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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시네마 테라피 ⑥

탐내는 건 어쩔수 없으나, 탐하지는 말라!

  • 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탐내는 건 어쩔수 없으나, 탐하지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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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내는 건 어쩔수            없으나, 탐하지는 말라!

영화 ‘어톤먼트’

“내가 흡혈귀가 되지 않았다면…”

‘친구의 아내와 놀아난 신부.’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박쥐’는 도발적 시놉시스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50명의 피시험자를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간 죽음의 바이러스 연구에 신부 상현이 자원한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헌신해 세상에 이로움을 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의 이런 기도가 이상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상현은 이브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음에 이르지만 수혈로 갱생한다. 문제는 그가 흡혈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언뜻 ‘박쥐’는 흡혈귀가 된 사제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신성한 인간인 신부와 인간의 문제, 죄책감을 다루는 작품으로 보인다는 의미다. 하지만 좀 더 중요한 문제는, 그가 피를 먹는다는 사실이 아닌, 친구의 아내를 빼앗는다는 데 있다. 상현은 친구의 아내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친구, 그러니까 그 여자의 남편마저 살해한다. 친구의 아내와 섹스를 하고, 피를 빨아먹고, 살인하는 것, 상현은 신부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을 한꺼번에 저지른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신부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평범한 인간이라면 남의 아내와 섹스하고 피를 빨고 살인을 해도 될까? 물론 안 된다. 신부 상현이 저지르는 행동들은 신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 친구의 아내를 탐하거나 흡혈을 하거나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탐내는 건 어쩔수            없으나, 탐하지는 말라!

영화 ‘아마데우스’

상현은 친구의 아내 태주에게 말한다. “내가 흡혈귀가 되지 않았다면 너랑 섹스했겠어?” 하지만 이 말은 모순이다. 상현은 흡혈귀가 되고 난 후 태주를 탐한다. 하지만 그는 여자와 섹스하고 살인하기 위해 흡혈귀가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흡혈귀는 상현의 일탈과 위반을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순교를 다짐했다가 ‘실수로’ 흡혈귀가 되었기에 그는 자신의 욕망을 일종의 전염병처럼 다룬다. 그에게 욕망은 매우 우연한 사고로 설명되지만 그 욕망들은 내면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었을 뿐이다.



상현은 말한다. “전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합니다. 그게 죄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 그는 친구의 아내를 탐해 그녀를 얻는다. 그런데 그는 그 공간을 지옥이라고 부른다. 살이 썩어들어가는 지옥 속의 삶은 탐나는 타인의 삶을 탐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타오르는 질투를 안겨주지만,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질투에서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싶을 때, 그리고 금지어들 때문에 삶이 탱탱해진다.

그러므로 ‘박쥐’는 탐나지만 탐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탐나는 것을 탐하는 순간, 인간은 흡혈귀가 되어 햇빛을 피해 다녀야 한다. 인간이 흡혈귀가 되는 경계는 탐냄과 탐함의 경계와 일치한다. 인간은 남의 아내를 보고 욕망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뜨겁게 간음하지만 아닌 척 외면한다. 친구의 아내를 탐내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이다. 그럼에도 친구의 아내를 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질 수 없으니 파괴해버리는 심정

영화가 시작되면 소녀 브리오니가 직각보행으로 어딘가 서둘러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단발의 금발머리 소녀의 꼭 다문 입술과 야윈 팔이 선병질적 인상을 풍긴다. 소녀는 엄마에게 달려가 첫 번째 희곡을 완성했음을 알린다. 그런데 그 희곡 내용이 수상하다. 영화 ‘어톤먼트’는 사랑을 거절당한 여자의 드라마다. 브리오니는 로비를 사랑하지만 로비는 브리오니의 언니 세실리아를 사랑한다. 브리오니는 어리다. 그녀는 여자가 아니라 소녀,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언니 세실리아는 브리오니에게 없는 관능미를 갖고 있다. 세실리아는 브리오니에게 없는 그것으로 로비와 사랑을 나눈다. 브리오니는 용서할 수 없다. 그 사랑법은 브리오니가 따라 할 수 없는, 아직은 남의 것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브리오니는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가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환한 햇빛 아래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정원에 서 있지만 로비와 세실리아의 자태는 색정적이기 그지없다. 몸에 달라붙은 속옷을 입고 분수에 뛰어드는 세실리아와 그녀의 손을 가로채듯 잡는 로비. 그들의 눈빛은 멀리 있는 브리오니의 체온마저 상승시킨다. 영악한 브리오니는 깨닫는다. 로비의 저 눈빛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던져주지 않은 ‘에로스’라는 사실을 말이다.

