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프로 ‘삶꾼’ 임성빈 명지대 교통공학과 명예교수

“교통공학? 나보다 잘하는 놈 많지 하지만 나보다 잘 사는 놈은 세상에 없어”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0-09-29 1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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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하게 사는 법? 나한테 물어라
    • 국악, 침술, 기공, 무예 … 세상의 모든 취미
    • 저녁 식사는 소주 한 병, 맥주 세 캔
    • 명상 수련 중에 선계(仙界)를 보다
    • 우주의 본질은 공존과 조화, 머지않아 세계의 차원이 바뀐다
    프로 ‘삶꾼’ 임성빈 명지대 교통공학과 명예교수
    ▼ 살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건 다 하신 거죠?

    “다는 아니고 많이 했어요. 아직도 할 게 남았지.”

    예순을 넘긴 노(老)학자의 눈이 장난꾸러기처럼 반짝인다. 임성빈(66) 명지대 명예교수다. 그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물리학과 철학, 정신과학과 잡기(雜技)를 넘나들었다. 무애(無碍)라는 호(號)답게 도무지 경계가 없어 따라잡기에 숨이 찼다.

    그를 소개하기 위해 간단하게 직함만 정리해보자. 일단 직업은 지난해 8월까지 명지대 교통공학과 교수였다. 정년퇴임한 지금은 같은 대학 명예교수다. 동시에 그는 한국정신과학학회장, 한국바둑학회장, 서울우슈(武術)협회장, 민중의술(醫術)살리기 서울·경기연합회장, 한국한의학연구소 자문위원, 홍익생명사랑회장 등을 현재 맡고 있거나 역임했다. 이름만 걸어놓은 ‘회장’이 아니라, 실력을 겸비한 진짜 리더다. 그는 태권도를 비공인 4단까지 수련했고, 우슈를 배워 무술경기지도자 2급 자격증을 받았으며, 기공을 익혔고, 침술 실력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를 구한 정도다. 단소 명인 김중섭에게 단소를, 원광대 임재심 교수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한때 명상에 심취해 단학선원 법사 자격증을 받았으며, 당구 300에 바둑 아마 5단, 마작, 훌라도 자칭 수준급이다. 등산광(狂)이기도 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엔 늘 산을 찾고, 주중에도 한두 번씩 산에 오른다. 전국의 서로 다른 산 100개를 등반할 때까지는 같은 산에 다시 오르지 말자는 뜻의 ‘100산회’를 만들어 목표를 이루기도 했다.

    “하고 싶은 건 다 한다”



    그렇다면 잡기에 빠져 본업은 등한시한 교수였는가. 그것도 아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을 지낸 그는 사단법인 한국교통문제연구원장, 국무총리실 정책평가 자문위원과 대통령비서실 사회간접자본투자기획단 자문위원 등을 맡은 저명학자다. 명지대 안에서는 공과대학장, 교통관광대학원장, 문화예술대학원장, 법인기획위원장 등을 지냈다. 요즘은 정신과학에 심취해 우주의 시작부터 인류의 미래까지 통찰하는 연구에 푹 빠져 있다. 프로필만으로도 원고지 서너 장이 훌쩍 넘어가는, 말 그대로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임 교수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아, 그는 2003년 12월, 이곳에 자신이 살 집을 직접 지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독특한 집이다.

    ▼ 설계나 시공을 배운 적이 있나요?

    “대학 때 토목공학을 전공해서 기본은 알죠. 책 좀 보고 연구 좀 해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만들었어요. 일단 1층엔 문이 하나도 없습니다. 식구끼리 사는데 문 닫아둘 필요 없잖아요. 콘센트는 110V용, 220V용 따로 만들고, 전기선은 바닥 아래로 다 묻었어요. 앞뜰에는 메밀꽃 심고, 그 옆에 조그맣게 테라스도 만들었습니다. 재산 가치로 보면 높지 않지만, 근사하지 않아요?”

    뭐든 하고 싶으면 하는 사람이다. 앞서 언급한 수많은 전문 분야도 그렇게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 관심사가 참 다양해 보입니다.

    “다양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가지예요. 뭘 해야 행복할까. 사춘기 때 다들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행복이 뭐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저는 그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지금도 계속하지요.”

    프로 ‘삶꾼’ 임성빈 명지대 교통공학과 명예교수
    그의 아버지는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임 교수가 보기에 어느 면에서나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는 ‘혁명정부’의 상역담당차관보로 발탁돼 수출 정책을 입안했다. 그러나 그가 민정이양 약속을 깨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자 자리를 던져버렸다. 이후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사경을 헤맸고, 손대는 사업은 번번이 망했다. 5남매의 장남이던 임 교수의 삶은 빈한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고 재학 시절, 그는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등하굣길을 걸어서 오가며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질까”를 고민했다.

