기도 하다. 김연수의 소설도 어떤 독자에게는 그런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소설은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많이 살아서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그 문장엔 보이지 않는 무게가 실립니다. 세상에는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마흔이 가까워져서인지 인생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곤 합니다. 그렇잖아요. 나 슬프다, 나 무지하게 슬퍼 죽겠다, 라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짐작하게 하는 한 문장의 힘이 사람을 더 움직입니다. 그런 연륜 있는 소설 문장이 소통의 문장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어릴 때는 많은 말을 해서 서로 이해시키려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듯이 보이지 않는 삶을 한 문장으로 쓰기 위해서는 경험이 풍부해야 될 겁니다.”

    소설에 실린 ‘작가의 글’을 보면 소통으로서의 소설의 의미가 확연하게 들어온다. 그가 갑자기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모두에게는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역시 운명과 배신과 복수와 좌절과 슬픔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멀리, 아주 멀리 가면 풍경은 달라지지만, 역시 이야기가 말하는 바는 비슷하다.

    작가로서 진심으로 바라는 일은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정말 많은 얘기를 들려주기를,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이 다시 내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그 소통이 잘 되어서일까. 작가 김연수의 겉모습에는 좌절감이나 패배자의 이미지가 없다. 이쯤에서 작가로서의 이력을 잠시 살펴본다.

    1993년 ‘작가세계’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장편소설 ‘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대산문학상,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 수상. 이력을 보면 21세기가 문을 여는 순간 김연수는 문단의 별로 떠올랐다. 하지만 순조로운 행로만은 아니다. 여기까지 오기에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좌절과 고통이 있었다.

    “출판저널을 다닐 때 작가로서 심한 좌절감을 느꼈어요. 등단은 했지만 청탁 오는 데도 없고, 그나마 가끔 오는 곳은…좀 그랬어요. 그래서 문단 눈치 보지 말고,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소설을 쓰자는 생각도 했지요. 문학전문 출판사가 아닌 보통 출판사에서 3권 정도 소설을 내고 말자는 생각도 했지요. 그래서 직장생활을 계속 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안되더군요. 하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소설은 우리 문단의 중요한 작품이다. 그리고 자기 독자가 확실한 흔치 않은 작가다. 최근에 낸 소설의 판매동향을 편집자에게 물어보았더니, 출간 한 달도 안 되었는데 3쇄를 넘게 찍었다고 한다. 반응이 좋은 편이라고 편집자가 기뻐했다. 아직까지 그의 소설 중에 대형 베스트셀러는 없지만 스테디셀러로 조용히 독자의 손과 마음을 움직인다.

    어떤 노시인은 “독자가 없기 때문에 나는 시를 쓴다”는 잠언을 남겼다. 그 노시인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다만 너무 상업적인 판단에 의존해 작품을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읽어도 될 것 같다. 우리 독자들은 정보가 넘쳐 흐르는 현란한 이미지들, 즉 유령과 귀신 같은 이미지의 세상에 살고 있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적인 의미가 깊은 작품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순수문학은 소수 독자의 몫이다. 건강을 위해 차린 밥상처럼,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 같은 순수문학은 대중의 평균 입맛을 잡아내지 못한다.

    건강을 특별히 챙기는 사람이 생식이나 맛없는 음식도 꼭꼭 씹어 영양분을 보충하듯이 문학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이 이 사회의 대중일 수는 없다. 패스트푸드와 달콤한 음식에 입맛이 당기는 것처럼 소설 역시 그런 요소가 많을 때 잘나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갑자기 너무 잘나가는 작품은 순수문학으로서는 특이한 일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베스트셀러는 순수할 수가 없다. 마케팅을 비롯한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들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세상에는 오히려 작가들이 작품의 순수성을 확보하기 더 좋을 수도 있다. 나는 김연수를 순수작가로 본다. 그는 작품에 비해 과대평가되는 대중작가가 아니다.

    “요즘 젊은 독자는 잘 만들어진 소설에 대한 욕구가 있는 것 같아요. 문학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치열한 자의식이나 내면 고백이 아닌, 왜 있잖아요, 소설 같은 소설. 세상이 바뀌는 것처럼 소설에 대한 독자의 요구도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것 같아요. 거기에 맞추겠다는 게 아니라, 잘 만들어져 독자가 좋아하는 소설도 쓰고 싶어요.”

    어머니의 빵집

    소설가 김연수는 그런 작품을 쓰고도 남을 역량을 가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의 빛나는 눈과 건강한 어깨, 그리고 울림이 깊은 목소리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소년 같은 그의 마음결은 엄청난 삶의 이야기를 담아낼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이제 막 신춘문예에 등단한 신인 같은 초심으로 유연하면서도 단단해 보인다. 작은 명성에 취해 그 허명에 쉬 늙어버리는 인간형들에 비한다면 그는 푸른 바다와 같은 사람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한없이 투명한 물방울 같은 친구다.

