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대낮에 서울 도심 초등학교에서 아동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면서 정부의 아동 성범죄 예방 대책이 도마에 올랐다.
- 지난해 이른바 ‘김수철 사건’ 이후 내놓은 갖가지 학교 안전 강화 대책이 현장에서는 전혀 실천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우리나라 초등학교의 범죄 대응 환경을 취재했다.
어린이 대상 성범죄를 막기 위해 학교 내 CCTV 설치 등 다양한 대책이 입안됐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빨간 점퍼를 입은 남자가 4층 복도까지 올라왔더래요. 6학년 여자애를 끌어안고 가슴을 만졌다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쓰레기차가 들어오느라 잠깐 뒷문을 열어둔 거라는데, 그럼 누군가 경비를 섰어야 하지 않나요?”
말마디마다 분노가 서려 있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 않았고 학교는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아이의 마음엔 두려움이 남은 듯 보였다.
지난해 6월 서울 영등포구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방과 후 수업을 기다리던 여자 어린이가 납치·성폭행당한 이른바 ‘김수철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는 재발 방지를 다짐하며 학교 안전 강화 대책을 연이어 발표했다. ‘365일, 24시간 학교 안전망 서비스’를 가동하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 학교는 과연 안전해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당시 정부가 발표한 대책 중 상당수는 구두선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는 ‘김수철 사건’ 이후 치안 위험 지역에 있는 학교 1000곳을 골라 경비실을 설치하고 출입자동보안장치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청원경찰을 배치해 범죄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현재 청원경찰이 배치돼 있는 학교는 전국적으로 한 곳도 없다. 관련 예산도 책정되지 않았다. 교과부가 학교에 시설비를 지급하는 대신 인건비는 시·도 교육청에서 부담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365일 24시간 안전망
시·도 교육청은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정책에 보조를 맞출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학교 안전 문제가 불거지자 떠들썩하게 발표부터 해놓고 책임은 우리한테 넘긴다. 청원경찰은 인건비가 만만치 않다. 관련 비용을 부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 대신 ‘배움터 지킴이’를 두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청원경찰과 ‘배움터 지킴이’의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전자는 경찰교육기관에서 2주간 실무교육을 받고, 임용 뒤에도 매월 4시간씩 직무교육을 받는 전문인력이다. 무기도 휴대할 수 있다. 반면 후자는 하루 3만원씩 봉사료를 받는 자원봉사자다. 서울시교육청의 ‘배움터 지킴이’ 운영지침에는 ‘배움터 지킴이의 신분은 계약에 의한 고용 관계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라고 명시돼 있다. 이 때문에 사고가 일어나도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정책 발표 당시의 구상에서 상당 부분 후퇴한 셈이다.
교과부가 역시 대책으로 내놓은 ‘안심알리미 서비스 확대’도 사실상 중단됐다. ‘안심알리미 서비스’는 초등학생의 등·하교 상황을 부모에게 문자로 알려주는 서비스. 학생이 단말기를 갖고 등교하면 교문 등 주요 지점에 설치된 센서가 이를 인식해 부모에게 문자를 보내준다. 하교 때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2009년 2억원을 들여 시범 사업을 시작한 뒤 2011년까지 이 서비스를 모든 초등학교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관련 예산은 삭감됐고, 상당수 학교는 매달 학부모가 5000원 안팎의 이용료를 부담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잦은 고장까지 일어나면서 이 ‘서비스’는 원성의 대상이 됐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김영희(36)씨는 “지난해 석 달쯤 가입했다가 해지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에러가 나는데, 그때마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어 가슴이 내려앉았다. 분명히 학교에 도착할 시간이 됐는데도 문자가 안 와서 교실까지 찾아간 적도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센서의 인식 범위가 너무 넓어서 아이가 교문 근처에만 가도 하교했다는 문자가 온다. 올 시간이 안 됐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해보면 아직 교내에 있더라”고 했다. 그는 “주위 엄마들이 ‘아이에게 휴대전화 사주고 수시로 통화하는 게 더 속 편하다’고 조언해 서비스를 해지했다”고 말했다. 이런 오류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문답 게시판 등에는 “알리미 서비스에 가입하지 말라”는 학부모들의 조언이 넘쳐난다.
