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코드 그린’ 전략’그 중요성과 한계성

  • 강수돌│고려대 경영학부 교수 ksd@korea.ac.kr

    입력2009-01-30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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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토머스 L. 프리드먼 지음/ 이영민 옮김/ 21세기북스/ 592쪽/ 2만9800원

    REEFIGDCPEERPC ‘ TTCOBCOG”?암호 같은 이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할까?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로 유명한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의 토머스 프리드먼이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한 전략적 대안으로 내놓은 구호다. 왼쪽 기호는 구체적으로 청정 전기 에너지, 에너지 효율성, 자원 생산성, 환경 보호 등을 혁신·생산·배치하기 위한 신재생에너지 시스템의 비용을 뜻하는 영어 문구의 약자다. 또 오른쪽 기호는 석탄, 석유, 가스 등 화석연료 연소에 투입되는 실질 비용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신재생에너지 시스템의 비용이 구래의 화석 연료 시스템의 비용보다 적다는 말이다. 이렇게 에너지 시스템의 변화를 중심으로 하는 ‘코드 그린’ 전략을 시스템적으로 접근해 이행하는 나라가 향후 세계의 미래를 이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코드 그린’ 전략은 프리드먼에 따르면 크게 다섯 가지 핵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첫째 에너지 및 천연자원에 대한 수요 증가와 부족, 둘째 석유 강국 및 석유 독재자에게로의 부의 이동, 셋째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한 파괴적 기후 변화, 넷째 전기 소유 여부로 심화하는 에너지 빈곤, 다섯째 수많은 동식물 멸종으로 인한 생물 다양성 감소 등이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에너지와 기후, 인간의 관계에 새롭게 접근하자는 것이 코드 그린 전략이다. 특히 인터넷과 (수력, 풍력, 태양력 같은 청정) 에너지 기술이 결합된 ‘에너지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기후시대’를 선도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지구의 미래와 지구적 리더십을 결정할 것이라 한다.

    지구가 평평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략은 과연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프리드먼에 따르면, 지금 지구는 갈수록 뜨거워지며, 기존의 온갖 경계선이 제거되면서 평평하게 되어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고, 중국, 인도, 아프리카 바나나공화국(남미) 등지에서 갈수록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점점 붐빈다. 일단 현상적으로 이런 진단은 틀리지 않다.



    화석 연료의 사용, 온실 가스의 증가 등이 지구온난화를 초래한다는 것은 프리드먼 이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이 이슈화한 내용이다. 그리고 실제 현실에서도 점점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예컨대, 북극의 빙하가 녹아서 곰들이 쉴 데가 없고 먹잇감을 구하기 어려워 갈수록 생존이 위협받는다. 또 남태평양의 투발루라는 섬은 해수면의 상승으로 물에 잠겨 더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겨울이 갈수록 따뜻해지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3한4온’이라는 전통적 기후는 사라지고 말았다. 혹자는 아열대 기후로 변했다고 말한다. 나아가 서울에서 자라지 못하던 감이 서울에서도 잘 열리고, 강원도 원주에서도 사과 농사가 잘 된다. 예전에는 추워서 과일 농사가 잘 안 되던 곳도 이제는 기후가 따뜻해지는 바람에 농사가 잘 된다. 그래서 지리책에서 과일이나 대나무의 북방한계선도 바뀌고 있다.

    다음으로 지구가 평평해진다는 것도 사실은 기존의 민족 국가, 낯선 문화 따위가 갖고 있던 경계선들이 갈수록 허물어지거나 경계 자체가 희미해진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자본의 세계화와 더불어 이제는 국가보다 자본이 더욱 큰 힘을 갖고 전 지구를 주름잡고 다닌다는 말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 유연화 등 핵심 구호를 중심으로 온 세상을 재편하고 있다. 그래서 갈수록 평평해진다는 말이다. 요컨대, 온 세상이 더 이상 민족 국가의 울타리를 매개로 보호받기 어렵고 무한 경쟁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평평하다’고 하지만 실은 대단히 무서운 말이다. 유전자 조작 옥수수로 수천 마리씩 키우는 미국 소와 기껏해야 몇 마리씩 키우는 한국 소가 같은 수준에서 경쟁해야 하니, 한국 소가 망할 수밖에 없다. 영세하게 농사짓는 한국 참깨와 대량으로 농약을 뿌려대며 무자비하게 생산하는 중국 참깨가 경쟁이 될 리 없다. 이제 민족국가나 보호무역주의 따위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에 기술, 금융, 정보 등의 ‘민주화’와 더불어 세상이 갈수록 평평해진다.

