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세금도 내지 않고 출처도 묻지 않는 계(契)에 관한 모든 것

  • 장진영│변호사│

    입력2010-04-30 14: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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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서울 강남을 근거지로 삼아 2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굴리던 다복계가 깨져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계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근대 이전에는 농업사회에 맞추어 둑의 축조나 수리를 위한 제언계, 경조사 때 들어갈 목돈을 장만하기 위한 혼상계, 종중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종중계 등의 형태였지만 현대에는 값비싼 명품을 마련하기 위한 가방계, 반지계, 친목도모를 위한 형제계, 고액의 곗돈과 높은 금리를 준다는 귀족계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 옛날, 2000년 전 삼한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계가 펀드니 선물이니 하는 첨단 금융상품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그 위세가 약해지기는커녕 서민 금융수단을 넘어 부유층,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이어가는 현상은 아주 흥미롭다. 계의 사회적 현상에 대해 법률적인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왜 계가 인기를 끄는 것일까

    계가 기나긴 세월을 거쳐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며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로 전문가들은 네 가지를 든다.

    첫째, 사회적 인적 교류를 넓히기에 좋은 수단이다. 계는 강력한 상호신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진입장벽이 높고 소위 ‘물 관리’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일단 내부 구성원이 되기만 하면 인적 네트워크 형성과 정보 습득에 유리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둘째, 목돈을 만들기 좋은 수단이다. 일단 계가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원들은 강제성을 띤 곗돈 불입 의무에 커다란 부담을 갖게 된다. 강제성이 없는 일반 금융상품에 비해 지출을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셋째, 이용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리고 먼저 곗돈을 타는 사람이 이자를 많이 내야 하기는 하지만 금융기관과는 달리 담보 없이도 돈을 빌릴 수 있어서 좋고 나중에 곗돈을 타는 사람은 금융기관보다 훨씬 높은 이자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세금을 내지 않고 출처도 묻지 않는 이점이 있다. 은행에서 이자를 받으면 20%가 넘는 이자소득세를 내야 하지만 곗돈 이자는 은행보다 높으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또 금융당국의 추적을 피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가 검은돈을 세탁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계에는 어떤 종류가 있나

    계원의 구성이나 계의 목적에 따른 분류도 가능하지만 가장 중요한 곗돈을 타는 방식에 의한 분류로는 번호계와 낙찰계가 대표적이다.

    번호계는 미리 순번에 따른 이자를 정해놓고 계원끼리 순번을 정해 곗돈을 받는 방식이다. 급전이 필요한 계원은 앞 순번을 받고 높은 이자소득을 원하는 계원은 뒤 순번을 신청하게 된다. 순번을 미리 정하는 것이 아니라 곗돈을 탈 때마다 뽑기로 정하는 형태의 계는 뽑기계라고 한다.

    낙찰계는 가장 낮은 곗돈을 받겠다고 써 내거나 가장 높은 이자를 주겠다고 써낸 계원부터 먼저 곗돈을 타는 방식이다. 입찰방식으로 곗돈 타는 순서를 정하기 때문에 입찰계라고도 한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은 번호계보다는 낙찰계에서 더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반면 급전을 받아간 사람이 곗돈을 못 부을 가능성도 그만큼 높기 때문에 계가 깨질 위험도 낙찰계가 더 크다. 그래서 계가 형사문제로 비화하는 경우 대부분 낙찰계인데 최근 문제가 되었던 다복회도 낙찰계였다.

    계가 깨졌을 때 이미 낸 곗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번호계의 법적 성질은 계원 상호간의 금융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조합계약에 해당한다는 것이 법원의 판례다. 그런데 조합의 재산은 조합원인 계원들의 합유에 속하고 조합이 해산하는 경우, 즉 번호계가 깨진 경우에는 민법의 규정에 따라서 청산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이지 계주에게 이미 낸 계 불입금을 돌려달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먼저 곗돈을 타가고 계 불입금이 남아 있는 계원과 아직 곗돈을 타지 않은 계원 간의 정산을 통해 먼저 곗돈을 타간 계원이 다른 계원들에게 돈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청산하게 된다.

