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구 인터넷 수능방송과 한 사설 교육업체가 개최한 ‘2010학년도 입학사정관 전형 지원전략 설명회’장. 학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조상식 교수는 “미국의 신입생 선발 방식이 객관적인 수치 없이도 공정성을 인정받는 건 전적으로 입학사정관들의 역량 덕분”이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 전형이 성공하려면 능력 있고 공정한 입학사정관이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입학사정관 10명 중 9명은 비정규직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전개되고 있다. 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입수한 ‘대학별 입학사정관 고용형태’ 자료에 따르면 6월 말 기준으로 국내 39개 대학 입학사정관 230명 가운데 정규직은 20명(11.5%)에 불과하다. 고려대는 13명의 전임사정관이 모두 계약직이고, 성균관대는 6명의 전임사정관 중 정규직이 1명에 불과하다. 이화여대는 8명 중 1명, 포항공대도 6명 중 1명, 카이스트는 5명 중 1명만이 정규직이다. 입학사정관이 전형을 둘러싼 각종 압력이나 입시학원들의 로비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계약이 연장되지 않을 경우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사교육업체로 자리를 옮길 가능성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이들의 판단을 믿기란 쉽지 않다.
사정관들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것도 문제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정부 재정지원을 받아 입학사정관 전형을 실시하는 국내 47개 대학의 입학사정관은 360명(채용 예정 인원 포함)에 불과하다. 미국 버클리대 한 곳이 확보한 사정관 숫자 110명의 3배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이러다보니 연세대는 이번 입시에서 입학사정관 6명(채용예정 3명 포함)이 1377명을 선발하게 됐다. 부경대(195명), 중앙대(128.9명), KAIST(127.5명), 인하대(113.3명), 울산과기대(100명), 성균관대(99.5명) 등도 입학사정관 1인당 선발규모가 만만치 않다.
사정관의 전문성도 문제다.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이 공개한‘2009학년도 입학사정관 채용 현황’을 보면 입학사정관의 학력과 경력도 기대에 못 미친다. 2008년 10월 현재 A대학에 채용된 입학사정관 10명 가운데 4명은 20대 학사학위 소지자다. 별다른 경력이 없는 24세 대졸자도 이 대학 사정관이 됐다. 이들의 연봉은 2600만원 수준. 서울 B대학도 28세 대졸자를 연봉 2200여만원에 비정규직 입학사정관으로 고용했다. 기간제 교사 출신, 공고에서 1년간 진학지도한 것이 경력의 전부인 사람도 있다.
조상식 교수는 “현실적으로 이분들이 지원자의 잠재력과 미래가능성을 찾아낼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학생부나 경력사항 등에 대한 서류를 검토해 지원자를 3배수나 5배수 선까지 걸러내는 일 정도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입시철에 바쁜 입학처의 일손을 덜어주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다. 이걸 갖고 입학사정관 전형이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반면 미국 대학의 입학사정관은 대부분 고교의 입시 담당 교사 출신이거나, 여러 대학에서 수십 년간 전문적으로 입학 업무만 담당해온 교직원 출신이다.
특목고는 만족, 일반고는 글쎄…
우리나라에서도 대입 관계자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입학사정관의 경력은 이와 유사하다. 고려대 교육문제연구소 박혜림 연구교수가 서울대 연세대 등 10개 대학 입학 업무 담당자와 입학사정관제 연구자 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은 ‘석사 출신 30대로, 3년 이상 입학 업무를 담당한 사람’이 입학사정관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44.8%는 입학사정관의 적당한 수련 기간을 3∼5년으로 꼽았고, 27.6%는 ‘5년 이상 수련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교육연구자(41.1%)나 고교 교사(33.9%) 출신이 선호됐다.
