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19일 연합군의 공습 직후 리비아 국영TV는 “십자군 적(crusader enemy) 전투기들이 트리폴리의 민간 시설을 폭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십자군이라는 낱말을 끄집어내 서방 기독교 국가에 대한 반감을 자극한 것이다.
- 도대체 십자군이 뭐기에 이슬람-기독교 세계에서 지금껏 회자되는 것일까.
- 11세기 말부터 200년간 문명의 교차로에서 지속된 십자군이 인류에게 남긴 것.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 지지자가 장난감 소총을 든 아이를 목말 태운 채 리비아 국기를 흔들고 있다. 카다피 지지세력은 서방의 공습을 십자군의 폭격이라고 표현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언뜻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인 것처럼 보인다. 개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는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슬람권의 오사마 빈 라덴도 이 낱말을 입에 올렸다. 요즈음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리비아에서도 무아마르 카다피가 서방 세계의 간섭을 십자군에 비유하며 이슬람 정서를 자극했다.
기독교 세계의 팽창
이러한 예에서 보듯 십자군이란 말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십자군에 대한 좁은 시각이 한몫을 했다. 십자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초점이 전쟁으로서의 십자군에 맞추어져서, 개별 전투의 전개 양상 및 전략과 전술, 그리고 광신에 따른 잔혹 행위에 관심이 집중되곤 한다. 또한 십자군의 본류에서 벗어나 성당기사단이나 성배(聖杯) 이야기 등에 관심이 쏠리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십자군은 여러 가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시작돼 200년 동안 지속된 기독교의 성지 회복을 위한 전쟁을 지칭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팽창 정책 전체를 일컫는다. 10세기부터 에스파냐에서 기독교 세력이 벌인 재정복운동(reconquista)이나 프로이센에서 독일인이 벌인 식민 활동을 십자군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8세기 초 이슬람은 오늘날 스페인에 있던 서고트 왕국을 정복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는 한동안 이슬람의 지배 아래에 놓였고, 이 지역을 기독교화하려는 샤를마뉴 대제의 시도조차 이슬람에 의해 좌절됐다. 그러나 10세기부터 이 지역의 기독교도들이 반격에 나서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갔고, 마침내 1492년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재정복운동 역시 기독교와 이슬람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십자군으로 간주된다. 심지어 12~13세기 남부 프랑스에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의 이단 카타르(Cathares)파에 대해 교황과 프랑스 국왕이 탄압한 것 역시 십자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카타르파는 육신을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정신만이 깨끗하다고 여겼으며, 육신을 깨끗하게 정화(cathare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이분법적인 생각은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됐다. 이들은 기존의 정통 교회를 악의 교회로 규정했다. 교황의 탄압 대상으로 지목될 조건을 카타르파가 두루 갖췄던 셈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이던 필리프 2세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남부 프랑스로 확대하기를 원했다. 남부 프랑스는 귀족마저 카타르파를 믿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같은 기독교도인 카타르파에 대한 십자군은 교황과 프랑스 국왕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더욱이 이 십자군의 진압 방식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이라크 전쟁을 두고도 십자군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십자군의 원인은 1차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Alexios Comnenos)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한 데에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 패배해 아시아에 있던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곤경에 처한 비잔티움 황제는 1094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에게 투르크 족을 공격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
십자군의 원인
사실 이러한 요청은 이례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면 오래전부터 로마 교황과 비잔티움 황제가 소원했기 때문이다. 과거 로마의 황제는 제사장이기도 했으므로 황제는 행정조직의 우두머리임과 동시에 종교조직의 우두머리였다. 종교조직만을 놓고 본다면 황제 바로 아래 5명의 총대주교(總大主敎·Patriarch)가 있었으며, 후일 교황이라고 불리는 로마 총대주교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체계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도 한동안 지속됐는데, 로마 총대주교는 다른 총대주교들과 마찬가지로 비잔티움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 따라서 서로마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 교회(비잔티움 교회)는 원래 단일한 교회 조직에 속했으며, 모두 비잔티움 황제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런데 726년 성상(聖像)파괴령을 기점으로 두 교회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비잔티움 황제 레온 3세(Leon III)는 모든 성상을 우상(偶像)으로 간주해 금지했으나, 게르만족에게 지속적으로 포교해야 하는 로마 교황은 성상 유지를 주장했다.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티움 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고, 1054년 로마 교황의 특사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파문함으로써 두 교회는 완전히 결별했다. 오늘날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동유럽의 정교회는 이때부터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별개의 조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분열돼 있었으나 로마 교황도 비잔티움 황제도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화해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가운데 비잔티움 황제가 원조를 요청한 것인데, 황제가 예상했던 원조는 대규모 십자군 파병이 아니라 제국 군대를 보조할 소규모의 용병 기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생각은 달랐다.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원조보다는 성지 회복에 방점을 찍었다.
