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호

도박중독으로 파멸하는 ‘놀이하는 인간’

  •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입력2011-04-20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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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은 누구나 일하기보다 놀기를 좋아한다. 일단 재밌기 때문이다.
    • 놀이는 실제적인 목적을 따르지 않는다.
    • 대부분 비현실적이며 탈일상이다. 놀이에는 도덕적인 규범, 이익 창출의 의무도 없다. 놀이에는 자유가 있다.
    • 그러나 놀이가 노름이 되고 중독으로 흘러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 해외원정 도박이 문제가 된 유명 연예인이나 수년 전 우리나라를 들쑤셨던 ‘바다이야기’사건은 잘못된 놀이문화의 폐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 즐거움이 사라진 곳에 거스를 수 없는 집착과 탐욕이 고개를 든다.
    도박중독으로 파멸하는 ‘놀이하는 인간’
    ‘놀이’라는 말은 ‘놀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노래, 노름 따위도 ‘놀다’라는 동사를 그 모태로 삼고 있으니, 놀이와 한 핏줄임을 알겠다. 사람이 일보다는 놀이를 더 좋아하는 까닭은 놀이가 재미로 황홀경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노동보다는 놀이 속에서 더 즐거워하고 재미를 만끽한다.

    나는 한때 바둑에 지독히 빠진 적이 있다. 머릿속에 바둑 생각만 가득하고, 눈을 감으면 바둑판이 떠올랐다. 바둑을 떠올리면 뇌에서 뿜는 도파민이 신경세포를 흠뻑 적셔 알 수 없는 희열이 차오르고 온몸이 짜릿해지곤 했다. 종일 바둑만 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바둑판 안에서 나는 노래하는 새고, 달아나는 늑대고, 먹잇감을 좇는 사자였다. 바둑에서 나는 짐승의 날렵함을, 발명가의 영감을, 약탈자의 쾌락을 겪고, 거기서 인생의 신묘함을 엿보았다. 바둑판은 변화의 격랑이 소용돌이치는 판이고, 우연과 필연이 얽혀드는 장(場)이었다. 거기에는 돌의 투자와 실패, 접속과 단절, 투쟁과 이념들, 터무니없는 죽음과 기적의 생환들이 우글거렸다. 바둑에 얼이 빠져 시급한 일들을 나 몰라라 하며 뒷전으로 밀쳐놓았으니 아버지에게 야단맞기 일쑤였다. 바둑-놀이는 현실이 아니라 비현실이고, 실재의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이었던 것이다.

    놀이를 놀이로 만드는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놀이는 실제적인 목적을 좇지 않는다. 놀이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시뮬레이션이다. 놀이는 놀이 안에서만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다. 둘째, 놀이는 규칙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규칙에 따라 이기고 짐을 가른다. 승패를 가르고 이에 따라 보상을 달리할 때 놀이는 생동성을 분출하며 재미와 함께 그 몰입도는 배가된다.

    놀이의 본질을 인문학적으로 규명하려고 한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의 호이징하다. 그는 인류가 일군 모든 형태의 문화와 문명의 기원에서 놀이 정신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그 본성에서 놀이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것이다. 놀이는 일과 다른 것, 자유와 즐거움을 찾는 탈일상적인 범주에 드는 활동이다. 차라리 놀이는 노동이나 의무로서의 작업들에 대한 휴식이고, 보상으로 주어진 활동이다. 모든 놀이는 자발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명령이고 의무의 강제에 구속된다면 그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그 무엇의 강제도 아닌 것, 즉 삶에서 발생하는 당장의 필요나 도덕적인 규범, 이익 창출 따위의 의무 부과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우리가 놀이에 몰입하는 으뜸이 되는 동기다.

    “놀이는 자유스러운 것, 바로 자유이다. 또 이것에 깊이 연관지어져 있는 두 번째 특징은 놀이가 ‘일상적인’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실제의’ 삶을 벗어나서 아주 자유스러운 일시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한마디로 놀이는 일상적인 테두리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잉여적인 활동이다. 그런 뜻에서 놀이는 간주곡이고 막간극이다. 그래서 놀이는 언제든지 중지할 수 있고 연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놀이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일까? 아니다. 놀이는 삶의 일부로서 삶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고 눌린 부분을 펴주며, 온갖 궂은일로 가늘어지고 얇아진 마음에 활력과 명랑성을 불어넣는다. 일견 뜻 없어 보이고 하찮게 보인 놀이는 개별자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불가결한 요소임이 드러난다.

