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한때 바둑에 지독히 빠진 적이 있다. 머릿속에 바둑 생각만 가득하고, 눈을 감으면 바둑판이 떠올랐다. 바둑을 떠올리면 뇌에서 뿜는 도파민이 신경세포를 흠뻑 적셔 알 수 없는 희열이 차오르고 온몸이 짜릿해지곤 했다. 종일 바둑만 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바둑판 안에서 나는 노래하는 새고, 달아나는 늑대고, 먹잇감을 좇는 사자였다. 바둑에서 나는 짐승의 날렵함을, 발명가의 영감을, 약탈자의 쾌락을 겪고, 거기서 인생의 신묘함을 엿보았다. 바둑판은 변화의 격랑이 소용돌이치는 판이고, 우연과 필연이 얽혀드는 장(場)이었다. 거기에는 돌의 투자와 실패, 접속과 단절, 투쟁과 이념들, 터무니없는 죽음과 기적의 생환들이 우글거렸다. 바둑에 얼이 빠져 시급한 일들을 나 몰라라 하며 뒷전으로 밀쳐놓았으니 아버지에게 야단맞기 일쑤였다. 바둑-놀이는 현실이 아니라 비현실이고, 실재의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이었던 것이다.
놀이를 놀이로 만드는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놀이는 실제적인 목적을 좇지 않는다. 놀이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시뮬레이션이다. 놀이는 놀이 안에서만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다. 둘째, 놀이는 규칙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규칙에 따라 이기고 짐을 가른다. 승패를 가르고 이에 따라 보상을 달리할 때 놀이는 생동성을 분출하며 재미와 함께 그 몰입도는 배가된다.
놀이의 본질을 인문학적으로 규명하려고 한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의 호이징하다. 그는 인류가 일군 모든 형태의 문화와 문명의 기원에서 놀이 정신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그 본성에서 놀이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것이다. 놀이는 일과 다른 것, 자유와 즐거움을 찾는 탈일상적인 범주에 드는 활동이다. 차라리 놀이는 노동이나 의무로서의 작업들에 대한 휴식이고, 보상으로 주어진 활동이다. 모든 놀이는 자발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명령이고 의무의 강제에 구속된다면 그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그 무엇의 강제도 아닌 것, 즉 삶에서 발생하는 당장의 필요나 도덕적인 규범, 이익 창출 따위의 의무 부과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우리가 놀이에 몰입하는 으뜸이 되는 동기다.
“놀이는 자유스러운 것, 바로 자유이다. 또 이것에 깊이 연관지어져 있는 두 번째 특징은 놀이가 ‘일상적인’ 혹은 ‘실제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실제의’ 삶을 벗어나서 아주 자유스러운 일시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한마디로 놀이는 일상적인 테두리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잉여적인 활동이다. 그런 뜻에서 놀이는 간주곡이고 막간극이다. 그래서 놀이는 언제든지 중지할 수 있고 연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놀이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일까? 아니다. 놀이는 삶의 일부로서 삶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고 눌린 부분을 펴주며, 온갖 궂은일로 가늘어지고 얇아진 마음에 활력과 명랑성을 불어넣는다. 일견 뜻 없어 보이고 하찮게 보인 놀이는 개별자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불가결한 요소임이 드러난다.
“정규적으로 반복되는 휴식 행위로서의 놀이는 우리 삶의 반려자이자 보완자가 되어 사실상 삶 전체의 불가결한 한 요소가 된다. 놀이는 삶을 가꾸어주고 또 삶을 확대시킨다. 그런 한에서 놀이는 생의 기능으로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놀이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 놀이의 의의와 놀이와 표현적인 가치, 놀이의 정신적 사회적 결합, 즉 한마디로 문화적 기능의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도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는 영양의 섭취와 번식 및 자기 보존이라는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과정을 넘어서는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호이징하,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