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 한택식물원, 한국 와인의 메카인 영동 와인코리아,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 무소유 삶을 실천하는 장수 좋은 마을에 흥부 정신을 좇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였다. 친환경 정신, 이노베이션에 입각한 대박 실현 정신, 나눔과 불유(不有)의 정신을 실천해가며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
흥부기행에 참가한 사람들이 축령산 편백나무 숲에서 숲해설가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반갑습니다. 작년에 왔던 제비들 이렇게 다시 만났네요. 우리 시대 흥부들을 만나러 또 떠나봅시다.”
#2 1박2일의 일정이 모두 끝난 이튿날 오후 전남 장성군 축령산 입구 금곡마을 어귀. 기행에 참가한 이들이 버스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제는 흥부기행이 아니라 놀부기행도 가봅시다.” 누군가 농담처럼 말하자 다른 사람이 이를 받아 얘기했다.
“흥부기행이 곧 놀부기행이죠. 우리 마음속에 흥부와 놀부가 다 있을 테니까요. 천사와 악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듯이 말이에요.”
4월의 둘째 주말인 9,10일 이틀간 있었던 ‘흥부기행’의 처음과 끝 장면이다. 이들은 누구이고, 또 ‘흥부기행’은 무엇인가? 매년 4월 초에 흥부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찾아다니는 이 여행 프로젝트는 올해로 13회째. 이제는 문화답사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특별한 주제를 갖고 떠나는 여행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됐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흥부기행은 여느 여행과 다른 특별한 기행이다. 여행이기도 하고, 문화 답사이기도 하고, 세미나이기도 한 이 기행은 이 시대의 흥부 찾기를 통해서 한국 자본주의,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발전을 모색하는 기행이다.
김영호 총장은 “21세기는 이전과는 또 다른 시대다. 천연자원의 고갈, 환경오염, 금융위기 등이 실제로 우리 삶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흥부는 이러한 시대 상황에 맞춰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왜 흥부인가?
흥부기행은 글자 그대로 흥부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왜 이 시대에 저 옛날의 소설 속 인물인 흥부를 찾는 것일까? 이들에게 흥부는 착한 자본가이며, 생태주의자이며, 박애주의자다. 제비의 생명을 살린 선행으로 큰 재물을 얻었지만 그걸 혼자 차지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도운 박애주의자이고,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준 ‘착한 자본가’의 원형이며, 제비를 해치려 한 구렁이조차 죽이지 않고 놓아준 ‘생명운동가’다. 그와 같은 흥부의 삶과 철학을 실천하는 이 시대 흥부의 후예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흥부기행은 무엇보다도 흥부의 명예를 복권시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한때 흥부를 새롭게 보려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흥부를 격하하고 놀부를 높이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하듯 흥부전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놀부를 자본주의 정신의 구현자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흥부는 못난 인간으로 보는 시각이 대두됐다. 즉 흥부는 게으르고 타성에 젖었으며 책임도 지지 못하면서 자식만 무조건 많이 낳은 부정적인 인간형으로 비판받았다. 이 같은 논리는 꽤 그럴싸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적잖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흥부기행을 주도한 김영호 총장이 당시 놀부 재평가에 앞장섰던 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다. 그는 “내가 흥부를 깊게 발견하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고 말한다.
흥부의 재발견은 이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흥부를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이다. 그건 우리가 흥부를 알기도 전에 그를 죽여버렸다는 자각이었다. 흥부의 인간상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그를 못난 인간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그를 몰아낸 자리에 놀부를 불러들이고 놀부형 인간을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높여 놓았다. ‘이웃 간에 화목하고, 친구에게 믿음이 있는(신재효 판본 ‘흥보가’ 중)’ 흥부를 몰아내고 ‘남의 선산에 묘지 쓰고, 일년 품팔이 외상 사경(私耕)에 농사지어 추수하면 옷을 벗겨 내쫓은’ 놀부를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받든 것이었다.
