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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루게릭병 환자가 눈빛으로 써내려간 분노의 편지 2만3000자

“무시, 핑계, 거짓말, 말 바꾸기가 참여 정부 복지정책입니까?”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전신마비 루게릭병 환자가 눈빛으로 써내려간 분노의 편지 2만30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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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게릭병 환자 이광복씨. 자신에게 지급되던 간병비가 갑자기 끊기자 보건복지부에 민원을 냈다. 이유를 알고 싶다며 5개월간 13차례 민원을 냈지만 복지부는 우왕좌왕, 거짓말, 복지부동, 모르쇠로 일관했다. 때로는 담당자의 업무 미숙과 퇴직, 때로는 부서 이사와 인사이동 핑계를 댔다. 말을 못하는 그에게 “궁금하면 전화하라”고 했다. 청와대, 감사원,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뺑뺑이’만 돌렸다. 눈을 깜박여 1분에 두 글자를 만드는 그가 ‘신동아’에 보내온 피맺힌 편지. 그것이 전하는 우리 복지행정의 일그러진 단면.
전신마비 루게릭병 환자가 눈빛으로 써내려간 분노의  편지 2만3000자
11월2일 오후 기자의 e메일 계정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제목은 ‘이광복입니다. 자료 보내드립니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쓸데없는’ 자료가 들어오는 터라 마우스는 이미 ‘삭제’ 버튼을 향해 커서를 옮겨놓고 있었다. ‘이광복’이란 작위적 이름은 삭제 의지를 더했다. 그런데 마우스의 왼쪽 버튼을 누르기 직전 ‘희귀난치병 실태고발’이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첨부된 6개 파일 중 하나였다. 마음을 바꿔 ‘한번 읽어나 보자’는 생각에 ‘실태고발’ 파일 문서를 열고 읽어 내려가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59세의 루게릭병 환자로 전신이 마비되고 호흡기에 의존한 상태라 말을 못합니다. 눈 깜박이는 것으로 1분에 두세 글자를 만듭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분에 두세 글자라니…. 첨부파일을 모두 다운로드해 글 전체의 분량을 확인했다. 200자 원고지로 115매, 정확히 2만3000자였다. 그것도 각종 지침이나 표 등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사연만 정리한 글자수가 그랬다. 계산해보면 일주일 꼬박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계속 눈을 깜박여야 쓸 수 있는 분량이다.

“복지부의 간병비 지원 제도가 너무 부당하고 졸속으로 개정되어 그 문제를 밝히다가 민원업무가 더 엉터리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공무원의 ‘놀자판’ 해외연수도 언론에서 비판하지 않았다면 ‘공무원 복지제도’로 존속했을 겁니다. 이런 민원업무도 언론에서 공론화하면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을 간추리면 ‘루게릭병 환자에 대한 정부의 간병비 지원이 올해부터 소득·재산 기준을 적용하면서 갑자기 없어졌는데, 왜 그런지 살펴보니 정책 변화의 근거도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해 민원을 넣고 5개월 동안 보건복지부의 답변을 기다리면서 공무원의 한심한 민원 대처 행태와 복지부동 작태를 뼈저리게 경험했다’는 것. 이씨의 편지는 시종일관 분노에 차 있었지만 논리가 정연하고, 복지부가 전신마비 환자에게 보낸 답은 무성의, 거짓말, 변명 일색이었다.



눈으로만 말하는 환자

이씨의 사연을 전하기 전에 먼저 루게릭병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의학용어로는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이다. 뇌간과 척수의 세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파괴돼 마비증세가 눈을 제외한 전신으로 확대되는 질환으로, 스스로 호흡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호흡보조기 등의 생명연장 기구가 있어야 하는 질병이다. 따라서 호흡기를 달고 있는 루게릭병 환자는 간병인이 없으면 단 하루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이 질환에 ‘루게릭병(Lou Gehrig´s disease)’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1930년대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전설의 4번타자’로 이름을 날리던 야구선수 루 게릭이 1939년 이 질환으로 진단받은 뒤 2년 만에 숨지면서부터다. 루 게릭은 만루홈런만 23개를 쳤고, 2130 경기 연속 출장기록을 남겼다. 이후 메이저 리그에선 그의 등번호 4번이 영구 결번됐다. 그가 마지막 출장할 때 입었던 유니폼은 얼마전 자선 경매에서 40만2500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루게릭병 환자 중에서도 상태가 나은 편에 속한다. 대부분의 환자는 발병 후 수개월에서 몇 년이 지나면 누워서 꼼짝을 못하는데, 호킹 박사는 휠체어에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 현재 국내에는 1000여 명의 루게릭병 환자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호흡기에 의존해 눈을 깜박여 ‘예’ ‘아니오’와 같은 간단한 의사 전달만 할 뿐 글을 쓰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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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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