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원의 대표작 ‘열하일기’.
이 가운데 이용후생학파의 다른 이름이 북학파(北學派)다. 송재소 교수에 따르면 북학파란 이름의 기원은 그 의미가 북쪽에 있는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데서 비롯됐다. 당시 조선보다 문물이 발전한 청나라를 배움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것이 북학파의 핵심 아이디어이자 기획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북학파의 사상은 일종의 선구적인 근대화론이다. 근대화론의 기본 발상은 더 발전된 국가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이 논리가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당대적 관점에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있다. 주지하듯이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형식적으로는 청과 수직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청나라에 대한 적대심이 매우 컸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제안하고 효종이 절치부심으로 추진한 북벌론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당시 조선 사회의 지배 이념 가운데 하나였다. 청나라에 치욕을 당한 만큼 무력으로 청을 정벌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론은 그 실현가능성 여부를 떠나 대내적 사회통합을 제고하기 위한 일종의 지배 헤게모니로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박지원과 그의 동료 및 제자들은 이러한 북벌론을 정공법으로 비판했다. 특히 박지원과 박제가는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법과 제도가 우수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북벌론에 맞서는 북학론을 제시했다. 기존 지배 이념과 정책에 대응해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게 시대정신 탐구의 본질을 이룬다면, 박지원과 박제가는 북학론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열하일기’에 대한 열광과 비판
박지원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가는 우리 역사의 길목에서 정약용과 함께 가장 주목할 만한 지식인으로 꼽혀왔다. 그는 북학론을 제시해 상공업의 장려를 촉구한 개혁적인 정치가이자, 문체를 혁신해 한국적 산문의 새로운 지평을 연 문필가였다. 홍대용, 형암 이덕무, 영재 유득공, 척재 이서구, 그리고 박제가가 동료이자 제자였으며, 개화파의 선구자 박규수는 그의 손자였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미(仲美)이고 호는 연암(燕巖)이다. 아버지는 반남 박씨 사유였으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 창원의 딸이었다. 1752년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으며, 보천의 아우 양천에게 ‘사기’ 등을 배웠다. 박지원에게는 처가가 중요했는데, 특히 처남 이재성과는 평생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박지원은 1765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1768년 백탑 근처로 이사했으며, 친구인 홍대용, 이웃인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그리고 박제가 등과 교유했다. 이때는 영조 말년과 정조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였으며, 박지원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서양 문물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낙방한 이후 박지원은 오직 연구와 글쓰기에 주력하면서 새로운 학문과 정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박지원 삶의 전환은 정조의 등극과 함께 이뤄졌다. 정조 초기 정치적 이유로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 연암협에 은거해 있었는데,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이 공식사절로 연경(북경)에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1780년 6월 말에 출발해 10월 말에 돌아온 박지원은 자신의 여행 체험담을 책으로 냈는데, ‘열하일기(熱河日記)’가 바로 그것이다. ‘열하일기’는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모았다. 젊은 세대는 열광한 반면 기성세대에게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