    늦가을이 되어 모든 사물이 쓸쓸하게만 보이는 계절 탓인지, 마음이 외로워서인지, 요즘 음악을 많이 듣는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음악 이야기가 나왔다. 필자가 클래식 이야기를 꺼내니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신은 팝송과 기타를 좋아한다고 했다.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천문학자가 되어 하늘의 별을 보며 기타를 치고 싶은 사람이 좁은 집필실에서 원고지와 대면하는 삶을 살고 있다. 아니다. 이러한 삶에 대한 싱싱함이 그를 소설가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삶은 정해진 길을 걸어가는 게 아니다. 누군가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낭떠러지의 좁은 길이 인생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는 일본의 기타리스트 고타르 오시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자 기타가 아닌 통기타를 연주하는 젊은 뮤지션인데 천재적인 역량을 지녔다고 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질투가 날 정도라고 칭찬한다. 한국의 팬들은 그에게 ‘꽃다로’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나를 잠시 폐인으로 만들었던 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이 생각난다. 마니아들 사이에는 꽃다로가 석호필 같은 존재일까.

    그의 음반을 구해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작품은 이런 식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읽히기도 한다.

    긴 시간 이야기를 하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와 자리에 앉으면서 장난스럽게 이런 질문을 했다.

    “엄마가 좋아요, 아빠가 좋아요?”

    그러자 웃으면서 “물론 엄마지요”라고 한다. 김연수는 막내다.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보인다. 김연수는 어린 시절 혼자 놀았다고 한다. 집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혼잣말을 하며 놀고,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어머니가 빵집을 운영하셨기 때문이다. 혼자 놀다 지치면 가게에 가는데, 당시 빵집이 호황이어서인지 어머니는 가게에 있는 빵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빵집 아들이 빵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겨우 먹은 빵은 왜 ‘기레빠시’라고 하는 카스텔라나 식빵의 끝을 잘라낸 조각난 것들, 그리고 빵 거죽에 곰팡이가 피면 팔지 못하니까, 그 곰팡이를 뜯어내고 먹었어요. 그래도 맛있었어요.”

    호황을 누리던 뉴욕제과점은 대형 빵집 즉, 파리바게트나 크라운베이커리와 같은 환상적인 빵집의 등장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서울서 대학을 다니다가 고향에 내려와 보니 하루에 손님이 두세 명 정도. 팔리지 않은 빵은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유통기한이 지난 빵들을 식구들 몰래 검은 봉투에 넣어 거리에 버렸는데, 어느 날 아침에 김연수는 참담한 광경을 목격한다.

    “밤새 고양이들이 찢어발겨놓은 검은 비닐 봉투 안에 빵과 뉴욕제과점 빵봉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데요. 참 정말 …, 어머니가 아들한테도 잘 안 주던 빵인데 그 광경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잔망스럽게, 우리 소설이 김천 뉴욕제과점의 빵처럼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민한 반응이겠지만, 사람을 감동시키고 재미를 주는 것이 워낙 많아져 해본 생각이다. 아니 소설은 빵일 수도 있지만, 쌀일 수도 있으리라.

    어머니의 빵집은 그가 소설가로 등단한 다음해인 1995년 즈음 문을 닫았다. 그러나 김연수의 어머님은 알고 계시리라. 이젠 아들이 당신의 뒤를 이어 소설이라는 맛있는 빵을 구워 독자에게 팔고 있다는 것을. 지금 김연수 빵집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 빵이 너무나 훌륭하다는 것을.

    아버지의 고향

    김천에서 평생을 살고 계시는 김연수의 부모 출생지는 모두 일본이다. 아버지는 나고야, 어머니는 치마현이다. 김천에 사시던 아버지는 평생 일본을 그리워하신 분이라고 한다. 나고야에서 자라나 광복이 되어 귀국하셨다. 그때 부산항에 처음 도착해 본 풍경, 게딱지처럼 지저분한 하꼬방(판자 단칸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더러운’ 고국의 풍경을 보고 심한 좌절을 느끼신 모양이다.

    어린 시절 김연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춘기 시절에는 아버지더러 일본 음악좀 제발 그만 들으라고 투정도 부린 모양이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김연수는 아버지의 고향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고 한다.

    “한일작가모임이 있을 때, 일본측에서 일본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해서, 아버지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지요. 정말 궁금했거든요. 아버지의 그 대단한 고향 말입니다.”

    나고야에서 1시간 더 들어간 가사하라라는 마을을 거쳐 거기서 더 들어간 다지미라는 곳이었다. 거기에 있는 동롱중학교가 아버지가 다닌 학교였다. 마침 아버지의 동창이 마중을 나와주었다.

