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도 마세요. 막말로 양반, 상놈이 한 눈에 보입니다. 가장 양반다운 분들은 시골 분들이죠. 평생 농토와 함께 늙은 분들이 존경스러울 정도로 순수해요. 벌레 잡는다고 논두렁 태우다 불낸 어르신들이 법정에 더러 와요. 농사짓는 분들은 관(官)에 대한 경애심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제 불찰로 바쁘신 판사님을 번거롭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이소’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또 살다 보면 서로 치고받고 싸울 수 있죠. 어제도 쌍방 폭행사건 선고재판이 있었는데, 시골분이 ‘판사님, 잘못했어유. 그런데 제가 벌금 낼 돈이 없는데 좀 깎아주시면 안 되는지… 매달 조금씩 내도록 해 주면 고맙고유’라고 합디다. 벌금이 150만원이었어요. 요즘은 분할상환도 할 수 있어요.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사정 얘기하면 판사도 고마워하고, 또 그분들에게 죄송한 마음도 들지 않겠어요?”
11월2일 오전, 대전지방법원 제2형사부 정갑생(鄭甲生·43) 부장판사를 만났다. 158cm의 자그마한 키에 가냘픈 몸매지만 씩씩해 보이는 여판사였다. 정 판사는 “굵직굵직한 사건을 재판한 적이 없어 유명하지도 않고 시시콜콜한 사건만 맡아 별 재미도 없을 텐데 어떻게 저를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재판하랴, 기록 읽으랴, 판결문 쓰랴, 정신없을 텐데 아이 셋을 키우신다니 그 비결 좀 들으러 왔다”고 했다. 순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차 시비로 1억 손해배상 소송
‘여풍(女風)’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법원이다. 우리나라 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총 2288명. 이 중 431명이 여성이다. 최근엔 신임 법관 임용자의 상당수가 여성이다. 지난 2월만 해도 신임 법관 97명 가운에 절반에 가까운 47명이 여성이었다. 현재 판사나 검사 임용을 앞둔 사법연수원생 190명 가운데 102명이 여성이다.
전체 연수원생 중 여성 연수원생의 비율은 4분의 1. 하지만 판검사로 진출하는 여성 수료생이 전체의 절반이 넘다 보니 “장차 판사도 여자, 검사도 여자, 변호사도 여자인 시대에 법정의 유일한 남성은 피고인일 것”이라는 법조계 여풍 세태를 풍자한 유머가 실감이 난다.
정 판사는 10여 년간 변호사로 활동하다 지난 2000년 뒤늦게 판사로 임용됐다. 그는 “지난 7년간 벌겋게 물든 기록보다 서민의 고통을 담은 반성문을 읽으면서 재판을 해왔다”면서 “민생고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법정”이라고 했다.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니 법정 인심도 각박해지는 것 같단다.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어 법정까지 왔더라고요. 요즘 혼자 사는 남녀가 많잖아요. 피해의식인지, 말 한마디에 발끈하고 자존심 상해서 어쩔 줄 몰라 해요. 서로 상대방이 (차를) 빼야 한다고 우긴 거예요. 몸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쌍방 폭행으로 법정까지 왔어요. 여자 피고인은 ‘사람들 있는 장소에서 창피를 당했으니 1억원을 받아도 성이 안 풀린다’고 했고, 남자는 ‘차에서 애들이 보고 있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쌍방 얘기를 들어보면 다 이해되잖아요. 몸싸움으로 여자는 무릎이 까지고 남자는 얼굴에 손톱자국이 났는데 각각 50만원씩 벌금을 선고했어요. 그런데 여자 피고인이 분하다면서 1억원을 청구하는 손해배상소송을 냈어요. 꼭 1억원을 받겠다는 건 아니고 모멸감을 참을 수 없다는 거죠. 민사재판 조정 땐 심리학자가 배석해 다행히 두 사람의 마음을 살살 녹여줬다고 들었어요. 여자에게 ‘이해한다. 1억원을 받아도 화가 풀리겠느냐. 하지만 대법원까지 가봤자 상처만 크다’고 하니 엉엉 울더랍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200만원을 주는 선에서 조정했다고 들었어요.”
검찰의 기소율 하락에도 한 해에 고소·고발되는 사람이 80여만명에 이른다. 이들 중 기소돼 법정에 서는 사람은 26.9%. 고소·고발된 3명 중 처벌할 만한 혐의가 있는 사람은 1명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