    “그때는 좋은 학교 졸업하고 좋은 회사 들어가 출세하거나 돈 많이 버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그 관점으로 보면 내 미래가 너무 암울한 거예요. 나보다 훨씬 잘난 우리 아버지도 돈을 못 벌고 출세 못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나.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사나.”

    행복의 비밀

    그때 예술인의 삶이 뇌리를 스쳤다. 음악에 미친 사람, 연극에 미친 사람…. 돈도 못 벌고 사회적으로 대우받지도 못하면서 미친 듯 행복해 하는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잡기(雜技)에 빠져든 이유다. 처음 익힌 건 국악이었다. 음악 하는 행복이 뭔지 알고 싶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이라 국악원에 가서 악보를 하나하나 필사해가며 연주법을 익혔다. 예인(藝人)들의 삶에 매료돼 음반과 영화 비디오테이프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임 교수의 자택 1층 서재는 그의 관심 이력을 보여주는 ‘여러문제연구소’다. 직접 설계한 세 겹의 슬라이딩 책장에는 수천 장의 DVD와 CD가 빽빽이 꽂혀 있다. 한쪽 코너에는 그가 한 자 한 자 옮겨 적은 한문 단소 악보가 있고, 다른 책장 속에는 침술을 익히는 데 썼을 법한 인체 모형과 한의학 서적들이 모여 있다.

    “국악에 빠지면서 우리 것 전반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역학과 무속 같은 것들이죠. 마침 집 근처 건물 2층에 사주작명소가 있었는데 거기 계신 형님과 친해져 역학을 배웠습니다. 그 건물 1층은 한의원이라 거기도 자주 갔어요. 내기 장기나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며 한의학에 대해 주워들었지요.”

    한참 이곳저곳 관심을 키워갈 무렵 신문에서 기공 수련에 대한 광고를 봤다. 호기심에 발을 들였다. 동래 신선문(神仙門)의 내가기공(內家氣功)이었다. 동시에 침술도 배웠다. 지금은 홍익대 교수가 된 대학 후배가 ‘침술이 아주 신기하더라’며 권한 게 계기였다. 소악 이주송 선생의 팔상체질침을 배우며 자연스레 한의학의 기본 원리와 사상처방을 익혔다. 서울대 공대 대학원생 시절이다. 교통공학을 공부하고 대학 강의도 하는 겉보기엔 멀쩡한 공학도였으나, 남는 시간은 온통 음악과 의술과 비기(秘技)에 몰두했다.

    “어느 날 강의를 하려는데 학생 한 명이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는 겁니다. 예의가 없다고 야단쳤더니 발등에 혹이 나서 구두를 못 신는다는 거예요. 병원에 갔는데 수술해도 재발할 수 있다고 당분간 두고 보자고 했다더군요. 이걸 침으로 고쳐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굴 죽이려고 하느냐’며 펄쩍 뛰는 제자를 어르고 달래 침을 놓았다. 그런데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그만 학생은 눈을 뒤집으며 졸도해버렸다. 근육이 경직돼 침이 뽑히지도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학생이 큰 숨을 내쉬며 의식을 찾은 뒤에야 임 교수도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무모한 첫 실험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일주일 뒤 그 학생의 발에서 혹이 사라진 게 확인되면서, 이 ‘난리’는 끝이 아닌 시작이 됐다. 소문은 금세 퍼졌고 순식간에 침술의 달인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한번은 후배 부인이 입덧이 심해 음식 냄새도 못 맡을 정도로 고생한다고 해서 침을 놓아줬어요. 그런데 일주일 뒤 다시 한 번 놓아달라는 겁니다. 침을 맞은 뒤 식욕이 너무 돌아서 과식을 했다고, 이번엔 소화 잘되게 해주는 침을 부탁한다고 해요. 대충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주선(酒仙)의 경지

    프로 ‘삶꾼’ 임성빈 명지대 교통공학과 명예교수
    집에까지 환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지압 같은 수기요법(手技療法)을 익히자 실력은 더욱 향상됐다. 하지만 그는 속앓이를 해야 했다. 환자가 올 때마다 상황에 맞는 침술을 공부하느라 진이 빠졌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 고행이 된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빈사상태에 빠지는 일이 생겼다. 아는 침술을 총동원해 아내를 살린 뒤 그는 “내 침을 배워 아내를 살렸으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니냐. 더 이상 뭘 바라겠느냐” 선언하고 다시는 침을 놓지 않았다.