    “정규적으로 반복되는 휴식 행위로서의 놀이는 우리 삶의 반려자이자 보완자가 되어 사실상 삶 전체의 불가결한 한 요소가 된다. 놀이는 삶을 가꾸어주고 또 삶을 확대시킨다. 그런 한에서 놀이는 생의 기능으로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놀이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 놀이의 의의와 놀이와 표현적인 가치, 놀이의 정신적 사회적 결합, 즉 한마디로 문화적 기능의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도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는 영양의 섭취와 번식 및 자기 보존이라는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과정을 넘어서는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호이징하, 앞의 책)

    도박중독으로 파멸하는 ‘놀이하는 인간’

    해외 원정 도박으로 물의를 일으킨 가수 신정환(가운데).

    놀이의 골격은 “경연, 공연, 전시, 겨룸, 우쭐거림, 뽐냄, 치장, 겉치레, 구속력을 갖는 규칙”(호이징하, 앞의 책)들과 같은 기본 요소들에서 나온다. 사람은 놀이 속에서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미덕과 원칙들을 배우고 익힌다는 점이다. 놀이가 제약되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삶을 떠받치는 기쁨의 탄력을 잃고 구질구질해진다. 삶이 있는 모든 곳에는 놀이가 있다. 놀이는 삶의 한 본질이며 가장 근본적인 영역의 하나다. 놀이는 무의미를 통해 의미를 겪게 하고, 불합리를 통해 합리를 겪게 하고, 속됨을 통해 성스러움을 겪게 한다. 그래서 호이징하는 이렇게 적는다.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놀이의 형태와 기능을 통해서, 사물의 성스러운 질서 속에 파묻혀 있는 인간의 의식이 최초의, 최상의,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표현을 찾는다. 점차적으로 성스러운 행위의 의미가 놀이 속에 스며들고, 제의가 여기에 융합된다.”(호이징하, 앞의 책)

    놀이와 노름

    놀이 중에서 노름이 가장 나쁜 평판을 얻은 것은 그것이 무분별한 자발성에 매이게 하기 때문이다. 도박-놀음에 중독된 사람은 왜 무분별한 자발성에 매이게 될까?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 돈은 부수적인 것이다. 돈보다 더 중요한 심리적 동인은 도박-놀음이 그 자체로 구조화하고 있는 짜릿함, 그리고 경쟁에서 ‘이긴다’는 사실이 주는 보상 효과다. 이기는 것은 물론 도박-놀음에 걸었던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따는 것이지만, 그 효과는 심리적인 영역에서 나타난다. 즉 돈을 따냄으로써 나는 상대보다 우월하다고 느낀다. 이것이 우월성의 효력이다. 자기가 어떤 일을 잘해냈다는 만족감은 일상생활의 덧없음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 방송에서 재치 있는 입담을 뽐내며 대중의 사랑을 받던 가수 겸 방송인이 노름 버릇을 끊지 못해 큰 곤경에 빠졌다. 외국의 카지노에서 노름을 하다가 큰돈을 잃어 방송 녹화에도 빠지고, 도박혐의가 불거지자 그는 노름은 하지 않았고, 뎅기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다고 거짓 해명을 해서 파장이 더 커졌다. 그의 아름답지 못한 처신은 실망을 사고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가 재기하는 일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남이 부러워할 만큼 큰돈을 벌어들이는 그가 왜 자기파멸에 이르는 도박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앞서 얘기한 바지만 돈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더도 덜도 아닌 도박의 중독자다.

    몇 해 전 온 나라가 ‘바다이야기’에서 퍼져 나오는 수상한 악취 때문에 들끓었는데, 그 ‘바다’에는 파도와 갈매기와 고래가 없었다. 저 외딴섬까지 퍼져나간 ‘바다이야기’는 사행성 성인게임장의 이름이다. 이 ‘바다이야기’에 대해 우리 시대의 한 지성은 이렇게 말한다.