성지 순례는 참회의 수단이었다. 중세에는 예전에 성인들이 머문 곳을 방문하면 그 영향력의 일부가 순례자의 것이 된다거나, 성유골(聖遺骨)을 찾아가면 질병 치유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중죄를 저지른 자에게 교회가 순례를 명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순례가 널리 퍼져 있던 중세 시대의 3대 순례지는 에스파냐 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로마 그리고 예루살렘이었다. 순례지 중 하나인 예루살렘의 회복이야말로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의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교황이 원한다고 해서 기사들이 순순히 십자군에 나설 리는 만무하다. 기사들은 기사들 나름대로 참전 이유가 있었다. 서유럽은 게르만족의 침입, 서로마 제국의 멸망, 그리고 바이킹의 침입 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가 10세기경부터 안정되기 시작했다. 봉건제가 성립돼 기사들 사이에서는 위계질서가 생겼으나 이들의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회로서는 이들이 호전성을 분출할 출구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슬람을 정복함으로써 자신들의 토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 기사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성지 회복과 성지 순례라는 명분까지 더해졌으므로 십자군이야말로 기사들에게 매력적인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앞서 언급했듯 십자군은 서유럽 사회의 팽창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유럽이 안정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새로운 토지 개간이 이뤄졌지만, 토지는 여전히 부족했고, 장자상속제가 시행돼 둘째 아들부터는 영지를 상속받을 기회가 없었다. 즉 인구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서유럽 밖으로의 인구 배출을 유도했다. 따라서 십자군의 발생 원인을 성지 탈환이나 호전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럽의 팽창이라는 시각으로 십자군을 들여다봐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군의 경과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거의 200년 동안 지속됐는데, 대규모 군사원정이 여덟 차례 시도됐고 소규모 원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14세기에도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망은 이어졌다. 제1차 십자군은 1096년 시작됐는데,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4개의 십자군 영지(領地)를 건설했다. 기사들은 성당기사단, 병원기사단 같은 조직을 구축해 예루살렘을 지키고 순례자를 보호했다. 이들 기사단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함락된 뒤 유럽으로 돌아와서도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이들이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다고 하는 성배를 가져왔다거나, 예수의 장례를 지낼 때 몸을 감쌌다고 전해지는 성의(聖衣)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유럽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후 4개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이던 에데사 백작령이 이슬람 수중에 들어가자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됐다. 그리고 1187년 이슬람의 지배자 살라딘(Saladin)이 하틴(Hattin)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과 그 일대를 정복하자 제3차 십자군이 구축됐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성지 회복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제3차 십자군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가 힘을 모았으나, 두 군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항구도시 아크레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이즈음 십자군은 점차 변질돼가고 있었다.
제4차 십자군은 가장 추악한 십자군으로 기록돼 있다. 일찍이 베네치아 상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무역과 관련해 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특권을 경쟁 도시인 제노아와 피사에도 부여하자 베네치아 상인들은 십자군에게 성지로 가는 선박을 제공해줄 테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달라고 요구했다. 1204년 십자군은 기독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약탈한 뒤, 그 일대에 라틴 제국을 세웠다. 성지에는 가지도 않았으며 이슬람과의 전투도 물론 없었다. 이후에도 네 차례 더 십자군이 결성됐으나 모두 실패했다.
십자군의 결과
십자군은 원래 목표한 바를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 애초 교황은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서유럽을 단일한 기독교 세계로 만들고자 십자군을 제창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한 반면, 국왕들의 권위는 신장됐다. 국왕들은 십자군에 참가해서 전사한 봉건귀족의 영지를 몰수했고, 자신이 직접 참가한 십자군의 기사 군대를 지휘했다. 물론 십자군이 왕권 강화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군이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권력관계의 변화는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대립에서 교회권력이 점차 쇠퇴하고, 단일한 기독교 세계라는 개념이 퇴조하는 대신 근대국가가 등장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국왕이 권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민족적 적대감이 격화되기도 했다. 제2차 십자군 때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사이에 증오감이 커졌으며, 제3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결국 단일한 기독교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바람은 분열된 민족국가의 길로 들어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렇듯 겉으로 드러난 직접적 결과만이 십자군이 남긴 영향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도에게 십자군은 승리의 표시로 인식됐다. 돌이켜보면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됐을 때부터 십자가 표시는 승리의 상징이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의 패권을 놓고 다퉜는데, 하늘의 계시를 받아 방패에 기독교의 십자가 표시를 하고 전투에 임해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이듬해 기독교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결국 십자군은 콘스탄티누스의 방패에 새겨진 승리의 표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했던 셈이다. 오늘날 권력가들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걸핏하면 십자군 운운하지 않는가.