    아버지의 꿈의 고향, 그곳은 조선인 노동자가 많이 이주한 탄광촌과 도자기 마을이었다. 부친의 친구와 같이 아버지가 살던 흔적을 더듬었다. 이제는 다 헐리고 없는 빈터. 노인은 개천 옆을 가리키며 아마 저쯤이 자네 부친이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 흔적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이 읽히기도 했다. 현해탄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뛰어내리려던 분이었는데, 그렇게 고국에 돌아오셔서 몇 년 지나선 6·25전쟁이 터진다. 그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야 했고, 전투 중에 인민군이 쏜 총알에 관통상을 입으셨다고 한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 상처처럼 당신의 삶도 아쉬움이 많은 생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본에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영원히 응어리로 남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나고야는, 아니 나고야에서 한참 들어가야 하는 ‘다지미’는 아들 김연수의 눈에는 꿈의 장소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곳을 방문하고 나서 김연수는 허탈했다. “이곳이 그토록 그리웠단 말인가요. 아버지.”

    김연수는 아버님의 심경을 이제는 좀 헤아릴 수 있는 것 같다면서 말했다.

    “어릴 때, 김천에 2층짜리 백화점이 들어섰어요. 그 백화점에 가면 에스컬레이터와 수입품 코너가 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수입품 코너에 가까이 가면 그 냄새를 비롯해서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외국산 물건들이 있었지요. 아버지가 일본을 동경한 건 어린 시절에 제가 그 수입품 코너에서 본 환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연수가 이제는 초등학교 일학년 딸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나 역시 사춘기의 딸을 두고 있다. 김연수는 딸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무거워진 마음을 금세 날려버렸다.

    “여자 중에서 내 딸이 제일 좋아요.”

    그러면서 인터뷰하는 내내 한 번도 취하지 않은 제스처를 취한다. 딸을 안아줄 때 이렇게 한다면서 두 팔을 벌려 아이를 안는 흉내를 내며 말한다. “꽉 안아요.”

    그러면 옆에 있던 아내가 자기는 왜 그렇게 안 안아주냐고 한다며 웃었다. 아이가 너무 귀여워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단다. 그 마음 잘 안다. 그리고 우리는 아사다 지로의 소설 ‘철도원’ 이야기에 공감했다. 이 소설은 한평생 철도원으로 지내는 주인공인 아버지에게 어려서 죽은 딸의 혼령이 나타나 자신이 일찍 죽어 보지 못한 딸의 모습을 환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물론 소설은 딸이 혼령인 것을 나중에 밝힌다. 딸로 태어난 자신이 너무 일찍 죽었으니, 아버지가 보지 못한 자신의 유년시절, 소녀시절을 다 보여준다. 어느 순간 눈치를 챈 아버지가 딸에게 묻는다. 왜 진작 내 딸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딸이 혼령인 자신을 무서워할까봐 그랬다고 하자 아버지는 말한다.

    “자기 딸을 무서워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니?”

    벽돌과 떨켜

    우리는 딸을 둔 아버지로서 이런 문장에 공감한다.

    그리고 요즘 읽은 소설가의 작품을 권해달라고 하자,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를 말해주었다. 기이한 느낌의 소설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년배 작가인 한강의 소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너 시간 걸린 이야기를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바로 옆에 있는 단골 맥주집으로 가서 맥주 서너 잔 마셨다. 말을 많이 한 김연수는 좀 쉬게 하고 내가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나중엔 누가 누구를 인터뷰하는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올려다보니, 맥주집의 내부 장식인 벽돌이 눈에 들어온다. 차곡차곡 쌓여 담이 되고 집이 되는 벽돌. 김연수의 소설이 저 벽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하고 견고한 벽돌은 김연수의 지적이고 유려한 문장을 닮았다. 그리고 눈을 돌려 창밖을 보니 우수수 낙엽이 진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한여름에는 그토록 싱싱하던 푸른 기운이 다 떨어져 내린다. 가을비 내릴 때 나무 아래를 걸으면 빗방울보다 떨어지는 나뭇잎에 온몸이 젖는다.

    ‘소통’을 꿈꾸는 작가 김연수
    원재훈

    196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등


    김연수의 소설은 나무가 나뭇잎을 떨굴 때 만들어지는 ‘떨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겨울이 되면 물기 머금은 나뭇잎은 얼어버리기 때문에 가을 즈음에 떨켜가 나뭇가지와 나뭇잎의 사이를 막아 서서히 나뭇잎은 물든다. 그 순간 나뭇잎은 아름답게 불탄다. 생에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나뭇잎은 불타다가 떨어져 내린다. 예술과 소설도 그런 것이리라. 신록과 녹음의 계절이 지나고, 일상과 상상의 모든 공간, 고통과 치욕의 삶을 살아내다가 순간 떨켜가 생기면서 서서히 그 빛을 드러내는 화려한 종말.

    12시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 낙엽 몇 장이 발에 걸린다. 이제 겨울이 멀지 않다. 올겨울에는 영화배우 장진영이 사서 읽고 있다는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으면서 마음을 달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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