흥부기행에 동행한 판소리꾼 임진택씨가 창작 판소리 ‘남한산성’을 시연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실은 지금도 흥부는 여전히 부인되고 있다. 우리가 사실 흥부보다는 놀부가 되고자 하는 내심은 “부자 되세요”라는 낯 뜨거운 인사말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우리 사회의 풍경 속에서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흥부를 진정으로 복권시키는 것은 곧 우리 안의 흥부를 찾는 것이며 우리 안의 참인간을 회복하는 것일 때야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모든 고전은 신간’이라는 말이 있듯, 흥부의 재평가는 단지 과거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흥부를 찾아 떠나는 흥부기행을 마련한 뜻이 여기에 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꾼다
흥부의 재발견, 바로 알기는 우리의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과 각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나아가 새로운 삶, 새로운 사회, 우리의 미래상에 대한 모색이다. 흥부의 품성과 인간성, 삶의 태도에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답, 미래의 전망이 있다는 발견이다. 금융위기 등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미래는 탐욕이 아닌 흥부의 배려에 있으며, 살상과 파괴가 아닌 생명의 존중에 있음을, 치밀한 이기가 아니라 넉넉한 흥부의 마음에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웃 간에 화목하고, 친구에게 믿음이 있어, 굶어서 죽을 사람 먹던 밥을 덜어주고, 얼어서 병든 사람 입었던 옷 벗어주기, 노인이 짊어진 짐 자청하여 져다주고, 장마 때 큰 물가에 삯 안 받고 건네주기, 남의 집에 불이 나면 세간살이 지켜주고, 길에 보물이 빠졌으면 지켜 섰다 임자 주기, 청산에서 백골을 보면 깊이 파고 묻어주며, 수절 과부 보쌈하면 쫓아가서 빼어놓기, 어진 사람 모함하면 대신 나서서 변명하고, 불쌍한 사람의 횡액을 보면 달려들어 구원하기, 길 잃은 어린아이는 저의 부모 찾아주고, 주막에 병든 사람 본집에 기별 전하기, 막 깨어난 벌레를 죽이지 않고 자라는 초목을 꺾지 않는(신재효 판본 ‘흥보가’ 중에서)” 흥부의 마음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 ‘오래된 미래’가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김영호 총장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얘기를 꺼내며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잃어버린 장미에 대한 책임보다 흥부의 ‘제비 다리’에 대한 책임이 ‘사회책임경영’을 더욱 잘 설명해주는 발전된 사례”라고 말했다.
흥부기행은 김영호 총장의 주도로 만들어졌지만 또한 여러 명의 산파가 함께했다. 1990년대 후반 김영호 총장(당시 경북대 교수)을 중심으로 박중구 서울과학기술대학 교수(당시 산업연구원 연구원), 흥부의 고장인 남원이 고향인 김재성 전 대한매일 논설위원, 양심적 기업인의 대명사 격인 유일한 박사가 창업한 유한 킴벌리의 문국현 전 사장 등이 흥부기행 초기 단계에서 함께 논의했다. 박중구 교수는 “당시 우리의 관심은 천민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에 있었다”고 말했다. 흥부기행이 닻을 올리자 적잖은 ‘동지’가 모여들었다. 고은 시인, 환경운동가 최열, 박원순 변호사, 도법 스님, 김용택 시인 등이 흥부기행에 함께했다. 차 1대로 시작한 기행은 6회부터는 2대로 늘어났다.
