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하는’

‘흐르는 강물처럼’과 폭탄주

  • 김원곤│서울대 흉부외과 교수│

    입력2009-12-08 16: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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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초 미국의 한 목사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수작 ‘흐르는 강물처럼’엔 뜻밖에도 ‘폭탄주’가 등장한다. 과감한 제조법과 독특한 세리머니까지 우리 사회의 음주문화와 꼭 닮았다. 한국 특유의 ‘속전속결’ 음주문화로만 알았던 폭탄주가 동서양 애주가들로부터 오랜 사랑을 받는 이유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은 영화배우 출신 로버트 레드퍼드가 감독을 맡은 1992년 작품으로, 미국의 저명한 장로교 목사 노먼 매클린(1902~90)의 자전적 소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최우수 촬영상을 수상한 명성에 걸맞게 수채화 같은 영상을 펼쳐 보인다. 미국 몬태나주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한 플라이 낚싯줄의 예술적인 움직임과 더불어 가족 간의 사랑과 아픔 그리고 인생의 참 의미를 잔잔하게 전달한다.

    영화는 1900년대 초반 미국 몬태나주 서부에 있는 미줄라 마을의 한 목가적인 강가를 무대로 펼쳐진다. 노먼(크레이그 셰퍼 분)은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 리버런드 매클레인(톰 스커릿 분)과 인자한 어머니(브렌다 블레신 분) 그리고 동생 폴(브래드 피트 분)과 함께 풍족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버지는 성실하게 목회 활동을 하는 한편 미끼 없이 하는 플라이 낚시를 종교와 동일시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아버지는 “낚시하는 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낚시를 해 고기를 모독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두 아들에게 낚시를 제대로 가르치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들의 교육을 떠맡을 정도로 고지식한 성격이다. 그러면서도 오후 시간만은 자연과 마음껏 벗하라고 아들들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자상한 아버지다.

    순종적인 노먼, 반항적인 폴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하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장남 노먼이 폭탄주를 들이켠 뒤 양주잔을 입에 물었다.

    두 아들 노먼과 폴은 각기 아주 다른 개성을 지녔다. 강한 성격과 튼튼한 체력은 닮았으나, 장남인 노먼이 질서에 순응하며 책임감이 강한 성격인 데 반해 폴은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기질이었다. 그래서 폴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반항도 하고 돌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폴의 성격은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한발 나아가 독창적인 플라이 낚시 기법을 개발하는 바탕이 되기도 해 형 노먼의 부러움을 샀다. 두 형제는 장성해 각자의 길을 걷는다. 노먼은 바라던 대로 미국 동부 명문 다트머스대학에 합격, 집을 떠나 영문학을 공부한다. 반면 고향 몬태나와 낚시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폴은 ‘아직까지 잡아보지 못한 고기를 잡기 위해’ 그 지역 대학에 진학해 고향에 남는다.



    그로부터 수년 뒤 노먼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다. 폴도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 신문 기자가 되었다. 노먼은 고향에서 열린 미국 독립기념일 축제 때 제시(에밀리 로이드 분)라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관련 일을 하다 잠시 고향에 들른 그녀 오빠의 과시적인 행동으로 인해 두 사람은 약간의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사랑의 결실을 본다. 이즈음 노먼은 명문 시카고대학으로부터 대학원 합격 소식과 함께 학부 학생들에게 영문학 강의를 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부모가 더없이 기뻐하는 가운데 노먼은 제시와 함께 시카고로 떠나기로 한다.

    가족의 한없는 사랑

    한편 폴은 여전히 활발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고 있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이 그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당시 백인사회에서는 유색인종과의 연애가 금기시됐다. 그런데 폴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메리카 원주민과 공개적으로 교제한다. 이런 돌출행동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도박 빚이었다. 도박에 빠져 삶이 피폐해져가는 와중에도 폴은 이런 사실을 숨긴 채 아버지, 형과 함께 결국 일생의 마지막이 되는, 빅 블랙풋 강으로 낚시를 하러 떠난다. 폴은 아버지와 형 앞에서 이미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낚시 솜씨를 한껏 뽐낸다. 그러나 노먼과 제시가 시카고로 떠나기로 한 날 아침, 가족들은 경찰로부터 폴이 총에 맞아 거리에 버려진 채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는다. 도박과 관련 있는 타살이었다. 가족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노먼이 어머니, 아내 제시와 함께 교회에서 이제는 늙어버린 목회자 아버지의 마지막 설교를 듣고 있다. 아버지는 설교 중에 죽은 폴을 그리며 “비록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생전 일탈 행동에 관계없이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늙은 노먼이 사랑하는 아내 제시를 포함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는’ 주위 사람들을 다 떠나보내고 홀로 과거를 회상하며 낚시하는 장면이다. 변함없이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하는’

    1, 2, 3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4 영화 ‘토탈 이클립스’

    “A couple of boilermakers!”