    과학과 비과학을 넘나들고, 예악과 비술에 통달한 그에게선 조선시대 도사의 풍모가 풍긴다. 남다른 주도(酒道)를 봐도 그렇다. 그는 지난 30년간 매일 저녁 한 끼는 밥 대신 술로 해결해왔다. 술을 매일 마신 건 어린 시절부터지만, 그전엔 일반인처럼 식사를 먼저 한 뒤 술을 들었다.

    “마흔이 되어가면서 갑자기 살이 많이 쪘어요. 체중 조절 때문에 밥과 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겁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술이었지요.”

    밥은 아침 한 끼만 먹고 점심은 굶었다. 저녁은 소주 한 병을 기본으로 삼았다. 안주는 볶은콩과 황태채 등 가벼운 것만 곁들이고, 취기가 덜 오르면 맥주 2~3캔을 보태 마셨다. 처음엔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런데 소주의 도수가 점점 낮아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맥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도리 없이 기본을 소주 두 병으로 올렸다.

    ▼ 그렇게 매일 함께 술을 드실 친구 분이 계신가요?

    “아. 지금 말씀드리는 건 집에서 저녁 먹을 때에 한정된 겁니다. 밖에서는 두주불사, 양껏 마시지요. 하지만 집에서는 정량이 있어야 하니까 원칙을 정해둔 거예요.”

    ▼ 예순이 넘은 지금도 그 식습관을 유지하시나요?

    “한 2년 전부터 주종을 막걸리로 바꿨다가 지금은 마시지 않아요. 언제부턴가 바둑을 두면 자꾸 지는 겁니다. 평생 자신 있던 게 안 되니 왜 이러나 싶더군요. 저녁도 안 먹으면서 매일 소주를 두 병씩 마셔서 그런가 싶어 그만뒀더니 확실히 훨씬 좋습디다.”

    ‘샹그릴라’를 보다

    처음엔 1700ml 들이 막걸리를 한 병씩 비웠는데, 그도 좀 많은 것 같아 다시 1200ml 들이로 바꿨다. 막걸리가 웰빙식품으로 알려져 선견지명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지금은 가내 음주는 자제하고 있지만 밖에서는 여전히 술을 즐긴다.

    “주선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이번엔 맨정신으로 선경(仙境)을 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소설 ‘단’이 화제를 모으던 무렵부터 명상 수련을 시작했다. ‘저건 뭘까. 하면 재미있을까’ 하는 예의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이다. 수련단체에 가입해 호흡과 명상을 익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운 체험이 찾아왔다. 밥을 먹지 않아도 기운이 넘치고, 추위를 타지 않게 됐다. 정원의 꽃 냄새가 생생하게 살아나고, 세상은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주변 모든 것이 한없이 아름다워, 신비의 세계 ‘샹그릴라’가 바로 여기구나 싶었다.

    “가장 친한 친구한테도 말 못할 신비한 능력도 생겼어요. 이 정도만 얘기합시다. 숨을 들이쉬면 끝없이 숨이 들어가요. 내쉬면 또 끝없이 나옵니다. 아예 안 쉬어보면 어떨까, 물론 상관없지요. 내 몸이 이 세계를 벗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육신이 의미 없는 차원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요.”

    그가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들려준 체험들은 일종의 종교 체험 같았다. 각종 경전에 등장하는 ‘놀라운 능력’이 현실로 다가왔다. 처음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곧 불행해졌다. 그 행복한 세계에 혼자만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저 멀리, 아예 다른 차원에 있는 것만 같았다. 괴리감을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가 있는 세계로 끌어올릴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려갈 것인지 고민했지요. 그런데 그 많은 이를 모두 내 차원으로 불러올리는 건 불가능했어요.”

    “아무리 샹그릴라라고 해도 나 혼자 있으면 무슨 소용이냐” 깨달음을 얻은 그는 수련을 중단했다. 대신 주위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에게 다른 세계를 안내하는 가이드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도 건강관리를 위해 종종 호흡과 명상을 하기는 하지만, 결코 수행의 단계에 들지는 않는다. 대신 자신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정리해나갔다. 천지창조, 진화, 빅뱅, 외계인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사실 임 교수는 젊은 시절 심령학자 안동민씨의 책에 매료돼 그 분야에 관심을 두고 공부한 적이 있다. 12권으로 구성된 ‘미래의 유산’ 시리즈와 데니켄(Daniken)의 ‘신들의 수수께끼’ 등을 읽고 그때껏 상상도 못한 비밀이 숨어 있는 인류의 고대사에 관심을 뒀다. 미국 신과학(New age science) 운동의 선구자인 버클리대 프리초프 카프라 교수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에 감화 받아 동양고전과 현대물리학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다. 샹그릴라 체험은 그의 이런 관심에 불을 붙였다.