흥부기행 올해로 13년째
올해 흥부기행의 주제는 ‘숲과 나무-생명이 숨 쉬는 현장’이었다. 숲과 나무와 관련해 흥부정신을 실천해나가는 지역 현장을 찾아갔다. 매년 5,6개의 방문지를 찾아가는 빡빡한 여행 일정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민간 식물원의 맏형뻘인 경기 용인 한택식물원과 한국 와인의 메카인 충북 영동 와인코리아, 전남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 무소유 삶을 실천하는 전북 장수 좋은 마을이 올해 흥부기행팀이 찾아간 곳이었다. 방문지를 결정하는 것은 ‘흥부경영’에 입각한 사업 방식을 보여주고 있느냐는 점을 기준으로 한다. 양민호 흥부기행 운영위원장은 “흥부경영이란 친환경 정신, 이노베이션에 입각한 대박 실현 정신, 나눔의 실천과 불유(不有)의 정신 등 흥부정신을 실천해나가며 이를 통해 ‘대박’을 터뜨린 경영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흥부기행 참가자들이 전북 남원 인월요업의 전시장을 구경하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아름답게 맺자는 뜻의 미실란 마을, 전라선 철도 이전으로 무용지물이 된 섬진강변의 폐철도를 인수해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섬진강 기차마을, 유기농 농산물인 새벽상추를 재배하는 ‘순환영농’ 방법으로 저소득계층의 자립을 모색하는 새벽영농조합 등은 모두 흥부경영에 입각한 혁신과 나눔의 정신을 보여주는 곳이다.
휴머니즘 있어야 진정한 대박
여기서 ‘대박’이라는 말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흔히 얘기하는 벼락부자를 의미하는 대박으로 오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흥부기행에서 대박의 의미는 제비가 가져다준 박씨에 담긴 의미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흥부기행이 말하는 대박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못 버는 게 기준이 아니다. 무엇보다 흥부의 마음처럼 그 바탕에 휴머니즘이 살아 있어야 한다. 또한 대박은 세간에서 말하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흑자를 내고, 큰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를 기준으로 성공 아니면 실패로 구분 짓는 이분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 사업이 보여주는 가능성, 우리 사회가 지켜주고 키워줘야 할 가치가 있느냐, 지금은 어렵고 실패한 듯 보여도 북돋워주고 응원을 보내주면 상당한 성취를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올해 찾아간 전북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 멍덕골의 ‘좋은 마을’이 그 좋은 사례다. 이곳에는 7년째 무소유의 삶을 실천해오고 있는 이남곡 대표가 살고 있다.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청년 시절 반독재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 인간의 삶, 인간의 진보에 대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는 그는 간디가 꿈꾸었던 작은 마을에서 공동체적 삶을 구현해보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이곳에서는 생산자의 ‘마음 씀’을 제일의 기술로 한다. 이곳의 자연조건은 밭작물과 장류를 생산하는 데 최적이지만 아무리 좋은 옥토라도 사람이 아니면 이루어낼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듯 생산물 하나하나에 온 정성을 다한다. 이곳에서 재래 방식으로 생산되는 된장과 조선간장, 고추장, 청국장, 장아찌, 고추, 마늘 등에는 첨가물이나 화학비료,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가축의 분뇨와 쌀겨, 깻묵 등으로 만든 자가 비료를 쓰는 이곳의 연간 매출은 1억5000만원 정도. 경제적 채산성이 걱정스러웠던 듯 일행 중 하나가 수지가 맞느냐고 묻자 이남곡 대표는 “이 정도면 대박이죠”라고 말한다. 채산성과는 별개로 좋은 마을의 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대박이라는 의미였다.
숙소로 자주 이용하는 인산가(仁山家)도 하룻밤 잠을 자고 가는 곳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이다. 경남 함양군 삼봉산 기슭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인산가는 민속 한의학자인 인산 김일훈 선생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산청 유의태 의원의 현신이라고 불린 인산 선생이 난치병 환자를 맞아주며 활인구세(活人救世)의 큰 뜻을 펼치던 곳이다. 김일훈 선생은 1909년에 태어나 16세 때부터 광복운동에 가담,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다녔는데, 그 와중에도 가는 곳마다 병자들을 치료했다고 한 전설적인 명의(名醫)였다. 그를 찾아온 환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었다. 그의 인술과 인본 정신, 그의 삶 자체야말로 흥부 정신의 한 구현이었다.
배움으로서의 기행
흥부기행에서는 항상 첫날 저녁 시간에 세미나가 열린다. 흥부정신을 큰 주제로 한 다양한 내용에 대해 발제와 토론이 벌어진다. 예컨대 ‘흥부정신과 구조조정의 대안에 대한 모색’ 식이다.
