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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특별함 ④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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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보수적인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거센 비난을 샀다. 그럴수록 프로이트는 더 당당해졌다. 유대인으로 갖은 핍박을 받아야 했던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고 증오하는 적(敵)이 있어야 더 강해진다고 믿고 살았다. 가난, 나치스의 위협, 제자의 반란, 그리고 20여 년을 괴롭힌 암마저 그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크문트 프로이트<br>● 1856년 모라비아(현 체코) 출생<br>● 1873년 빈 대학 입학<br>● 1886년 개인 병원 개원, 마르타와 결혼<br>● 1900년 ‘꿈의 해석’ 출간<br>● 1902년 빈 대학 부교수로 임명, 수요일 저녁 모임 시작<br>● 1908년 빈 정신분석학회 발족<br>● 1911년 ‘토템과 터부’ 출간<br>● 1913년 카를 융과 결별<br>● 1923년 구강암 수술<br>● 1932년 아인슈타인과의 서신교환집 ‘왜 전쟁인가’ 출간<br>● 1938년 오스트리아, 독일에 합병. 프로이트 일가 영국 망명<br>● 1939년 ‘모세와 일신교’ 출간, 9월23일 83세로 사망

오래된 도시 런던에는 크고 작은 박물관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영박물관처럼 크고 유명한 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헨델이나 디킨스처럼 한 위대한 개인에게 바쳐진 박물관도 있다. 이런 작은 박물관들은 대개 그 위인이 생전에 거처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경우인데, 위인이 생전에 쓰던 가구는 물론이고 옷과 책들, 모자와 펜 한 자루까지 세심하게 보관해놓은 곳이 많다.

그 같은 개인 박물관 중에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의 박물관이 있다. 그의 박물관은 학자와 문인이 많이 사는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에 숨듯이 자리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만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스에게 점령당하자,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런던은 서른 번이 넘는 구강암 수술로 병색이 완연한 노학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프로이트는 생의 마지막 1년을 런던에서 지내다가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가 지금의 프로이트 박물관이다.

필자가 런던에 체류했던 2년 전, 겨울임에도 따스한 햇살을 등진 채 햄스테드의 프로이트 박물관을 찾아 나섰다. 고적한 주택가에 그가 살던 2층집이 있다. 프로이트의 아들들은 이 집을 빈에 있던 집과 똑같이 꾸미려고 애썼고, 프로이트는 ‘우리에겐 참 아름다운 집’이라면서 만족스러워했다.

프로이트가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집만이 아니었다. 국적을 막론하고 뛰어난 재능에 관대한 런던 시민들은 프로이트를 진정으로 환대했다. 영국 왕립협회가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였으며 런던의 신문에 늘 그의 동정이 실렸다. 런던 시민들은 산책에 나선 프로이트에게 상냥하게 인사했고 택시기사들은 그가 굳이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로 데려다주었다. 임종을 앞둔 프로이트는 자신의 런던 생활에 대해 “내 평생 진정한 명예가 무엇인지 런던에서 비로소 실감했다”고 토로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빈을 떠나 런던을 택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투쟁으로 점철된 삶



프로이트가 살던 집 안에는 프로이트가 평생 동안 수집한 이집트와 그리스의 골동품과 장서, 책상, 환자가 정신분석을 받을 때 누웠던 고급스러운 장의자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벽에는 달리가 그려준 목탄 드로잉이 걸려 있고, 1층의 책상 위에는 프로이트가 생전에 썼던 동그란 안경이 놓여 있다. 마치 그가 조금 전까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 창백한 겨울 햇살이 내려앉았다.

프로이트 박물관을 찾은 이들은 2층에서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망명한 1938년 겨울, BBC 라디오는 이 집에서 프로이트와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그때의 육성이 2층의 비디오 룸에서 흘러나온다.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처음 주장한 이래 나는 많은 이에게 비난과 모욕, 핍박을 받았다. 이제 시간이 흘러 세상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주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My struggle is not over yet).”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영어가 유창하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인터뷰를 할 당시 프로이트는 여든둘의 노인이었으며 구강암 수술로 입 안의 치아와 점막이 대부분 제거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나의 괴물’이라고 부르던 보철기를 입 안에 끼우고 있어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더구나 독일어권에서 평생을 살아온 프로이트가 영어로 유창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프로이트는 영어 외에 프랑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에 능통하고 특히 영어 실력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원문으로 읽을 만큼 뛰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으로 각인된 것은 프로이트의 영어 실력이 아니라 그가 남긴 한 줄의 문장이다.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그 말은 프로이트의 평생을 압축한 것일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인생은 탄생부터 사망까지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조용해 보이는 이 남자는 무쇠보다 더 강한 의지로 모든 장애물에 맞섰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념을 가진 인간은 무한정 강하며 결코 죽지 않는다.” 실제로 그랬다. 유대인이라는 태생도, 교수의 길을 포기하게 만든 가난도, 정신분석학에 쏟아진 학계의 비난과 공격도, 빈 시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도, 심지어 죽음마저 그를 무릎 꿇릴 수 없었다. 그는 강한 적을 만나면 더욱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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