    “폴 고갱이 1897년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을 아시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건 인류의 오랜 숙제입니다. 과학이 그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고 싶은 일에 빠지고, 한번 시작하면 경지에 오르는 그의 장기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우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그는 답한다.

    “현대과학은 지금 우리가 속한 우주의 나이가 대략 137억년이며 이것은 거대한 폭발(빅뱅)로부터 비롯됐다고 말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물론 시간과 공간까지 이로부터 비롯됐지요. 우주는 지금도 팽창을 계속하고 있어요. 그러면 팽창하는 우주 밖의 공간은 무엇이며 대폭발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나. 공간은 대폭발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므로, 그외엔 공간이라는 것이 없지요. 당연히 밖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시간도 대폭발 때 생긴 것이니 그전에는 시간이 없어요. 당연히 전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지요. 빅뱅에서 모든 것이, 현재 과학의 답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빅뱅 이후 지구에 원시적인 포유류가 등장한 것은 약 2억년 전이고 상당히 진화한 포유류가 나타난 것은 약 5000만년 전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류의 먼 조상으로 볼 수 있는 소위 유원인이 등장한 것은 대략 700만년 전이지요. 이들이 진화를 거듭해 지금으로부터 약 25만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불과 석기, 골기 등을 사용하는 등 동물이나 다른 영장류와 구별되는 인류로서의 특성을 갖췄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이용하고 적응하는 능력이 있을 뿐 이들이 현대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라는 게 밝혀졌어요. 현대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은 진화론이나 인류학에서 큰 불가사의입니다. 지구상에 상당기간 번성했던 네안데르탈인이 어떤 이유인지 3만년 전 거의 동시에 모두 사라진 뒤 나타났는데, 수백만년간 이뤄진 그 어떤 진화보다 훨씬 더 큰 진화를 이룬 모습이었으니까요. 인류학에서는 이 지점을 ‘잃어버린 연결 고리’라고 부릅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여러 학설이 나왔는데 개인적으로는 외계인 개입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느껴져요.”

    프로 ‘삶꾼’ 임성빈 명지대 교통공학과 명예교수

    임 교수가 직접 필사한 단소 악보와 운동에 몰두하던 시절 따낸 우슈 경기지도자 자격증.

    현대 과학을 넘어

    여기서 잠깐 설명을 끊어야겠다. 인류의 조상이 ‘외계인’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그는 국내 유명 사립대의 공과대 학장을 지낸 정통 과학자다.

    ▼ ‘인간을 만든 존재는 곧 외계인이다’라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인류가 다른 행성에서 건너온 외계인으로부터 진화해왔다는 말씀입니다. 스위스 출신 고고학자 에레히 폰 데니켄의 주장인데요. 데니켄은 창세기를 비롯한 여러 민족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모두 외계인이며 현 인류는 지구상의 원시 인류를 생물학적으로 개조하거나 외계인과의 혼혈에 의해 탄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집단의 외계인이 아니라 각기 다른 여러 집단의 외계인이 찾아옴으로써 여러 민족이 생겼고 그들이 전수한 문명이 인류의 고대 문명이라는 거죠. 저는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볼 때 이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봐요.”

    ▼ 그렇다면 그 외계인은 어디서 온 겁니까.

    “태양계가 속한 은하 우주에만 태양 같은 행성이 약 1000억개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중 상당수가 행성을 거느리고 있고, 그런 은하집단이 현재까지 관찰된 것만 2000억개 정도가 돼요. 지구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행성은 수없이 많다는 얘기지요. 한 가지 더 생각할 건 우주의 나이가 약 137억년이라는 겁니다. 그에 비해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에 불과해요. 지구보다 수억년 또는 수십억년 먼저 생긴 행성도 상당수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도 빅뱅으로 창조된 생명체가 진화했을 거예요. 지구에서 원시인류가 네안데르탈인까지 진화하는 데 약 700만년이 걸렸습니다. 그로부터 현재 인류까지 자연 진화하는 데는 수천만년, 수억년 또는 수 십 억년이 소요될 수 있어요. 우주에는 그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진 행성이 얼마든지 있지요. 그곳의 생명체가 지구로 건너왔다면 어떻습니까.”