그러나 흥부기행이 학습 기행인 것은 이처럼 세미나가 열려서만이 아니다. 사실 길을 떠나는 것은 그 자체가 배움이다. 책 아닌 책을 읽는 것이다. 그건 길을 떠난 이가 마음이 열려 있고 배울 의지가 있다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문제의식을 만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문제의식과 생각을 더욱 벼리고, 한편으론 다른 이의 문제의식과 안목을 접하게 된다. 흥부기행은 바로 배움으로서의 여행의 한 모범을 보여준다. 흥부기행에서는 늘 토론하고 논의한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근책(根策)과 근책(近策), 원인(原因)과 원인(遠因)에 대한 의견 교환이 활발히 이뤄진다.
양춘승 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에게는 흥부기행이 치열하게 살았던 1970년대의 고민을 더욱 깊게 하는 시간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높이는 일을 하는 그에게는 흥부기행이 자신이 하는 일의 살아 있는 실례들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경북대 엄창옥 교수(경제학)는 최근 수년간 지방과 지방대의 소외 문제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는 지난해 지역 인재의 유출에 따른 지역의 경제적 손실을 조사한 결과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지역 인재들이 서울의 대학에 입학해 지역을 떠남으로 인해 빚어지는 손실이 지역내 총생산의 1.6%나 되더군요.”
심각해하는 엄 교수에게 지식PD 씽크넷이라는 사회적 싱크탱크를 운영하고 있는 임진철 대표가 “전국의 국립대들을 네트워킹으로 묶고 서열화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일촌공동체 임영희 이사는 혈연적 가족제도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지역사회를 단위로 새로운 가족제도인 사회적 가족, 즉 일촌 운동에 대해 얘기했다.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라도 오랫동안 사귄 사람처럼 관심사를 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논어’에 나오는 ‘사해지내 개형제(四海之內 皆兄弟)’라는 말이 떠오른다. 피를 나눈 형제지간이 아니더라도 뜻과 생각이 같으면 누구든 다 형제간이라는 말이다.
세대 간 벽 허물어
또한 흥부기행은 세대 간의 대화가 활발히 이뤄지는 기회다. 선후배 간 전승과 교육, 자극을 주고받는 것이다. 상호 교학을 통한 상장(敎學相長)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올해 기행에서도 노년에서부터 장년과 청년까지, 또 어린아이까지 나이를 잊고 한데 어울렸다.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원로 출판인 김종규 박물관협회 회장, 장만기 인간개발연구원 원장 등 칠순을 넘긴 이들이 20, 30대의 젊은이들과 스스럼없이 함께했다. 이들은 원로로서 여행에 참여한 게 아니라 학생으로 온 것이었다. 공자나 다산 정약용이 평생 학생이었던 것처럼 이들이 여행에 참여하는 모습에서 학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흥부기행은 학교를 어디를 나왔건, 다만 함께 배우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동문 관계를 맺게 해주는 셈이었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장성에 진입하려고 할 때였다. 장만기 인간개발연구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성에 대해 설명했다. 장 원장은 1975년 2월부터 36년 동안 1600회가 넘는 조찬모임을 열고 있다. 그는 36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조찬회를 개최하고, 연인원 약 30만명이 참여해 ‘조찬모임의 대부’ ‘미스터 스터디’로 불리는 이다. 그리고 장성은 인간개발연구원이 ‘장성 아카데미’를 열어서 인연을 맺은 곳이다. 그는 장성에 대한 자랑을 하고는 “장성은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 고향”이라고 고백하듯 말했다. 각종 ‘연(緣)’으로 얽히고설킨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장 원장의 말이야말로 진정한 인연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건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진정한 동문 관계, 여행이 맺어준 참 동문의 인연이었다.
