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구의 겨울은 오후 3시면 컴컴해진다. 내가 처음 독일 유학을 떠났을 때는 늦은 11월이었다. 베를린 교외의 반제라는 아름다운 호숫가 근처의 노인병원 부설 간호사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컴컴해졌다. 나는 오후 3시부터 그 다음날 해 뜰 때까지 혼자 좁은 방안에 있어야 했다.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도 알은 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몇 달이 지나도록 내게 말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 가도 형식적 눈인사와 ‘굿텐탁’이 전부였다. TV를 보면 외로움이 좀 덜할 것 같았다. 벼룩시장에서 낡은 흑백TV를 샀다. 그러나 독일TV는 한국TV 하고는 전혀 달랐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답답한 토론과 토크쇼가 전부였다.
외로움에 천장이 내려앉다
지루함이 외로움이 되고, 외로움이 고통으로 느껴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개월로 충분했다. 어느 날인가 누워 있으니 천장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해서 벌떡 일어나 앉으니 이젠 벽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공포가 느껴졌다. 바로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한번 가빠진 숨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폐쇄공포증에 걸린 것이다. 감옥의 독방에 오래 갇힌 사람들에게 온다는 그 폐쇄공포증이 내게도 온 것이다. 본격적으로 맛(?)이 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아, 사람은 심리적으로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혼자서는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 누구나 지금 아무리 폼 잡고 잘살아도 심리적으로 한번 무너지면 정말 초라해진다. 처절하게 무너진다. 그리고 그 위기는 살면서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 심리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나도 내가 그렇게 쉽게, 우습게 무너질 줄 몰랐다. 무서워서 내 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밤만 되면 울면서 베를린 밤거리를 헤맸다. 김 서린 창문 너머 행복한 가족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
군대시절, 한겨울 밤새도록 며칠을 걸어야 하는 혹한기 훈련이라는 것이 있었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는 족히 넘는 강원도 화천 북방의 산골을 밤새 걷다 보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부지런히 걸어도 발바닥 시린 것이 가시질 않았다. 방한모 사이로 겨울바람은 뺨을 칼로 찌르는 듯했다. 밤새 걸어 엄청난 무게로 눈꺼풀 위로 내려오는 졸음이나 피곤함보다 아무리 걸어도 가시지 않는 추위가 더 견디기 어려웠다. 어쩌다 멀리 들판 너머 민가의 흐릿한 불빛이 보이면 더 고통스러웠다. 그 불빛이 깜박이는 방안의 정경을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불빛이 깜박이는 그 방안의 따뜻한 방바닥에는 비단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그 이불 옆에 혼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상상에는 매번 그렇게 젊은 여인이 혼자 앉아 있었다. ‘전설의 고향’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여인이 바느질하다 실수로 호롱불을 넘어뜨리고, 넘어진 호롱불이 깨지면서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을 예고하는, 그런 ‘전설의 고향’식 클리셰. 아무튼 그 여인은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뵈는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밤새도록 걸으며 그 흰 가슴 사이에 손을 넣으면 얼마나 따뜻할까 그런 생각만 했다. 요즘 내가 김혜수를 보면 넋을 놓게 되는 바로 그 ‘가슴페티시’는 아마 그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내게 ‘전설의 고향’과 김혜수는 동의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