    그리고 지구가 갈수록 붐빈다는 말도 이해는 된다. 맬서스 식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말이 프리드먼에게도 중요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지구촌 인구는 과연 최근까지만 해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인구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욕구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대로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는 지구 자원이 충분하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지구가 몇 개 있어도 부족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가난한 나라들에서 인구가 증가하는 것에 반비례해서 그들은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자원과 자립능력을 제국주의에 빼앗기고 말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나 붐비는 지구에 대해 무감각해서는 안 된다. 찬찬히 보면 세계화되는 거대 도시는 지나치게 붐비고 농어촌은 화려한 도시의 뒷바라지만 하며 텅 비어간다. 모두 세계화와 더불어 증가하는 탐욕 때문이다.

    더불어 증가하는 탐욕

    바로 이런 점에서 프리드먼의 ‘코드 그린’ 전략은 탁월한 지구적 전략이다. 특히 그가 미국이 9·11 이후 “공포를 수출하는 나라”로 변했다고 하거나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풍조”를 경계하는 부분은 경청할 만하다. 미국식으로 물질적 풍요만 구가하려는 사람들이 러시아 중국 인도에서 소비주의와 부자병(어플루엔자)에 중독되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부분(“집단 자살”)도 옳다. 지구온난화 및 기후 변화, 즉 해수면 상승과 아마존 가뭄, 북극 빙하 융해 등이 상호 작용하면 지구의 종말이 올지도 모르니 더 이상 ‘타이타닉’처럼 무심하게 눈감고 달릴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아에크 나바라 마을처럼 ‘시민 참여’를 통해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야(‘아웃그리닝’) 한다는 점도 지당하다. 자연과의 교감이나 자연 존중이 인간 행복에도 도움 된다는 말 또한 천번만번 옳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려면 미국식 자본주의가 필요합니다. 미국이 친환경 국가가 되면 나머지 세계도 친환경국이 될 것입니다”라는 독일 환경부 장관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에 가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서서히 그의 인식론적 한계가 드러난다.

    과연 프리드먼의 한계는 무엇인가? 우선, 프리드먼은 지구가 뜨거워지고 평평해지고 붐비게 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올바로 해명하고 있지 못하다. (5가지 핵심 문제도 사회보다 환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쩌면 그것을 당연시하거나 그저 주어진 변수로 취급한다. 불행히도 지구가 위기에 빠지고 있는 것은 영국과 미국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돈벌이 세계 시스템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면서 비롯되었다. 또 사람들이 ‘아메리카 드림’으로 상징되는 미국 중산층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를 핵심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내면화하고 일상 생활화했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시스템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필요했던 전제 조건으로, 영국의 경우 기존의 공유지를 사유화하거나 앤클로저 운동을 통해 농업을 붕괴시키거나 토지를 떠난 농민들을 ‘유혈입법’과 같은 국가 폭력을 통해 강제적으로 공장 노동을 하게 만들었던 역사적 사실도 있다.

    ‘코드 그린’의 한계

    미국의 경우 그런 조건의 창출을 위해 노예 해방이 필요했고 원주민‘인디언’들과 들소들을 무자비하게 대량 학살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런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비로소 현실화된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1930년대 이후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한 체제 위협적 혁명을 예방하기 위해 복지국가 전략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것이 1970년대까지 존속했다.

    그러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인터넷 웹사이트와 같은 새로운 것들과 요르단 강변의 올리브 나무 같은 낡은 것들 간의 균형”을 말하며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서 드러나듯, 세계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없이는 스스로 존속하기도 어렵고 경향적으로 저하하는 이윤율 위기를 돌파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근원적 위기는 막기 어렵다는 점이 2008년 가을 이후 세계적 금융 위기와 실물 위기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점을 보지 않은 채 단순히 ‘코드 그린’과 같은 새 구호만 들고 나온다고 미국이 구원 받고 세계가 구원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인정해야 할 ‘불편한 진실’이다.

    또 프리드먼은 기존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나 ‘세계는 평평하다’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미국 우월주의나 미국 자본주의가 가진 합리성(기술·관리주의와 경쟁력) 논리에 빠져 있다. 코드 그린조차 결국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세계 체제의 주도권을 쥐고 최강자로 남으려는 정치경제적 전략이다. 따라서 코드 그린을 위한 혁명의 주체도 미국이어야 하고 미국과 자본 없이 세계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가면 그가 진정 이 세계의‘그린 혁명’을 원하는지가 의심스럽다.

    더 이상 미국과 자본이 세상 변화의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겸손의 패러다임, 모든 사회의 운명은 각 공동체 스스로 책임지고 개척한다는 자율의 패러다임, 그러나 현 상태는 이미 과거의 (신)제국주의적 역사 속에서 매우 불평등하고 왜곡되어 있기에 그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강대국들이 솔선수범하는 범지구적 실천, 바로 이런 것들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굳이 하나 덧붙이면: 멍청아, 문제는 주도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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