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서평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들

  • 조대엽│고려대 사회학 교수 dycho@korea.ac.kr│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들

2/2
육체에 파문을 선고한 윤리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과도하고도 불량한 선입관이었음이 1883년 생트펠라지 형무소에서 쓴 그의 서문을 접하는 순간 이내 드러나고 만다. 말하자면 ‘게으를 권리’는 19세기의 노동현실에 대한 독실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신랄한 풍자다. 이 풍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노동자들은 일종의 환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환각은 일에 대한 애착 또는 노동에 대한 처절한 열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열정은 개인뿐만 아니라 그 후손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을 고갈시킬 정도인데 성직자와 경제학자와 도덕가들은 이를 신성한 노동의 교리로 덧씌우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강조한 “모든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경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라파르그는 이 같은 자본주의 윤리는 노동자의 육체에 파문을 선고했다고 말한다. 즉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최소한으로만 제공하고, 그들의 기쁨과 분노를 억압하고, 그들에게 기계의 일부가 되어 휴식도, 대가도 없이 일만 하라고 선고했다”는 것이다. 라파르그의 ‘게으를 권리’는 이러한 자본주의 윤리에 침윤된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해방에의 메시지다. 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의 자연적 본능으로 돌아가 부르주아 혁명의 형이상학적 법률가들이 지어낸 무기력한 ‘인간의 권리’보다 1000배는 더 고귀하고 성스러운 ‘게으를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하루에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상품의 신비를 벗기며 설명하는 ‘필요노동시간’의 의미가 라파르그에 의해 현실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러하듯이 라파르그의 인용과 풍자는 고대와 현대를 넘나든다. 노동자를 해방시킬 것으로 여겨졌던 기계의 발명이 오히려 노동자에게 더욱 가혹한 족쇄가 되었다는 사실을 물레방아의 발명을 노래한 그리스 시인을 통해 다음과 같이 풍자하기도 한다.

“오, 일꾼이여, 방아를 돌리던 일손을 놓고 편안하게 잠을 자라. 날이 밝았다고 쓸데없이 울어대는 수탉은 그대로 내버려두자. 데메테르 여신은 노예의 노동을 님프들에게 넘기고는 그들이 물레바퀴에서 즐겁게 일하며 뛰노는 모습과 무거운 물레돌이 굴대와 함께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우리도 조상이 살았던 대로 살자. 데메테르 여신이 주신 선물을 누리며 게으름을 부리고 즐겁게 살자.”



그러나 시인이 노래한 여가는 오지 않았고 19세기의 현실에서 기계는 인간을 훨씬 더 노예로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이렇듯 노동의 교리에 따르고 금욕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게으름은 자본가들의 몫이 되었고, 자본가들은 억지로 놀아야 했으며 생산하지 말아야 했고 과소비를 즐겨야만 했다”고 라파르그는 설파한다. 이어서 라파르그는 17,18세기의 차분하고 합리적인 습관을 가졌던 자본가가 얼마나 방탕해졌는지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당시 자본가의 허영을 충족시키는 하인의 규모가 섬유산업노동자와 광부, 혹은 섬유산업노동자와 금속노동자를 합한 것보다 많다는 점을 ‘자본론’으로부터 인용하여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주는 대목은 마르크스를 읽어본 독자에게는 친숙하다.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라파르그의 풍자는 이 책에 포함된 다른 글 ‘말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에서 압권을 이룬다. ‘말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가 현실이라면 ‘게으를 권리’는 혁명에 대한 요청이다. 라파르그의 이 두 편의 글이 마르크스 고전의 풍자적 강렬함을 일깨운다면 다른 글들은 마르크스 고전의 두 번째 강렬함으로 안내한다. 즉 물질과 정신의 모든 세계 내적 질서를 설명해내고자 하는 유물론적 설명의 강렬함은 ‘추상적 개념의 기원’ ‘아테나 신화’ 나아가 ‘여성문제’ 등에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 고전의 세 번째 강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혁명을 향한 투철한 실천적 의지는 두 편의 다른 글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과 ‘사회주의와 지식인’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은 마르크스를 누구보다 더 가까이에서 지켜본 저자가 마르크스의 일상까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21세기의 오늘은 19세기의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 이성적 기획과 혁명의 의지에 따른 유토피아의 꿈이 성찰과 해체, 불확실성, 개별화된 욕구와 시장의 횡포 앞에 무력해진 지 오래다. 라파르그의 글 모음집은 인류의 잃어버린 꿈을 회상하게 해준다. 7편의 글은 거의 완벽하게 마르크스를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마르크스를 완벽하게 비추어주는 글들 속에서 당대의 걸출한 실천가이자 사상가였던 ‘폴 라파르그’ 자신을 찾을 대목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동시대를 산 마르크스주의자의 또 하나의 고전이 우리에게 제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러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듯하다.

신동아 2009년 6월호

2/2
조대엽│고려대 사회학 교수 dycho@korea.ac.kr│
목록 닫기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들

댓글 창 닫기

2021/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