아무도 안 보는 CCTV
교과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학교 내 CCTV 설치도 관리 감독 부족으로 범죄 예방에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사고가 일어난 용산구 초등학교의 경우, 괴한이 후문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이 CCTV에 찍혔는데도 모니터링 인력이 없어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결국 범인은 교사(校舍)에까지 진입했고, 사고가 일어났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교내 CCTV 모니터가 교무실에 설치돼 있는데 교사들이 각자 업무로 바빠 주의 깊게 보지 못한다. 전담 감시 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임해규 의원실이 지난해 10월 전국 5859개 초등학교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가운데 CCTV 화면 모니터링 전담요원을 둔 곳은 한 곳도 없다.
교과부는 지난해 아동 성폭력 예방 대책을 발표하면서 전국 모든 초등학교에 CCTV를 설치하고 24시간 모니터링 인력을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공언(空言)으로 그쳤다.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해 관내 공공 CCTV를 공동 감시하는 통합관제센터를 설치·운영한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이 역시 당장 실현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재 전국 공공기관의 CCTV는 방범, 주차 단속 등의 용도에 따라 담당 기관과 부서가 나눠져 제각각 관리되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아동 성폭력 대책 중 흐지부지된 것은 또 있다. 경찰이 지난해 6월 ‘아동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창설한 ‘성폭력 특별수사대’는 지난 2월 경찰조직개편 때 슬그머니 해체됐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를 조사하는 여성가족부의 원스톱지원센터와 가해자를 수사하는 특별수사대가 이원화되다 보니 피해자가 중복 조사를 받는 문제가 생겼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폐지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신 각 지방경찰청 생활안전과 내에 ‘아동·여성보호 1319팀’을 만들어 성범죄 예방활동에 주력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319팀의 단속·수사 인력이 ‘성폭력 특별수사대’보다 적고 팀장도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동 성폭력 대응 조직의 위상이 축소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09년 ‘조두순 사건’ 당시 피해자 ‘나영이’를 법률적으로 지원했던 법무법인 나우리의 이명숙 변호사는 “큰 사건이 터지면 일단 국민적인 분노를 피하기 위해 갖가지 대책을 내놓고 시간이 지나면 나 몰라라 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다”라고 했다.
“조두순 사건 때는 범행에 비해 형량이 지나치게 낮은 데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또 형을 감경해준 게 논란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아동 성폭력 범죄의 형량을 높이고 음주 감경을 막기 위한 법 개정안이 30여 건이나 국회에 제출됐어요. 하지만 이듬해 ‘김길태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태반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죠.”
처벌보다는 예방
여러차례 성폭력 전과가 있는 범인이 아무 제약 없이 돌아다니다 여중생을 납치해 성폭행한 뒤 잔인하게 살해한 ‘김길태 사건’이 벌어지자 이번에는 전자발찌 소급 적용과 화학적 거세, 가해자 신상공개 등을 위한 법 개정안과 대책이 쏟아져 나왔다. 이듬해 ‘김수철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의 성폭력 대책은 학교 안전 강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이런 일을 겪으며 우리 사회가 이전과 달라진 부분은 분명히 있다. 아동 성폭력이 심각한 범죄라는 데 대한 공감대가 생겼고, 그 결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엄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법원 자료에 따르면 1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양형은 꾸준히 강화되고 있다. 1심 처리 현황에 따르면 2007년 38.3%에 그쳤던 자유형(징역형) 비율은 2009년 45.5%로 높아졌고 2010년 상반기에는 50.0%까지 확대됐다. 반면 같은 기간 전체 연령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자의 자유형 비율은 32.0∼33.6%에 그쳤다. 지난해에는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1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강간상해·치상죄의 권고형량을 최고 무기징역까지로 높이고, 가해자가 술에 취했다 해도 사물 변별력이나 의사결정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가 아닐 경우 형을 감경받을 수 없도록 양형기준을 바꿨다. 전자발찌 부착 대상자를 소급하는 내용을 담은 ‘특정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법’ 이른바 ‘전자발찌법’과 어린이 상대 성범죄자에게 성충동 억제용 약물을 처방하도록 하는 ‘성범죄자 성충동 약물치료법’ 이른바 ‘화학적 거세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더 이상 “아동 대상 성범죄자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다”고 비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아동 대상 성범죄는 줄지 않고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03년 642건, 2004넌 721건이던 13세 미만 아동 성폭력 사건은 2007년에 이르러 1000건을 넘어선 뒤 줄곧 1000건 이상을 기록 하고 있다. 매일 3명꼴로 아이들이 끔찍한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는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강은영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아동성폭력 관련 범죄통계와 피해조사 결과를 고려하면 168건 중 1건 신고, 373.3건 중 1건 기소, 450.9건 중 1건만 유죄판결을 받고 있다. 아동 대상 성폭행범들은 아예 법의 영역 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처벌강화 정책만으로는 아동성폭력범죄 발생을 억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도 “소아기호증 등 정신질환이나 반사회적 인격장애 등 성격 이상자들, 충동성이 강한 아동성폭행범들은 처벌이 강화된다고 범행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형량강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피해자의 신뢰를 받는 형사사법제도를 구축해 신고율을 높이고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수사활동으로 체포율·구속률을 높이며 동시에 기소율과 유죄판결률을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린이에 대한 성범죄가 학교 안과 등하굣길 등 익숙한 공간에서 가족이나 이웃, 학교나 학원 관계자 등 친숙한 사람에 의해 주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피해 상태에 놓인 아동들을 보호해 성범죄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강은영 연구위원은 그 첫걸음으로 ‘학교 담장 설치’를 꼽는다.