브리오니는 엉겨있는 세실리아와 로비를 보고 ‘변태’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그녀는 둘의 행위가 이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야릇한 느낌을 선사했기에 저주한다. 브리오니는 둘의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척하지만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원하지만 아직은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에 대한 질투심은 결국 그 운명을 훼방 놓겠다는 잘못된 ‘연출자’의 각오로 실현된다.

브리오니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로비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아 그를 파괴하고 싶어졌다는 것을. 마치 경쟁자가 생겼을 때 소중히 아끼는 장난감을 되레 부숴버리는 못된 아이처럼, 브리오니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로비를 파멸시키고 싶어한다. 가슴 아픈 것은 브리오니의 사랑법이 어른이 된 우리들 가운데도 있다는 사실이다.

브리오니는 마지막 순간 고백하고 구원을 받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용서받기 어려울 듯싶다. 브리오니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양식을 빌려 로비와 세실리아의 비극적 멜로드라마를 해피엔딩의 로맨스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그렇게 해서라도 둘의 사랑을 완성해주고 속죄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바람은 말년에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덜어내고자 하는 노인네의 이기심과 다를 바 없다. 고백함으로써 브리오니는 구원받고자 한다. 고백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하지만 구원은 또 다른 곳에서 행해져야만 할 것이다.

‘어톤먼트’가 구원이나 고백이 아닌 ‘속죄’의 뜻일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속죄는 끝이 없다. 끝이 없어야만 한다. 한 소녀의 치기 어린 욕망이 전쟁과 그토록 밀접하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원리가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 역시 살아남은 자의 후회와 고백으로 기록되곤 한다. 신이 되고 싶었지만 징벌만 내릴 뿐 구원을 줄 수 없었던 브리오니. 그녀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모든 허구의 창조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그들은 잔인하다. 하지만 신을 흉내 낼 뿐 그들은 신이 아니다. 신은 삶을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관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겸손할 줄 모르는 복 받은 자들

그의 이름은 신이 가장 사랑한 자다. ‘아마데우스(Amadeus)’는 ‘신이 가장 사랑하는(Beloved of God)’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신이 사랑한 남자 모차르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626편의 명곡을 남겼다. 지금도 그의 이름은 세계 어디에선가 호명된다. 영화는 신이 사랑한 오만하고 겸손할 줄 몰랐던 천재를 독살했다며 소란을 떠는 한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이 남자는 감히 자신이 천재 음악가를 독살했다고 소리 지른다. 아니 고해한다.

1985년작 ‘아마데우스’는 요절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사망 전 10여 년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모차르트의 삶을 그 주변 인물 살리에르의 눈을 통해 조형했다는 점이다. 세기의 천재,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곡가와 동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평범한 음악가, 살리에르. 예술가에게 타인의 재능에 대한 질투와 탐욕은 존재의 아이러니와도 같다. 예술가는 타인의 재능에 대한 질투와 탐내는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발굴하고 키워나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끝끝내 넘을 수 없는 재능의 한계 때문에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모차르트와 동시대를 산 살리에르 역시 그런 의미에서 불운한 예술가였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는 가설에서 시작된다. 실존 인물의 삶을 상상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이 기억에 남는 것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으로 인해 그늘진 삶을 살아야만 했던 살리에르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아마데우스’가 불멸의 작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살리에르는 지금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을 대표한다. 우리는 살리에르처럼 평범하기에 노력해야 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1%의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런데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 그렇게 쉽게 재능을 소모하는 이들은 평범한 우리들로 하여금 상대적 결핍을 느끼게 한다. 상대적 결핍감은 우울하고 초라한 자기 발견이기도 하다. 아마데우스, 그가 재능을 화려하게 선보일수록 평범한 우리, ‘살리에르’는 안타깝게도 거울을 들여다보며 질투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음악들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처절한 심리적 갈등으로 인해 더 빛난다.

탐내는 건 어쩔수            없으나, 탐하지는 말라!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이 사랑한, 이 재능 있는 사람들은 좀체 자신의 재능에 겸손할 줄 모른다. 그들은 아침이면 눈을 뜨고 갈증이 생기면 물을 마시듯 자신의 재능을 소비한다. 밤새 기다려도 오지 않는 뮤즈가 경솔한 그들에게는 무시로 인사를 건넨다. 천재의 특권인 양 그들은 감사할 줄 모른다. 탐나는 재주를 지닌 예술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아주 짧은 시간 탕진하고 세상과 결별한다. 그들의 빛나는 재주는 인류의 중요한 자산이지만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그늘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 재주는 탐나지만 결코 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간은 많은 것을 탐내지만 탐내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더 남의 것이 탐나지 않을까? 탐나지만 탐해서는 안 되는 것, 인간다움이란 어쩌면 거기서 시작되는 지도 모르겠다.

신동아 200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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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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