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 표지.
그녀들은 ‘전설적인 부도덕성’과 ‘전설적인 매혹’을 동시에 지닌 여성이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미술과 음악,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 소환되며 ‘죽음조차 불사하는 유혹’의 대가를 잔인하게 보여준다. 그녀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매혹 또한 동시에 커진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도덕적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치명적 무기다. 특히 ‘롤리타’와 ‘살로메’는 출간 당시에는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금서’로까지 내몰렸지만, 이제는 당당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 팜파탈의 모범답안(?)을 보여준다.
남성의 타락, 남성의 판단 착오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행위의 기원에는 살로메의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살로메의 딸 이름을 ‘매독(syphilis)’이라 명명한 것에서 볼 수 있듯 ‘감당할 수 없는 여성성’에 원죄를 뒤집어씌우는 행위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일상을 파괴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에서 비롯된다. 저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경계’의 대상이지만, 금기에 갇힐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그녀들의 매혹은 예술가들의 영원한 뮤즈다.
실제로 살로메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서 매우 짧게 언급된다. 게다가 국왕 헤롯이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도록 만든 그 전설적인 ‘춤’ 자체에 대한 묘사는 한 줄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화가와 음악가, 소설가와 영화감독들은 존재하지 않는 살로메의 춤을, 성경의 여백을 자신들의 창조적 상상력으로 메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살로메의 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현실의 묘사가 아니라 환상의 창조일 수밖에 없었다. 살로메의 아름다움은 보이는 자가 아니라 바라보는 자의 시선에서 만들어지는 사후적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이 텅 빈 매혹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살로메는 단 한 구절의 말(“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과 알 수 없는 춤의 주인공일 뿐인데, 그녀를 다룬 문학작품과 회화와 음악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으며, 그녀는 한 시대를 뒤흔든 세기의 재판(1895년 오스카 와일드가 이 작품으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는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클림트의 ‘유디트’. 클림트는 이 작품을 통해 수많은 살로메의 치명적 매혹의 원형을 화폭에 담는 데 성공했다.
후대의 남성들은 그녀의 불가해한 매력, 복원 불가능한 춤을 향해 그들이 상상하는 모든 매혹의 환상을 투사한다. 이 신화는 성경의 너무 많은 여백과 침묵 속에서 궁금증을 더욱 유발시켰다. 그 춤에 대한 어떤 묘사도 없지만 그 텅 빈 여백 속으로 작가들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매혹의 몸짓을 그려 넣었다. 살로메는 단지 성경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이 아니다. 살로메는 팜파탈의 원형이자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클림트의 ‘유디트’는 이 수많은 살로메‘들’의 치명적 매혹의 원형을 그 작은 화폭에 담아 넣는 데 성공했다.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직전, 그 느낌의 근원을 탐색하려는 눈빛이다. 입술은 살짝 벌려져 있어 긴장이 풀려 있음을 보여준다. 풀어헤쳐진 앞가슴은 살색이 아니라 푸른빛이다. 뭉개듯이 은은하게 비추어내는 푸른빛은 죽음의 기운이다. 그래서 유디트의 육체는 시체로 보인다. 시체치고는 너무 매혹적이다(아니면 시체이기에 더 매혹적인지도 모른다). 왼쪽 팔로는 그녀가 베어버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죽어 있다.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와 섹스를 하다가 목을 베었다. 그런데 목을 벤 후에도 정염의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을 베는 순간 비로소 오르가슴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다.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