특히 올해 기행에 아이들이 많이 참여한 건 여행의 활력을 더욱 높여 주었다. 25명에 달하는 흥부의 다산(多産)을 생각하더라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함께한 것은 그의 다산이 갖는 생명력을, 저출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미래의 활로는 어디에 있는지를 어린이들의 그 천진한 웃음과 싱싱함으로 생생하게 일깨워줬다. 이 아이들은 또한 어른들에게 가르침을 줌으로써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임을 보여줬다. 일행 중에 가장 인사를 잘한 사람은 일곱 살 된 동욱이었다. 동욱이는 버스에서 내릴 때마다 허리를 숙여 버스 기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것이 부모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나 그 절을 진심으로 꽉 채운 것은 동욱이의 어진 마음이었다. 많은 어른이 이 어린이에게서 ‘스승’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자연을 경배하다
흥부기행은 13년간 진화하고 발전하면서 변화도 꽤 있었다. 여행지도 매년 다르고, 참석자도 매년 다소 차이가 있으며, 여행의 주제도 매년 새롭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흥부기행 일행을 맞아주는 꽃과 나무들, 자연의 변함없는 태도다. 산수 좋은 곳을 찾아가는 여행은 여행객에게 산수기행이란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보길도, 남도의 섬진강변 모래톱, 진도와 순천만 등 남도의 절경을 맛보는 기행은 눈이 사치를 부릴 수 있는 환상적인 코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산수기행은 단지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다니는 한가로운 행락은 아니었다.
올해로 13회째인 흥부기행에 참가한 사람들.
흥부기행이 멋진 자연을 찾아다니는 것은 흥부가 자연의 섭리에 겸허하게 스스로를 낮췄던 것처럼 자연의 순리를 배우는 것이다. 꽃을 피우고 싹이 트며, 죽음 속에 탄생을 준비하는, 자연의 근면과 성실을 배우는 것이다. 향락과 유흥으로서가 아닌, 자연에서 배우고, 자연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곧 인간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임을 배우는 것이다. 그럴 때야 흥부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다.
흥부기행의 자연기행은 결국 국토기행이며, 그 국토기행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서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국의 땅과 섬, 산과 강을 찾아다니고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이를테면 ‘신(新) 택리지’를 쓰는 것이다. 박태순은 1980년대 초에 쓴 ‘국토기행’에서 ‘국토는 그냥 땅이 아니다. 자기 삶을 얹어놓고 있는 인생의 터가 된다. 국토는 국가의 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국민의 땅, 민토(民土)라는 의미이다. 민중이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땅이 곧 국토이다’라고 썼다. 그는 그래서 국토는 ‘인문지리의 사실에 의해 인식되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삶에 의해 적극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러므로 흥부기행의 자연 순례, 국토기행은 2008년에 흥부기행이 찾아갔던 조태일문학관에 걸려 있던 그의 시 ‘국토 서시’가 얘기하듯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문화기행
흥부기행에서는 항상 풍성한 문화공연이 벌어진다. 이번에는 어느 해보다 묵직한 공연이 펼쳐졌다. 창작 판소리인 ‘남한산성’의 첫 시연이 열린 것이다. 재야 판소리꾼인 임진택씨는 자신이 곡을 만든 이 판소리의 첫 시연 관객으로 흥부기행 참가자들을 선택했다. 여행 첫날 저녁 예정시각보다 지연된 9시가 넘어서야 시작된 판소리 공연은 노곤한 하루의 피로를 달아나게 할 만큼 관객들을 흠뻑 빨아들였다. ‘남한산성’이라는 제목에서 쉽게 연상되듯 결정적인 대목은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장면이었다.