    이 추억의 명화에는 놓치기 어려운 흥미로운 술이 하나 등장한다. 다름 아닌 ‘폭탄주’다. 노먼이 연인 제시에게 프러포즈를 한 뒤 한껏 들떠 술집에 있는 폴을 찾아왔을 때다. 상기된 노먼은 바텐더에게 호기롭게 폭탄주 두 잔을 주문한다. “Give us a couple of boilermakers!” 이윽고 바텐더가 각각 맥주와 위스키가 담긴 잔을 내놓자 노먼은 맥주잔에 위스키잔을 넣고 한숨에 쭉 들이켠다. 오늘날 우리의 폭탄주 음용법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폭탄주를 다 마시고 나서는 빈 위스키잔을 입에 무는 세리머니까지 하는 게 아닌가! 폭탄주를 마신 뒤 노먼은 제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노라고 폴에게 고백한다. 폴은 형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마음이 이미 도박판에 가 있다. 그 때문에 재빨리 위스키잔만 비우고는 “형의 운을 빌려 도박판에서 돈을 따봐야겠다”며 형을 데리고 나간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폭탄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폭탄주는 우리 사회에서 음주 방식을 떠나 일종의 술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일상적인 회식 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임에서도 의기투합의 상징으로 폭탄주를 돌렸다는 기사를 종종 접한다.

    우리나라에서 폭탄주는 흔히 법조계에서 먼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관련자들의 실명까지 거론되고 있으나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오히려 1960∼70년대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군인들에 의해 확산됐다. 1980년대 초 이른바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정치 일선에 나선 군인들이 정치계와 법조계, 언론계 인사들과의 술자리에서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면서 음주문화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다. 폭탄주라는 이름은, 맥주를 담은 잔에 위스키 잔을 떨어뜨릴 때 맥주거품이 일어나는 모양이 마치 원자폭탄 터질 때 생기는 버섯구름을 연상케 하는 데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이 음주 방법이 단숨에 한국의 음주문화를 바꿔놓은 것은 수많은 찬반양론에 관계없이 우리 정서에 부합하는 강렬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폭탄주 특유의 속전속결, 돌아가며 마심으로써 조성되는 묘한 동질성과 일체성, 이는 어쩌면 우리네 국민성과 일맥상통하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따분함을 거부하는 우리 애주가들의 재치 있는 아이디어가 더해져 실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변형 폭탄주가 끊임없이 개발되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이렇다보니 사람들의 뇌리에는 ‘폭탄주=한국술’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았다.

    폭탄주 마시는 법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폭탄주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음주 형태는 더더욱 아니다. 폭탄주는 그야말로 맥주가 들어있는 큰 잔에 위스키가 들어있는 작은 잔을 넣어 단숨에 마시는 음주 방법을 뜻한다. 다만 위스키 대신 보드카·데킬라·소주를 넣으면 각각 보드카·데킬라·소주 폭탄주가 되는 것이다. 소주 폭탄주는 위스키 폭탄주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인 시선을 의식한 정치인들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고안한 일종의 절충식 폭탄주로 보인다. 어쨌든 이러한 음주 방법을 영어로는 ‘보일러메이커(boilermaker)’라고 한다. 문헌에 따르면 영국 또는 미국에서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져 애용됐다고 하나, 정확한 유래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보일러메이커라는 용어 자체는 과거 스팀엔진을 만드는 기술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1834년에 처음 등장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보일러메이커란 음주방법도 이들의 직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일부 학자들은 술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보일러메이커가 훨씬 먼저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최근 인터넷에 여러 가설이 소개되고 있으나 정확한 답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정확(?)할 것이다. 이런 음주 형태의 유래가 정확히 밝혀져 있다고 하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은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하는’
    김원곤

    1954년 출생

    서울대 의대 졸업, 의학박사(흉부외과학)

    우표, 종(鐘), 술 수집가

    現 서울대 흉부외과 교수




    보일러메이커에 위스키를 먼저 마시고 곧바로 맥주를 마시는 방법을 포함시키기도 하나 엄격하게는 위스키를 맥주에 넣어 마시는 것으로 국한된다. 물론 다 마실 때까지 입을 떼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도 지켜져야 한다. 맥주에 위스키를 첨가하는 방법 중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와 같이 위스키잔을 맥주잔에 빠뜨리는 방법이 ‘정통’이라 할 만하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애용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맥주가 들어있는 잔에 위스키잔을 빠뜨리지 않고 위스키만 따라 마시는 형태가 있다. 이것은 영화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에 등장한 바 있다. ‘토탈 이클립스’는 ‘신동아’ 8월호에 소개했듯 두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폴 베를렌의 운명적 만남과 비극적 애정행각을 그린 영화다. 영화 중반, 술집에서 베를렌이 홀로 술을 마실 때 바로 이 두 번째 음용법이 소개된다. 술집 주인이 위스키 한 잔을 가져와 베를렌 앞에 놓인 맥주잔에 붓는다.

    이렇게 보면 폭탄주야말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동서양의 애주가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전통적인 음주 방법의 하나다. 다만 한잔의 폭탄주와 더불어 흐르는 강물을 관조하는 낭만의 문턱에 들어설 것인지, 흐르는 강물에 덧없이 쓸려갈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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