주목해야 할 점은 십자군이 기독교인에게 승리의 표시로 기억되는 만큼이나, 이슬람 지역에서 십자군은 신성모독이나 유럽인 침략행위의 표시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침략을 단호하게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십자군에게까지 관용을 베푼 살라딘을 이슬람 세계가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인해 이집트가 영국, 프랑스와 벌인 전쟁은 1191년 영국 국왕과 프랑스 국왕이 모두 참여한 제3차 십자군에 비유됐고,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제3차 십자군을 물리친 살라딘에 비유됐다. 그리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역시 서방 세계에 대항해 싸우는 자신을 살라딘에 빗댔다.
지중해 세계의 부활
십자군은 일견 충돌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충돌이란 교류의 한 측면이다. 충돌과 교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십자군은 원래 목표에는 없던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고, 그 열매들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중해 세계는 십자군을 거치면서 문명 교류의 장으로 부활했다.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할 때, 모든 교류는 지중해를 통해 이뤄졌다. 물자와 인력, 그리고 문화가 지중해를 통해 로마로 흘러들어왔고, 로마에서 혼합됐으며, 로마로부터 흘러나갔다.
사실 지중해 세계는 로마 제국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기원전 1000년경 페니키아인이 지중해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후 그리스인이 지중해에 진출해 여러 식민도시를 세웠다. 우리가 잘 아는 나폴리, 마르세유 등이 바로 그리스인이 세운 식민도시다. 그리스인의 뒤를 이어 로마가 지중해를 내해(內海, mare internum)로 만들었다.
르드 살라딘(1138~1193)은 이슬람의 영웅이다.
과거 서로마 제국에 속하던 영토에는 게르만족이 이주해 살기 시작했고, 이들 중 일부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8세기 말 게르만족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던 샤를마뉴는 게르만족의 왕국들을 대부분 정복했고, 로마 총대주교이던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이로써 오늘날 서유럽 지역에는 ‘게르만족-로마 가톨릭’ 문명이 형성됐고, 이 문명에서는 종교 지도자인 교황이 정치 지도자인 황제보다 우위에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축소된 채 유지되고 있었으나, 7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의 치세를 분기점으로 옛 로마 제국의 성격을 점차 잃고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으로 거듭났다. 이 제국을 수도의 이름 비잔티온을 따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거 로마의 황제가 제사장이기도 했으므로 비잔티움 황제 역시 정치 지도자이면서 종교 지도자였다. 따라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총대주교가 황제 아래에 있었다.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 문화-정교회(Orthod-oxy)’를 특징으로 하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변모한 것이다.
북부 아프리카와 오리엔트 지역 역시 과거에는 로마 제국에 속했으나, 이슬람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이슬람 세력은 8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 지중해 남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이슬람 문명’으로 뒤덮었다.
이로써 지중해 문명은 오늘날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샤를마뉴 제국,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문명으로 분열했다.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지중해를 서유럽, 동유럽, 이슬람이 나누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늦춰 잡아도 800년부터 십자군이 발생한 시기까지 지중해는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 셈이었다. 제1차, 제2차 십자군은 육지로 이동했는데, 이 같은 사실은 해로가 봉쇄돼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십자군은 서유럽에서 출발해 동유럽을 지나 그리스를 통과해 터키에 이르렀다. 터키에서부터는 육지와 해로를 모두 이용했다. 제3차 십자군에 이르러서는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의 십자군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독일을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십자군만이 육지로 이동했다. 악명 높은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제공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중해를 통한 해상운송이 회복된 것이다.
해상운송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든 데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생긴 기독교 영지들도 한몫을 했다. 앞서 서술했듯 제1차 십자군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4개의 영지가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데사 백작령이 이슬람 수중으로 넘어갔고, 뒤이은 십자군에서도 이 백작령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선 당연히 여러 가지 물건이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를 충족하고자 유럽으로부터 물자가 수송됐다. 물자 유통은 기독교도의 영지들이 이슬람 수중에 넘어간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이 같은 유통의 중심 역할을 떠맡았다. 이탈리아를 출발한 선박은 그리스를 거쳐 소아시아 반도와 키프러스 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각지로 물건이 실려나갔다.
