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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 ⑤

경성제대 졸업한 엘리트, 왜 북한은 이름을 지웠을까?

월북 언론인 이갑섭의‘조보’연구

  • 정진석│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presskr@empal.com│

경성제대 졸업한 엘리트, 왜 북한은 이름을 지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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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 졸업한 엘리트, 왜 북한은 이름을 지웠을까?

이갑섭의 기별지에 관한 연구논문이 실린 북한의 ‘력사론문집’ 제2집. 1958년에 발행되었다.

월북한 이갑섭(조선일보 주필), 홍기문(서울신문 편집국장), 김기림(공립통신 편집국장), 이순탁(연희대 교수), 설정식(시인-영문학자), 오기영(언론인-정치평론가)과 납북된 안재홍(한성일보 사장), 양재하(한성일보 주필), 이정순(자유신문 주필) 같은 사람이 신문학원 강사의 명단에 들어 있었다.

남한의 신문학은 신문의 기능을 연구하고 언론인의 소양을 갖추도록 광범한 지식을 제공하면서 제작 실무에 관한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북한에서는 언론을 당과 정권의 조직자이자 선전선동의 도구로 규정하고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언론학 이론이 바탕을 이뤘다.

북한에서는 자체 언론이론에 따라 조보 연구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강조했다. 첫째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봉건정부는 조보를 ‘이데올로기 계급투쟁의 무기’로 활용하였다는 관점이고, 둘째 ‘근대 신문의 원형은 바로 조보(기별)’이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서 신문이 처음 발행되기 시작했을 때 외국의 신문을 이식(移植), 또는 접목(接木)하였다는 인식은 잘못이며 오래전 왕조시대에 존재했던 조보가 바로 신문의 원형이며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 근대 신문이라는 이론의 정립이 조보 연구의 두 번째 목적이었다.

1958년 10월에 북한 과학원출판사가 발행한 ‘력사론문집’(제2집)에 실린 ‘조선신문의 원형으로서의 기별지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김일성종합대학 신문학강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논문집을 출간할 때에 이미 인쇄가 되어 있던 연구자의 이름을 감추기 위해서 검은 먹으로 지운 후에 배포했다.

논문집의 체제는 페이지 상단에 논문의 제목과 필자 이름을 번갈아 게재하는 방식으로 편집되었다. 왼쪽 짝수 페이지 상단에는 논문 제목, 오른쪽 홀수 페이지 상단에는 필자의 이름을 넣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홀수 페이지 상단에 인쇄된 이름 석자를 까맣게 칠하고 배포한 것이다. 이름 위에 본문 활자 크기로 꼼꼼하게 먹칠을 해서 필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도록 한 것이다.



‘기별지’ 논문은 논문집 127쪽에서 시작하여 270쪽에서 끝나므로 본문 51쪽 분량 가운데 25쪽에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이를 모조리 지웠다. 무슨 이유일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인쇄된 논문집에서 필자의 이름을 지우고 배포하는 경우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와이대학 소장본 ‘력사론문집’

이름이 지워진 논문은 하와이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력사론문집’ 제2집에서 복사된 것으로 하와이 퍼시픽 유니버시티 언론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김민정 박사가 찾아낸 자료다. 필자의 이름이 지워진 논문을 보면서 나는 필시 어떤 사람이 하와이대학 소장본 논문집에 원래는 있었던 이름을 지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를 알 길은 없지만, 여하튼 누군지 고의로 이름을 지웠을 것이라는 것이 처음 떠오른 추측이었다.

그래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김 박사에게 주문을 했더니 같은 논문집에 실린 5편의 논문 가운데 ‘기별지’ 논문만이 아니라 3편은 이름이 지워졌고, 2편은 그대로 이름이 남아 있다고 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떤 사람이 무슨 이유로 자료를 훼손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선 밝혀내야 할 가장 궁금한 사항은 하와이대학 이외의 기관에 소장된 같은 논문집에는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여부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통일부 자료센터에는 1957년도에 발행된 제1집과 1961년 발행된 제5집만이 보관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옌볜대학 도서관과 일본 조총련 대학인 조선대학 도서관에는 이 자료가 있지 않을까?

다행히 중국의 옌볜대학 도서관에도 논문집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하와이대학에서 확인한 것과 마찬가지로 필자의 이름은 검은 잉크로 지워져 있었다. 일본의 조선대학에는 아쉽게도 이 논문집이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국사편찬위원회가 최근 일본에서 수집한 ‘금병동문고’에 이 ‘론문집 2집’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2008년말 일부가 정리되어 올해 처음 공개된 자료인데 하와이, 옌볜, 일본을 돌고 돌아 비로소 실물을 만져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와 같이 이 논문집에도 필자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이로써 논문집에서 필자 이름이 지워진 것이 누구 개인의 소행이 아닌 북한 당국에 의한 결정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렇다면 북한 당국은 왜 필자의 이름을 지운 채 논문을 발표한 것일까. 몇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 필자 이름을 인쇄했다가 지운 이유는 무엇일까.

2) 이름이 지워진 필자는 누구였을까?

3) 그 필자는 혹시 숙청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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