학교 담장 만들기
서울시 등 여러 지자체는 2001년 무렵부터 학교 담장을 헐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는 ‘학교 공원화 사업’을 펼쳐왔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교가 담장을 철거했다. 교과부가 지난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초등학교의 20%인 1180여 개 학교에 담이 없는 상태다. 서울 강북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담장을 허물 때 선생님들 사이에서 안전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자체가 정한 사업을 일반 학교가 어떻게 거부하겠느냐”고 했다. 정부는 1999년부터 ‘학교 수업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지역 주민에게 학교를 개방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교내에 주차장, 정자, 운동기구 등을 만드는 등 지역주민들의 편의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을 장려해왔다. 교과부 규칙에는 ‘각급 학교의 장은 학교 교육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주민이 학교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국민체육진흥법 제13조에도 ‘학교 체육시설은 학교 교육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지역 주민에게 개방·이용되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김수철 사건’으로 교내 아동 대상 성범죄가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기 전에는 전국 상당수 학교를 지역 주민들이 무시로 출입해왔다. 이에 대해 표창원 교수는 “학생 보호면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교사 학생 등 관계자와 정당한 목적의 방문객 외에는 아예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그 반대로 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배은희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따르면 학교 개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올해 들어 서울과 경기 지역 학교의 담장 허물기 사업은 중단됐다. 하지만 대전·충남·경북·광주 등 4개 지역 17개 학교는 여전히 담장 철거 계획을 유지하고 있다. 배 의원은 “담장이 있다고 해서 학생 안전이 100%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담장이 학생 보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강은영 연구위원도 “학교의 경계 공간은 외부인이 학교에 진입해 범행을 시도하려는 걸 억제하는 제1방어선이다. 외부인이 지정된 출입 공간을 통해서만 학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담장을 두르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오늘날 서구 선진국에서 널리 활용하고 있는 ‘범죄 예방을 위한 환경 설계(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의 일환이다.
“건축물과 주위 환경을 적절하게 설계(Design)하고 효과적으로 사용(Use)하면 범죄율을 낮출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경찰청이 앞장서 방범환경설계제도(SBD·Secured By Design)라는 표준을 만들고 이에 부합하는 건축 자재나 건축물을 인증해주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학교는 아직 이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CPTED 설계
강 연구위원의 말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CPTED의 관점에서 서울 및 수도권 30개 초·중·고교의 안전 수준을 평가한 결과 ‘우수’ 등급을 받은 학교는 한 곳도 없었다. ‘보통’이 2개교, ‘미흡’이 15개교, ‘매우 미흡’이 13개교로 나타났다. 특히 문제로 지적된 것이 담장 철거다. 강은영 연구위원은 “지역 주민에게 체육 시설 등을 개방하는 학교의 경우 외부인이 이용하는 시설 영역과 학생·교사 등 학교 관계인만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영역 간에도 경계를 지어줘야 한다. 건물 디자인과 바닥 패턴의 변화 등을 통해 공간을 분리하면 범죄 의도를 가진 사람도 심리적인 부담을 느껴 범죄율이 낮아진다”고 했다. 외국의 경우 학교 설계 단계에서부터 사방에 ‘감시하는 눈’이 생기도록 구조를 만든다. 외부 담장을 투시형 구조로 세워 안팎에서 오가는 사람을 볼 수 있도록 하고, 교무실을 건물 중간층 한가운데에 두며, 교장실과 교감실을 범죄가 발생할 만한 곳에 배치하는 식이다.
