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으를 권리’ 폴 라파르그 지음/ 차영준 옮김/ 필맥/ 215쪽/ 8000원
한국의 지식인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은 불길처럼 몰려왔다가 순식간에 잦아든 열병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1980년대 중반쯤이었던가. 당시 한국의 ‘시간’은 민중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의 기대를 갖게 했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 또한 이 시기에 봇물 터지듯 넘쳤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기, 세계의 시간은 이미 신자유주의가 부상하고 근대의 해체가 담론의 중심에 들어서 있었다. 1990년대 들어 한국사회는 탈근대의 담론이 확산됨으로써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관심 또한 급속히 식어갔다. 이 과정에는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가 자리하고 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근대적 사회구성의 내면을 형성했던 이성의 질서는 감성과 욕망의 질주로 대체되고, 계급을 구심점으로 한 갈등은 새롭고도 일상적인 갈등으로 전환되었으며, 온라인을 매개로 작동하는 소통의 방식은 기존의 권력구조를 위협하고 있기도 하다. 세상은 새로운 위험의 구조와 불확실성, 예측불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21세기의 현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측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다.
물론 오늘날 노동과 직업의 세계가 유연해짐으로써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소득이 양극화되며, 빈곤이 확대되는 현실은 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화’ 명제를 떠올리며 다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기웃거리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19세기나 20세기 전반부 자본주의의 조건으로부터 너무 먼 오늘의 현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변혁의 교과서’가 아니라 ‘고전의 향기’로 대면하게 한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이들이 언급한 대로 “종교는 가슴 없는 세상의 가슴”이라는 구절을 떠올린다면 어쩌면 오늘의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의 전망과 열망을 잃어버린 인류의 추억이다. 그러나 이 추억은 자본주의 경제원리라는 끈으로 현재에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가버린 추억’ 그 이상일 수 있다.
고전의 가치는 늘 현재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은 당대의 가치와 전망을 담으면서 현재와의 연속과 단절을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고전으로 읽을 때는 이 같은 일반적 고전의 가치를 넘어서는 몇 가지 강렬한 요소가 더 부가되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저술은 사회과학적 표현의 문학성이 어떤 고전보다 강렬하다. 모든 저술에서 분출하는 풍자의 강렬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감흥을 남긴다. 둘째로 물질에서 정신에 이르는 대상세계의 모든 질서를 유물론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설명의 ‘탐욕’이 강렬하다. 셋째로 거의 모든 저술에서 드러나는 혁명에의 실천적 의지가 강렬하다. 당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이토록 강렬한 실천의지는 어쩌면 마르크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놀라움이다.
마르크스의 둘째사위
카를 마르크스의 둘째사위이자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폴 라파르그의 글 모음집 ‘게으를 권리’는 마르크스 고전에서 느껴지는 이 같은 세 가지 강렬함을 골고루 일깨우는 맛이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의 초입에 쓴 라파르그의 글 7편을 모은 이 책은 제목만을 본다면 오히려 오늘날의 시의에 걸맞다. 라파르그를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 ‘게으를 권리’라는 제목은 오늘날 사회변동의 조건에서 솔깃한 주제다.
근대 자본주의가 산업적 단계에 있을 때 모든 사회적 가치는 노동과 일에 집중됐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와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미덕과 선의 기준이 되었고, 게으름과 나태는 당연히 악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상의 가족생활에서도 ‘일하는’ 아버지의 권위가 뚜렷하고 모든 가족문화는 일하는 아버지의 존재를 중심으로 구축됐다.
우리 시대의 무엇보다도 뚜렷한 특징은 이 같은 노동과 일 중심의 사회구성이 해체되었다는 데 있다. 해체사회, 문화사회, 여가사회 등의 개념은 이러한 사회변동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은 감성적 취향과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어떻게 놀 것인가, 얼마나 많은 여가시간을 확보할 것인가에 몰두하고 있다. 당연히 일하는 아버지의 존재는 무력해지고 일상의 가족생활마저 중심이 해체되는 경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이 같은 사회에서 ‘게으를 권리’는 매력적인 적합성을 갖는 개념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