    임 교수는 1990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그대, 반짝이는 별을 보거든’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스위스의 한 농부가 약 50년에 걸쳐 문명이 매우 앞선 플레이아데스라는 별에서 온 외계인과 접촉한 경험을 쓴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류의 기원과 우주의 역사에 관한 내용은 임 교수가 소개한 가설과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그걸 믿을지 말지는 어차피 개인의 선택이다. 다만 그는 이런 책들을 통해 샹그릴라 체험의 답을 찾아나갔을 뿐이다. 그가 던진 세 질문 중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천재 물리학자 스티브 호킹은 우주가 11차원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인류가 있는 곳은 그중에서 본능적 정신체의 인간들이 지배하는, 인간계 중에서도 제일 바닥인 4차원 세계지요. 이제 우리는 지적 정신체의 인간이 지배하는 5차원 세상으로 진화해야 해요. 그곳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조화와 공존의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입니다. 폭력과 전쟁이 없고, 더불어 사는 사회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정통 물리학 이론과 철학, ‘비과학’으로 치부되는 주장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중국 기공사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기술이 알약 병을 열지 않고 약을 뺐다가 다시 넣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이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눈속임이 아닌 현실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저건 과학이 아니다’라고 외면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설명하는 방법을 찾는 게 맞을까요.”

    “사는 데 프로다”

    임 교수는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땅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자신이 믿는 게 과학이고 진실이라 여겼지만, 이제는 과학의 기본이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가 지금 믿는 과학이 아니면 전부 비과학이라고 생각하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널리 활용하고 있는 전자기파를 봅시다. 초장파(VLF)부터 장파(LF) 중파(MF) 단파(HF) 초단파(VHF) 극초단파(UHF) 센티파(SHF) 밀리파(EHF)에 이르기까지 무선용 전파만 해도 다양합니다.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에 의료용으로 쓰이는 X선까지 엄청나게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지요. 하지만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이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한 가시광선의 세계 속에서만 살아왔어요. 지금 우리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11차원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일부에 불과한 4차원이 전부인 줄 안 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인간과 우주의 신비를 파고드는 건 그의 현재 관심사다. 지금껏 수많은 취미에 몰두해왔듯 그는 이 연구 속에서 또 다른 ‘행복’을 찾고 있다. 그런 그를 지인들은 ‘괴짜’ 또는 ‘기인’이라고 부른다. 임 교수는 “앞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지만 뒤에서는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라면서 “어떤 이들은 진짜 전공이 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고 했다.

    ▼ 진짜 자신의 전공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는 거지요. 재밌게 사는 거, 행복하게 사는 거. 교통공학이요? 나보다 잘하는 놈 세상에 많을 겁니다. 우슈나 바둑, 침술은? 더 많겠죠. 하지만 나보다 즐겁게 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나는 사는 것에서만큼은 프로페셔널이라고 자부해요.”

    임 교수는 ‘꾼’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프로페셔널’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그는 “소리꾼, 노름꾼이라는 말이 있지 않으냐”며 “나는 무슨 일을 하든 ‘꾼’의 자세로 덤벼든다”고 말했다. 대충 하다 말 일이라면 아예 시작을 않고 일단 손을 대면 끝을 본다. 그가 스스로 붙인 자신의 별명은 ‘삶꾼’, 삶을 ‘꾼’의 자세로 살아가기 때문이란다. 그의 정년퇴임을 축하하며 후배들이 기념문집을 만들어준다고 했을 때 표지 글씨를 ‘停年 기념’에서 ‘定年 기념’으로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이 정(定)해져서 학교를 떠날 뿐, 멈추지는(停) 않겠다는 의미다.

    “사계절을 보세요. 봄에는 꽃이 아름답고 가을이면 단풍이 눈부십니다. 계절마다 제각각 매력이 다른데 왜 다 좋아하면 안 됩니까. 관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게 취미야, 이게 내 전공이야, 한정시켜버리면 또 다른 즐거움을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겁니다. 나는 돈이나 출세에 대한 욕심을 버리니 하고 싶은 일에 쓸 시간이 많아요. 앞으로도 계속 재밌는 일 행복하게 몰두하며 살아갈 겁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저녁을 먹고 가라고 권했다. 그에게 저녁은 술이다. 오늘은 막걸리를 좀 마시겠다며 활짝 웃는 얼굴이 아직 청년 같다. 좋은 게 많아서 행복한 괴짜, 임성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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