그럼에도 일선 대학이 경력 있는 입학사정관 채용을 망설이는 이유는 제도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입학사정관제를 확대시키기 위해 올해 47개 대학에 236억원을 지원했다. 당장은 이 예산으로 사정관을 채용하고 전형을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예산 지원이 끊긴 이후에도 입학사정관제를 계속 운용할지에 대해 아직 대학 측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복잡한 전형 과정 없이 수능점수만으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현행 입시제도는 대학 측에 훨씬 매력적이다. 명문대는 여전히 본고사 부활 등을 고려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정부의 ‘푸시’에도 불구하고 아직 ‘입학사정관제’를 대학의 장기 계획으로 확정할 수 없는 셈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입학처장은 이에 대해 “입학사정관제가 과연 우리나라 입시제도의 주류가 될지 아직 의구심을 갖고 있다. 정규직원을 채용했다가 몇 년 지나지 않아 제도가 사라지면 유휴인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부담스럽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현실에서 입학사정관들이 전문성과 사명감을 갖고 책임감 있게 학생을 선발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들이 부정입학이나 기여입학, 고교등급제 적용 등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입학사정관 전형을 도입한 대학 중 일부가 일선 고교에 ‘스쿨 프로파일’을 요청한 것도 이런 의혹에 불을 붙였다. 스쿨 프로파일은 학교의 특징이나 장점 등을 대학에 알리기 위해 작성하는 학교 소개 자료. 미국에서는 입학사정관이 일선 고교를 돌며 직접 작성하거나 고교에서 만들어 대학에 제출한다.
문제가 된 것은 대학 측이 요구한 항목이 매우 세부적인데다 학교 간 우열 비교가 쉽게 이뤄질 수 있는 민감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서울의 한 대학은 고교 측에 대학 진학자 수를 ▷의·치·한의·약학 ▷수도권 대학 ▷지방국립대 ▷지방사립대 ▷교대·경찰대·사관학교 등으로 세분화해 제출도록 요구했다. 일선 고교는 대학이 이 자료를 고교 서열화에 활용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다. 부산의 한 고교 교감은 “대학에서 스쿨 프로파일을 취합해 비교 분석하면 얼마든지 학교 순위를 매길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학교 평가와 고교 등급제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고 했다. 대전의 한 인문계고 교사는 “대학이 졸업생 수준 등에 따라 학생 평가에 차이를 둔다면 당연히 특목고와 비평준화 명문고 학생들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며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되면 지방의 인문계고 출신들은 서울 명문대 진학이 더욱 어려워질까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지원자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입학사정관 전형을 통과하려면 면접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교육 백년대계 세워야
이에 따라 교육계에서는 “입학사정관제의 취지에는 동감하나 갑작스러운 확대에는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최근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자문위원인 안선회 한국교육연구소 부소장이 입학사정관제의 급속한 확대를 경고하고 나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 부소장은 최근 한나라당 사교육대책 TF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입학사정관제가 정부 기대와는 반대로 사교육 증가요인이 될 우려가 있다”며 “기존 내신과 수능에 면접(입학사정관제)까지 준비해야 하면‘신종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입학사정관제의 전면 확대보다는 ▲대학모집 단위별 특성화와 고교 교육의 다양화 ▲공정성·신뢰성 제고 ▲학생부 기록방식 개선 ▲학교 컨설팅 연구소와 전문가 육성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의 최미숙 대표도 “아직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제도를 계속 확대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우선은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입시를 치를 수 있는 기반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입학사정관 전형을 진행하는 이의 목소리는 대안을 모색하는 데 의미가 있을 듯하다. 최지연 성균관대 입학관리팀 전문위원은 “학생과 학부모 모두 점수를 잣대로 한 정량적(定量的) 평가에 익숙한 현실에서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면 한동안 공정성 시비가 불가피할 것”이라며 “이를 해소하려면 대학은 입학사정관들이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학생들을 평가하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정부는 국민이 입학사정관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이들의 전문성을 키워주는 데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신뢰가 정착될 때가 바로 입학사정관 전형이 확대될 시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