    “낭만적으로 시 제목 같은 ‘바다이야기’가 도박판이라는 걸 누가 알았겠어요? 그것은 문화관광부에서 문화, 낭만주의 그리고 사행(射倖), 이 세 가지를 붙여서 한 거 아닙니까. 사람 사는 데마다 도박장이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거지요. 도박은 도박처럼 보여야지요. 문화관광부에서 하는 것이면 문화 행사처럼 보여야 되고, 시(詩)면 시 같아야지요. ‘바다이야기’처럼 시와 문화와 도박이 합쳐 있는 한국의 혼란 상태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문광훈, ‘세 개의 동그라미 ― 김우창과의 대화’, 한길사, 2008)

    ‘바다이야기’는 서민의 쌈짓돈을 긁어내기 위해 사행성 사업자들이 권력을 등에 업고 벌인 추악한 속임수요, 위장(僞裝)이다. 이 ‘바다이야기’의 뒷전에서 한탕주의와 돈·권력을 쥔 자들의 검은 거래가 춤추고 있었다. 정부 허가를 받은 도박장들은 이밖에도 황금성, 인어이야기, 오션파라다이스 따위의 이름을 달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카지노, 경마, 경륜, 경정, 로또, 스크린 경마, 인터넷 도박 사이트 따위가 도박열풍을 거들었다. 이 사행성 놀이 뒤에서 상품권 발행업체, 인터넷 게임업체, 게임기 제작업체, 조직폭력배, 영화등급심의위 관계자, 문화부 관계공무원, 청와대 비서관, 국회의원 등이 이권의 단맛을 보려고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서민들은 ‘한탕’의 꿈을 안고 ‘바다이야기’ 속으로 몸을 던졌다.

    도박중독으로 파멸하는 ‘놀이하는 인간’

    권력 특혜 의혹으로 번졌던 사행성 게임기 ‘바다이야기’

    ‘바다이야기’는 사행성 업자들과 도덕적 해이에 빠진 권력 주변의 수상한 이권 탐닉이 손잡고 만든 더러운 결과물이다. 국민참여를 내세웠던 정부가 내부의 부패로 무너져 내린 것은 진보세력의 개혁노선을 지지한 자들을 고통으로 내몰았다. 그 권력이 도덕성을 가장 큰 덕목으로 널리 선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더러운 이권에 연루된 사실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분열주의자들, 우익 기득권자들, 영남 패권주의자들이 다시 득세하는 물꼬를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환멸은 더 커졌다.

    바다이야기

    1902년에 서울 주재 이탈리아대사이던 카를로 로제티는 구한말 한국인의 속내를 들여다본 뒤 “도박에 대한 열정은 모든 한국인이 천부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쓴다. 한국인을 타고난 도박꾼으로 보았단 얘기다. 조선시대에는 쌍륙 놀이가 대세였다. 양반과 기생들이 돈을 놓고 쌍륙 노름에 빠지고, 사대부가의 부녀들도 규방에 모여 쌍륙 놀이를 즐겼다. 쌍륙은 조선 전기에는 귀족층이 즐기던 놀이였는데, 중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서민층에까지 널리 퍼졌다. 놀라운 것은 정약용이나 박지원도 이 쌍륙 노름 마니아였다는 사실이다. 다산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부사로 있던 1799년에 절도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경자년 봄에 촉석루에서 떠들썩하게 악기를 연주하다 해가 저물어서야 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심 비장과 함께 저포 노름을 하여 3000전을 가지고 여러 기생들에게 뿌려주며 즐겁게 놀았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벌써 19년이 지났는데도 어제의 일처럼 역력합니다.”(유승훈, ‘다산과 연암, 놀음에 빠지다’)

    구한말에는 투전과 골패라는 도박이, 일제 강점기에는 마작이, 이즈막에는 고스톱 판이 벌어진다. 놀이는 사람의 본능이니 그걸 탓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중독’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중독은 주체의 의지 바깥에서 흘러넘치는 잉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때 잉여는 어떤 주체적 삶의 생산에도 관여하지 않고 한없는 소비를 낳는다. 중독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이 변화되는 행복감을 통제하려는 시도”(크레이그 네켄, ‘중독의 심리학’)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 안의 자유의지를 잃고 혼돈 속에서 표류하는 것이다. 중독자는 주체의 운명을 주체 아닌 것에 떠맡겼다는 점에서 이미 죽은 자다. 중독자는 인과적 결정론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위조하며 위조된 자기가 진짜 자기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그의 삶은 중독이라는 환각 안에서 존재를 오작동하며 존재를 무의미하게 방출한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 많은 한국인은 특히 갖가지 중독에 취약하다. 이미 ‘도박중독’에 이른 사람이 30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 300만명이 탕진한 것은 재산만이 아닐 것이다. 재산만이 아니라 인격, 정서적 자산, 인간관계들도 하나씩 깨지고 줄어든다.

    그렇다면 왜 가장 합리적인 사람들조차 중독의 정서적인 논리 앞에 무너지는가?