    낙찰계의 법적 성질에 대해 우리 법원은 계주가 자기의 개인사업으로 계를 조직 운영하는 것으로 본다. 계주가 계원들로부터 받은 계금을 운용해 생긴 수익금을 계원들에게 배분하는 형태이므로 마치 금융기관과의 거래관계처럼 오직 계주와 각 계원 사이에만 개별적으로 계산관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계가 깨진 경우 이미 곗돈을 받아간 다른 계원들에게 청산을 요구할 수는 없고 계주에게만 계 불입금 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강남 귀족계가 깨진 후 계원이 계주를 상대로 제기한 계 불입금 반환청구 소송에서 계주는 그 계원에게 4억9000만원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결한 것도 귀족계가 낙찰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간계주나 공동계주의 경우

    낙찰계의 경우 계주 이외에 중간계주나 공동계주를 통해 계에 가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계가 깨진 경우 그 계원은 계주와 중간계주 중 누구로부터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중간계주를 통해 계에 가입했다가 계가 깨진 경우 그 계원은 중간계주로부터 계금을 돌려받을 수는 있지만 계주와는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기 때문에 계주로부터 돈을 돌려받을 수는 없다. 그런데 만일 중간계주는 자력이 없고 계주에게만 자력이 있는 경우라면 계원은 우선 중간계주에게 계 불입금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후 중간계주가 계주에 대해 가지는 계 불입금 반환청구권을 압류하는 방법으로 계금을 회수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계에 A와 B 공동계주가 있고 A를 통해 계를 가입한 계원이 계가 깨진 후 B에게도 계 불입금 반환을 청구할 수 있을까.

    A와 B가 공동으로 계를 관리한 경우에는 두 사람에게 모두 반환청구를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A와 B가 각자 자신의 계원들을 관리하고 계금과 계 불입금을 따로 관리했다면 다른 공동계주에게 계 불입금 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법원의 입장이다.

    계에 가입할 때 주의할 점

    가입하려고 하는 계가 번호계인지 낙찰계인지에 따라 판단해야 할 점이 달라진다.

    번호계의 경우에는 계주와 계원들이 모두 동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번호계를 함께 할 사람을 고를 때 동업자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고 고른다면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낙찰계의 경우에는 계원이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므로 계주를 판단하는 기준이 중요하다. 낙찰계는 계주가 마치 금융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돈을 맡겨둘 금융기관을 고르는 기준으로 계주를 선택하면 큰 실수는 없겠다.

    최근 계금이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에 달하는 계가 등장하면서 계주들이 자금시장의 큰손이 되는 시대가 됐다. 이 정도면 계가 사모펀드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셈인데 펀드매니저를 고르듯이 계주를 선정할 필요도 있겠다. 이렇게 되면 미국 월스트리트 출신의 엘리트 계주가 나타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깨진 계의 계주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되나

    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유사수신행위와 비슷하다. 유사수신행위란 법률이 정한 금융기관이 아니면서 고수익을 미끼로 불특정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투자명목의 자금을 끌어 모으는 것을 말한다. 유사수신행위는 형사처벌대상이다. 그러나 계주가 유사수신행위로 처벌된 예는 찾기 힘들다. 사법기관이 계주에게 유사수신행위죄를 적용하지 않는 것은 계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고 사람들이 목돈을 만들기 위해 만든 조합과 유사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가 깨진 경우에는 계주가 처벌받을 수도 있다.

    번호계의 경우는 먼저 곗돈을 타 간 계원이 계금을 불입하지 않아서 계가 깨지는 경우와 계주가 곗돈을 착복해서 깨지는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계주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계주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런데 번호계의 곗돈은 계원들의 합유재산에 속하기 때문에 계주가 곗돈을 착복하거나 유용한 경우에는 업무상 횡령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횡령금액이 5억원이 넘으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의해 가중처벌된다.

    낙찰계의 경우는 계원이 계금을 내지 않더라도 계가 깨지지는 않고, 계주가 투자에 실패해서 원금을 날리는 바람에 깨지는 경우와 계주가 사적인 용도로 곗돈을 사용하다 깨지는 경우가 있다. 계주가 원칙대로 투자했으나 실패로 끝나는 경우라면 형사처벌이 어려울 것이다. 낙찰계의 곗돈을 계주가 착복한 경우에는 횡령이 아니라 배임죄가 성립한다.

    왜냐하면 번호계의 곗돈 소유는 조합원들의 공동소유(합유)로 보지만 낙찰계의 곗돈은 계주에게 속한다고 보는데 자기 물건에 대한 횡령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횡령죄는 성립할 수 없고 배임죄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투자처에 대해 계원들을 기망했거나 계주가 계금을 지급할 여력도 없으면서 거짓말로 계원을 기망해 가입시킨 경우에는 사기죄로 처벌받게 된다. 2200억원을 굴리던 다복회의 계주는 곗돈으로 돌려막기를 하는 와중에도 멀쩡한 계인 것처럼 계원들을 속여 모집한 혐의로 사기죄로 처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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