학교 안에서 범죄 예방을 담당하는 배움터지킴이와 학교보안관, 등하굣길을 점검하는 아동안전지킴이, 학부모로 구성된 안전둥지회 등 최근 몇 년 사이 어린이 대상 범죄 예방을 위해 구성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체계화하고 효율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서울시는 3월부터 시내 국·공립 초등학교 547곳에 등·하교 지도와 학교 순찰, 외부인 출입관리 등을 담당하는 학교보안관을 2명씩 배치했다. 전직 경찰관과 직업군인 등으로 구성된 학교보안관은 매주 월~토요일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일 2교대 방식으로 근무한다. 학교에는 이미 교과부에서 배치하는 배움터지킴이도 있다. 하루 8시간씩 등·하교 지도와 학교 내외 순시·순찰 등을 통해 범죄 예방 업무를 하는 이들이다. 초등학생의 하교 시간대인 오후 2~6시에는 경찰청과 보건복지부가 대한노인회 등과 협의해 선발한 아동안전지킴이가 학교 인근 우범지대를 돌며 방범활동을 펼친다. 또 전국 5861개 초등학교 주변 편의점·약국 등 2만7256개 업소는 아동이 위급한 상황에 뛰어들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아동안전지킴이집’으로 지정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서울 강북지역 한 초등학교 앞의 ‘아동안전지킴이집’ 운영자는 “지구대에서 행동지침서를 1장 받았지만 별도의 교육이나 매뉴얼 지급은 없었다. 편의점협회에서 지정 사실을 알려줬을 뿐,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지킴이 제도가 노인 및 퇴직자들의 일자리 마련 수단으로 변질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 때문에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관련 인원을 늘리는 것보다 교과부,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경찰청 등으로 나눠져 있는 행정기관이 네트워크를 만들어 제도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있다. 한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는 “CCTV 설치 사업의 경우도 ‘어린이보호구역’을 운영하는 행정안전부와 ‘아동보호구역’을 관리하는 보건복지부, ‘365일 안전한 학교 만들기 사업’을 벌이는 교과부가 상호 경쟁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지자체는 각 부처와 협의해 해당 지역에 CCTV를 설치해야 하는데 어느 부분에 먼저 예산을 집행해야 할지 곤란할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피해자를 위한 시스템
피해자의 신뢰를 받는 형사사법제도를 구축해 아동 대상 성범죄의 신고율을 높이는 것도 장기적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이명숙 변호사는 “나영이는 검찰 조사를 받으며 사고 상황에 대해 다섯 차례나 진술해야 했다. 수사관의 질문에 답하고 나면 녹화가 안 됐다고 다시 하라고 하고, 다시 얘기하면 이번엔 목소리가 작다고 다시 하라고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느 부모가 아이의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려 하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면서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10월 대검찰청과 함께 ‘성폭력 피해아동·여성 진술조사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마련했지만, 아직 수료자는 19명에 그치고 있다.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지원모임인 ‘청소년아동사랑위원회(이하 청아랑)’ 운영위원인 이정희 전 서울시 아동복지팀장은 “수사뿐 아니라 재판과정까지, 법률적인 모든 절차에서 피해 아동을 보호하는 정책도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청아랑 회원들과 함께 법원을 방문해 아동 성범죄 전문 재판부 도입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전문 재판부를 구성해 아동이 신속하고 적합한 재판을 받도록 하면 사법부가 아동 대상 성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인식돼 사회 전반적으로 성범죄 발생률이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운영위원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아동피해자법을 제정해 아동이 증언해야 하는 사건의 경우 최대한 신속히 진행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 운영위원은 “우리도 어린이가 형사소송 절차에서 겪는 고통의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범죄 관련 통계에 따르면 성범죄자는 출소 후 25년 안에 약 40%가 재범을 저지른다. 아동 성범죄자의 재범률은 52%로 이보다 더 높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아동 대상 성범죄를 ‘특별하고 심각한 범죄’로 인식하고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여론에 휩쓸려 내놓는 미봉책으로는 아동 대상 성범죄를 근본적으로 줄일 수 없다. 이 문제 해결을 장기 과제로 설정하고 관련 정부 부처와 사법부가 함께 참여하는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 종합적이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