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 지지자가 장난감 소총을 든 아이를 목말 태운 채 리비아 국기를 흔들고 있다. 카다피 지지세력은 서방의 공습을 십자군의 폭격이라고 표현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언뜻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인 것처럼 보인다. 개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는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슬람권의 오사마 빈 라덴도 이 낱말을 입에 올렸다. 요즈음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리비아에서도 무아마르 카다피가 서방 세계의 간섭을 십자군에 비유하며 이슬람 정서를 자극했다.
기독교 세계의 팽창
이러한 예에서 보듯 십자군이란 말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십자군에 대한 좁은 시각이 한몫을 했다. 십자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초점이 전쟁으로서의 십자군에 맞추어져서, 개별 전투의 전개 양상 및 전략과 전술, 그리고 광신에 따른 잔혹 행위에 관심이 집중되곤 한다. 또한 십자군의 본류에서 벗어나 성당기사단이나 성배(聖杯) 이야기 등에 관심이 쏠리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십자군은 여러 가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시작돼 200년 동안 지속된 기독교의 성지 회복을 위한 전쟁을 지칭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팽창 정책 전체를 일컫는다. 10세기부터 에스파냐에서 기독교 세력이 벌인 재정복운동(reconquista)이나 프로이센에서 독일인이 벌인 식민 활동을 십자군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8세기 초 이슬람은 오늘날 스페인에 있던 서고트 왕국을 정복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는 한동안 이슬람의 지배 아래에 놓였고, 이 지역을 기독교화하려는 샤를마뉴 대제의 시도조차 이슬람에 의해 좌절됐다. 그러나 10세기부터 이 지역의 기독교도들이 반격에 나서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갔고, 마침내 1492년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재정복운동 역시 기독교와 이슬람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십자군으로 간주된다. 심지어 12~13세기 남부 프랑스에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의 이단 카타르(Cathares)파에 대해 교황과 프랑스 국왕이 탄압한 것 역시 십자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카타르파는 육신을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정신만이 깨끗하다고 여겼으며, 육신을 깨끗하게 정화(cathare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이분법적인 생각은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됐다. 이들은 기존의 정통 교회를 악의 교회로 규정했다. 교황의 탄압 대상으로 지목될 조건을 카타르파가 두루 갖췄던 셈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이던 필리프 2세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남부 프랑스로 확대하기를 원했다. 남부 프랑스는 귀족마저 카타르파를 믿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같은 기독교도인 카타르파에 대한 십자군은 교황과 프랑스 국왕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더욱이 이 십자군의 진압 방식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이라크 전쟁을 두고도 십자군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십자군의 원인은 1차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Alexios Comnenos)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한 데에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 패배해 아시아에 있던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곤경에 처한 비잔티움 황제는 1094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에게 투르크 족을 공격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