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히 이미지가 현실을 넘어서는 현대를 사는 남자가 옷차림, 특별히 슈트라는 복식에 관심을 갖고 차츰 그 활용에 탄력을 받기까지는 시간과 금전을 반드시 투자해야 한다. 옷 잘 입는다고 주위에서 평가받는 누군가는 분명 상당한 시행착오와 금전적인 투자를 해왔을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칭송은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볼 수도 있다. 슈트와 와인, 혹은 그림은 그런 면에서 아주 닮았다.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데 일단 부담스러워 보인다는 것, 그래서 항상 시작하기가 어렵다는 것, 용기 내어 관심을 가져보면 책을 통한 이론적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책만으로는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영원히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고 겉에서 맴돌 뿐이라는 것 등등.
남자들은 슈트에 대한 추억담이 많다. 학교나 직장에서 누군가가 슈트 입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책이나 온라인에서 얻는 정보들도 개개인의 수준에 딱 부합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옷장을 열어보면 슈트의 수는 많지만, 중요한 자리에 입고 나갈 만큼 좋은 슈트는 그리 많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개인마다 그만큼 시행착오가 많았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분별없이 산 슈트 한 벌을 보며 후회를 곱씹은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정말 잘 어울리세요.”
이 말은 사람의 이성을 꼭꼭 묶어두고 오로지 그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하도록 만드는 마법의 언어다. 그러나 말쑥한 옷차림과 세련된 화술로 나의 지갑을 열게 했던 판매원들은 그들이 판매한 슈트를 제대로 입는 방식에 대해서는 애프터서비스를 해주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슈트를 사고 난 후 더 이상 입지 않은 경험을 몇 번 반복하게 되면 매장 판매원들이 곧 비즈니스맨이라는 뼈아픈 사실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만의 것’에 대한 은밀한 욕구를 그들은 잘도 알아차린다. 역시 프로답다.
“이 슈트가 어울리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정말 주인을 제대로 만났네요.”
얼마나 설득력 있는 대사인가. 물건을 팔기 위한 상술이라기보다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배려하는 듯한 따스함까지 느껴져 역시 마지막에는 지갑을 열어버리고 만다. 그 옷이 정말로 내게 어울리는지 여부는 신중하게 따지지 않는다. 또 개성 강한 배우자가 소비권을 독점하는 이 시대에는 본인이 입을 슈트도 그녀들이 미리 간택해버리는 수가 많다.
“내가 보기엔 이게 젤 나은 거 같네요. 그걸로 하세요. 사이즈는 좀 넉넉하게!”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잘 입지도 않는 상당량의 슈트를 옷장에 보관하게 된 것이다. 사지 않아도 될 물건을 샀다면 개인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현상이 만연한 것은 우리 남자들이 슈트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슈트에 대한 지식은 인디애나 존스 박사가 고대 유물을 탐험하듯 어려운 과정도 아닌데, 왜 이토록 실용적인 정보가 없는 것일까. 타인이 나에게 강요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내게 필요한 스타일을 찾는 심미안은 없을까. 게다가 제대로 입으면 다섯 살은 더 젊어 보인다는 올바른 슈트를 찾는 혜안은 없을까. 그리고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지혜는 어떻게 터득할 수 있을까.
슈트의 두 가지 콘셉트
그 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아래의 내용들을 번호를 하나씩 짚어가면서 가볍게 읽다보면 어느새 옷장 속에 걸린 당신의 슈트들이 남다르게 보일 것이다. 비슷하게만 보였던 그 옷들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스스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한국 현대화의 블루칩 이우환 선생의 ‘조응’시리즈를 처음 대하면, 그 그림들은 그저 점이나 면들의 불규칙적인 배열로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림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갖고 디테일을 천천히 음미하다보면 이윽고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다. 슈트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