    중독은 정서적인 층위에서 시작한다. 크레이그 네켄은 ‘중독’에 대해 “중독자가 친밀함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물질이나 행동과 맺는 정서적인 관계”라고 말한다. 문제는 정서적인 착각이다. 대개의 중독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내부로 움츠러드는 사람들이고, 물질이나 행동과 사회에서 용인하는 수위를 훨씬 넘어서서 병적이고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울함과 외로움과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중독에 의존한다.

    “도박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도박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한편으로는 ‘분명히 딸 것’을 믿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 주에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떠올린다. 내면에서 정서적인 압력이 쌓인다. 중독에는 정서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정서적인 긴장을 해소시키려는 뿌리 깊은 욕구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는 결국 자신의 충동에 굴복한다. 이 기회를 붙잡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스스로를 설득시키고 난 후에 굴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크레이그 네켄, 앞의 책)

    대박의 꿈

    아이의 놀이 속에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가 다 들어 있다. 아이들은 넘치는 생명력을 놀이를 통해 발산한다. 아이들은 놀이를 즐긴다. 놀이에 몰입해 있는 순간의 아이들 얼굴 표정을 눈여겨보라. 그들은 합목적성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그 기쁨으로 얼굴은 빛난다. 아이들은 그 자유를 만끽하며 온몸으로 그 기쁨을 표현한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삶 그 자체다. 시와 연극과 춤과 스포츠가 이 놀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꽃이고 열매들이다.

    어른들은 “기분을 바꾸기 위해서” 놀이를 이용한다. 놀이를 실제적이며 직접적인 목적 추구의 수단으로 전용함으로써 놀이를 놀이로서 즐기지 못한다. 즐기지 못한다면 놀이 그 자체에 구현된 순수성과 유희성은 사라진다. 놀이가 현실로 착종(錯綜)되면 놀이를 끝낸 뒤 돌아갈 곳이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피로와 허무감뿐이다. 여기서 모든 놀이 중독자의 비극이 생겨난다. 놀이의 중독자들은 환각이라는 영토 위에 인공낙원을 만든다. 도박-노름 중독자들에게는 현실로 귀환하는 다리가 없기 때문에 다시 그것에로 돌아간다. 그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심리적 퇴영이다. 그들은 중독 환자들이다. 중독자는 도박, 섹스, 쇼핑, 절도, 탐식, 앰피타민· 코카인·엑스터시와 같은 향정신성 약물들, 술이나 담배 따위의 기호식품들에 의존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기분을 통제하고 변화를 즐기며 황홀경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중독자들이 기분 변화, 취한 상태를 갈망하는 것은 저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분리되어 복잡한 문제들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독은 일종의 이탈이다. 아울러 “중독자는 어떤 물질이나 행동이 기분의 기복을 조절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기분을 바꾸고 싶어서 그러한 것들에 의존한다. 사실 처음에는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중독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행복에 대한 갈망을 통제하고 충족시키려는 노력이다.”(크레이그 네켄, 앞의 책)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합법화된 모든 도박산업은 국가가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레저산업’의 일부다. 그 밖에 개인이 법의 바깥에서 벌이는 도박 산업은 대개는 불법이다. 이 도박에 빠진 국민이 해마다 여기에 쏟아 붓는 돈이 4조원에서 5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규모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도박-노름에 매달릴까? 실업과 가계 적자, 그로 인한 심리적 공황, 좌절감과 현실도피 심리 따위가 도박과 무관하지 않다. ‘대박’을 터뜨려 단번에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한탕주의 심리도 거들었을 것이다. 앞서 노름에 빠진 한 방송인의 처신이 괘씸하다 하더라도 처벌보다는 치료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환자’이기 때문이다.

    도박중독으로 파멸하는 ‘놀이하는 인간’
    장석주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출강

    ‘느림과 비움의 미학’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해항로’ 등


    한 임상심리학자는 중독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광범위하고 피해가 큰 질환”이라고 말한다. 노름 버릇이 질병이라면 그는 치료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 질병의 족쇄를 풀지 못해 한순간에 그동안 쌓은 명성과 밥벌이의 수단을 잃고 ‘범죄자’라는 나락으로 떨어진 한 방송인의 딱한 처지를 보면서 도박이 저 자신과 가족을 고통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르제 그르니에 | ‘율리시즈의 눈물’ |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2006

    ● J. 호이징하 | ‘호모 루덴스’ | 김윤수 옮김 | 까치, 1981

    ● 크레이그 네켄 | ‘중독의 심리학’ | 오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2008

    ● 유승훈 | ‘다산과 연암, 놀음에 빠지다’ | 살림,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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