그러나 유럽에서 전해지는 물건보다 유럽으로 보내는 물건이 값어치가 더 나갔다. 유럽은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와 면직물, 귀금속을 수입했다. 중동에서 출발한 배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도착했고, 일부 선박은 남부 프랑스와 스페인 동부로 항해했다. 중동의 산물은 강을 타고 서유럽 구석구석으로 전해졌다. 상업의 온기가 유럽의 말초신경까지 전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로마 제국 몰락 이후 단절됐다고 할 만큼 쇠퇴했던 지중해 무역은 십자군을 통해서 부활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업의 부활은 거의 농업만으로 자급자족하던 유럽의 여러 마을에 외부의 산물을 가져다주었고, 도시가 발달하는 디딤돌로 작용했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은 서유럽이 중국-인도-중동-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세계 경제에 연결됐음을 의미한다.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한 물건이 유입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 인도의 문화도 들어왔다. 예컨대 11세기 말 중국에서 사용하던 나침반이 12세기에는 유럽으로 유입됐다. 오늘날 베네치아에서 볼 수 있는 유리공예는 시리아에서 전래된 것이며, 사탕수수나 비단 같은 새로운 물품도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치품이 유럽으로 운송됐다. 유럽은 귀금속, 목재, 모피 등을 제외하면 반대급부로 제공할 것이 없었다. 동방으로 수출할 물품이 필요했던 유럽은 모직물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도시다. 이들은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에 물자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과도 물자를 거래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종교가 아니라 이탈리아와 중동 사이에 있는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베네치아 같은 도시에서 중동에 이르는 바닷길은 비잔티움 제국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통행허가를 받고, 관세를 납부해야 했다. 이러한 비잔티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베네치아는 십자군을 사주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도록 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에게는 종교보다 상업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후 지중해 상업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탈리아 상인들의 패권 장악은 십자군의 변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이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발생한 ‘교류’라면,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럽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 교류도 있었다. 그것은 이슬람 학문의 수입이었다. 물론 십자군 이전부터 이슬람의 학문은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 칼리프국(Caliphate of Cordoba)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이 아랍어로 번역됐고, 신플라톤학파의 저술 역시 비슷한 시기에 번역됐다. 그리고 12세기까지 이슬람의 여러 학자가 이 저작들을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이슬람의 학문적 업적이 십자군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건너갔다. 학문적 교류는 대부분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이웃해 함께 살던 지역에서 이뤄졌다. 12세기에는 에스파냐의 톨레도를 중심지로 삼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거의 모두 라틴어로 번역됐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거의 모든 지식 분야에서 학문적 진전이 이뤄졌다. 특히 아베로에스(Averroes)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아랍어 주석이 라틴어로 번역돼 중세 스콜라 철학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철학뿐 아니라 수학 분야에서도 기독교 세계로 학문이 전파됐다. 인도에서 유래한 아라비아 숫자와 영(零)이 유럽에 도입됐고, 오늘날 컴퓨터 용어로 자주 사용되는 알고리즘(algorithm)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수학자 알콰리즈미(al-Khwarizmi)의 대수학도 기독교 세계로 수입됐다. 과학 분야의 학문 수입도 적지 않았는데 연금술, 점성술이 대표적이다. 연금술이나 점성술은 그 자체로서는 일종의 거짓 과학이지만, 연금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화학 기구가 발전했으며, 점성술 역시 천문 관측기구의 제작과 천문도 작성의 디딤돌 구실을 했다.
요컨대 유럽인은 십자군을 통해서 이슬람의 학문세계를 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온전히 되살릴 수 있었으며,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천문학 등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십자군이 당초 의도한 목적을 이뤘다고는 할 수 없다. 성지 회복이라는 순수한 종교적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십자군이라고 하더라도 종종 광신이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 변질되곤 했다. 애초에 십자군을 제창했던 교황은 단일한 기독교 세계를 구축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제4차 십자군이 보여주듯이 십자군에 참여한 기사들은 토지와 재물에 관심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종종 벌어졌던 광신에 가까운 행동은 내부 결속을 다지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가령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나서 벌인 살육은 너무나도 심각해 솔로몬 신전 옆에 피의 도랑이 생겨 발목까지 잠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화는 이슬람이 단결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반대로 하틴(Hattin)의 전투에서 살라딘이 성당기사단을 학살한 사건은 십자군 쪽의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증오심은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서, 오늘날에도 십자군이라는 단어는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이용되곤 한다.
얻은 것과 잃은 것
십자군의 중대한 결과물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류일 것이다. 물론 두 문명의 교류가 십자군을 계기로 시작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교류는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군을 통해 문명의 교류가 대규모로 이뤄지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해 르네상스 시대까지 영광을 누렸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도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십자군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격렬한 ‘충돌’ 속에서도 의도하지 않은 ‘교류’가 발생하고, 이것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유럽이 이슬람 학문을 수입한 것 역시 충돌의 과정에서 이뤄진 교류의 결과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이 눈앞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학문의 수입은 유럽이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그 장점을 취해 자신들의 장기적 발전을 도모하도록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모두가 종교와 전쟁에 매몰돼 있을 때도 학문의 교류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으며, 이들이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충돌이 발생하고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평화롭게 교류하고 있으며, 심지어 충돌이 벌어지는 곳에서조차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십자군에서 보았듯이, 교류와 충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며, 교류와 충돌 모두 적개심을 품게 할 수도, 이해를 증진시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