‘내려간다 내려간다 남한산성을 내려간다/ 푸른 옷을 걸쳐 입고 흰 말에 올라타고/ 서문 밖으로 내려갈제/ 삼정승과 판서 승지들이 임금 뒤를 따라가고/ 세자 소현이 그 뒤를 따라간다/ 성에 남은 신하들은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백성들은 목놓아 우는데… 조선 임금이 무릎을 꿇고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을 하는데/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 조아리고/ 또 한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또 한번 절을 하고 또다시 세 번 머리를 조아리니/ 삼배 구고두례라’
통한의 장면에 관객들은 탄식을 토해냈다. 속으로 흐느끼고 뭉클해지더니 이어지는 대목에서 일부는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임금이 황망히 도성으로 들어갈 제/ 길가에는 죽은 백성들 시체가 널려 있어 참혹하기 그지없거늘/ … 임금이시여 어데로 가십니까?/ 불쌍한 백성들을 버려두고, 가련한 민초들을 이냥 두고/ 임금이시여 어데로 가십니까?/ 전쟁의 참화는 결국 무고한 백성들과 군사들 애꿎은 여인들과 아이들, 신성한 집과 땅, 논과 밭이 유린당하는 것뿐일러니/ 수많은 남녀 백성들의 울부짖는 아우성에 산천도 흐느끼고 초목도 우는구나’
사실 저녁의 문화 공연만이 아니라 이동 중 버스 안에서도 때때로 여러 가지 형태의 문화 공연이 자연스레 펼쳐지는 것이 흥부기행의 특징이다. 시조창을 하는 국립국악원 단원 문현씨는 전날 공연에서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을…’의 시조창을 유장한 호흡으로 들려주더니 이튿날 귀경길 버스 안에서 시조창에 대한 간단한 교습까지 해 줬다.
시를 쓰는 정영옥씨는 자작시 ‘자유’를 읊었다.
‘내 구속은 목 짤리운 것이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정제되는 아우성/ 영겁보다 위대한 찰나의 죽음을 딛고/ 백기 흔들며 항복할/ 그대 사랑 기다리는 것은/ 그대의 자유보다/ 나의 구속이/ 더 경건하기 때문이다’
생태주의적 노래를 보급하는 이기영 호서대 교수는 기행 때마다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 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라는 자작 노래를 들려준다. 한국인의 유전자에 흐르는 가무, 풍류의 멋을 다들 멋들어지게 발산했다.
편백나무 향보다 진한 향
1박2일의 마지막 일정은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전북 고창과 전남 장성 간의 경계를 이룬 축령산(621m) 일대에는 40~50년생 편백과 삼나무 등 늘 푸른 상록수림이 1148㏊에 조성돼 있다. 집념의 조림가 임종국 선생의 필생의 업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삼림의 울창한 편백나무 삼나무는 보기만 해도 장쾌했다. 이곳의 수종이 자생 수종이 아닌 일본에서 수입된 편백나무라는 것에서 다소 불만을 가진 이들도 있는 듯했으나 이렇듯 훌륭하게 자라서 사람들에게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으니, 나무에 국경을 따질 필요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이 광활한 삼림 속 어느 한편에 임종국 선생의 수목장지(樹木葬地)가 있다. 의외이던 건 수목장에서 흔히 연상되는 높고 큰 나무가 아닌 어른 키 높이를 조금 넘길 정도의 작은 느티나무 아래 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뜻밖이었으나 곧 그의 뜻을 알 것도 같았다. 작은 나무가 자신의 피와 살을 먹고 크기를 바라는 희원을 담고 있는 듯했다. 오히려 높은 키의 나무를 심은 것보다 그 뜻이 더욱 높아 보였다.
그가 이 숲에 쏟은 집념과 정성에 대해 생전에 그에 맞는 보상, 특히 경제적 보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안타까워한다고 한다. 숲 해설사인 김인숙씨를 만난 것이 축령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된 건 이런 아쉬움에 대한 그의 대답 때문이었다.
“많은 이가 이 숲을 통해 그를 기억해주니 그는 진정으로 잘 산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이 말에서 그가 진정으로 이 숲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다. 축령산의 또 다른 이름인 ‘문수산’의 기원이 된 문수보살의 지혜가 그에게 깃들어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멀리서 온 사람들을 진심으로 환대하며 온 정성을 다하는 김인숙씨의 마음 씀씀이에서 임종국씨가 키운 건 나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런 어진 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흥부가 제비를 돌보고 이웃들을 돌보고 나그네들을 대한 것도 저랬을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은 편백나무들은 늠름했다. 그 풍모에는 위엄이 넘쳤다. 그 나무들이 도열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온몸을 청량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바람은 또한 따뜻했다. 김인숙씨처럼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기에 훈훈했다. 편백나무 숲의 향보다 그 향기가 더욱 진했다. 거기에서 또한 흥부의 마음을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