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실험을 통해서도 신약의 독성과 유해성을 검증할 수 있지만 신약물이 상품으로 시판되려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피할 수 없다. 인간에게 신약을 직접 적용해보지 않고서는 그 물질이 인체 내에서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환자가 현재 먹고 있는 음식이나 질환 치료를 위해 함께 쓰이는 각종 약재가 몸속에서 신약과 섞여 어떤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낼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인간 임상시험(1·2·3·4상) 과정에서 많은 환자가 약물 이상반응으로 심각한 피해를 보고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선진국 환자들은 현재 시판 중인 약물로 어쩔 수 없는 단계가 아니라면 인간 임상시험에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선진국은 임상시험에서 생기는 다양한 환자 피해에 대해 나름의 보상책과 유인책을 마련하고 있는데도 임상시험 대상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말기 암 환자 중에도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요구하며 시험대상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의학 진보를 위한 희생’이 일부 국가에 집중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임상 허브’, 인도에서 한국으로
인도가 다국적 제약회사들에게 ‘임상천국’으로 각광 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선진국과는 정반대의 사정 때문이다. 대물림된 가난으로 아파도 약국 근처에도 못 가는 환자가 전역에 널려 있고, 국민의 대다수는 약물 부작용이 생겨도 군말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다. 현재 신약 임상시험에 참가한 인도인은 1만여 명, 인도가 임상 대상자를 제공해 얻는 수익은 연 75억달러에 달한다. 임상시험을 중개하는 인도대외공사는 임상시험 수입이 매년 10억달러씩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인도의 10억 인구 가운데는 심장병 환자만 3000만, 당뇨 환자가 2500만, 에이즈 환자 510만, 정신질환자 1000만, 암 환자도 300만명이 넘는다.
다국적 제약사로서는 선진국의 45%의 저렴한 비용으로 임상시험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하는 환자를 구하기도 쉬운 인도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인도는 지금껏 인간 임상과 관련해 부작용 논란이 단 한 건도 없는 국가다. 제약사 처지에선 1석3조인 셈이지만, 임상시험에 참가하는 인도 빈민들은 무슨 약을 먹는지도 모르고 어떤 부작용이 생겨도 호소할 곳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선진국 제약사들을 위한 ‘인체실험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다국적 제약사의 임상시험장이 한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에 따르면 국내에서 승인된 신약 임상시험은 2000년 33건(신약 기준)에서 2003년 143건, 2005년 185건, 2006년에는 218건으로 급증하고 있다. 올해엔 상반기에 이미 113건을 넘었다. 다국적 임상시험은 2005년에 전체 임상시험의 절반을 넘어선 이후 올해는 약 70%에 육박하고 있다. 임상시험이 통상 몇 년을 끌고 1건당 수십명에서 수백명의 환자가 대상으로 채택되는 점을 감안하면 임상 참가인원에서 한국이 인도에 뒤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이처럼 한국이 다국적 제약사의 ‘임상 허브’로 부각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꼽는 한국의 장점은 임상시험의 속도와 품질, 효율성 등이다. 세계적 제약사인 화이자의 조지프 팩츠코 부사장(최고의학책임자)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아시아의 임상시험 허브로서 필요한 조건을 두루 갖췄다. 특히 수준 높은 개방적 연구인력, 비용과 품질 등 경쟁적인 요소가 뛰어나다”고 했다. 뛰어난 의료인력이 뒷받침돼 정보 수집에서 실수할 확률이 선진국보다 낮고(품질), 사이트에 모집공고를 내면 바로 등록자가 올라올 만큼 환자 모집이 용이하기 때문이다(효율성). 이에 힘입어 서울대병원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집계한 임상시험 등록현황에서 아시아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선정됐고, 서울아산병원, 삼성의료원, 세브란스병원도 10위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