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있었어? (북한) 관리들하고 헤어졌어? 그래, 뭐래?…너는 괜찮니?”
수화기 너머 “오마니”하고 부르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 있던 기자의 귀에도 또렷이 들렸다. 한씨는 반가움인지, 귀찮음인지 모를 묘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미군 유해(遺骸)가 무더기로 발견됐대요. 장진호 인근에 비가 많이 와 ‘뼈다귀’가 둥실 떠다닌다나. 이번엔 쌀이나 의료기기, 뭐 이런 걸 (가져오면) 좋겠다는데, 갈 시간이 되나 모르겠네.”
한묘숙(86)씨는 그렇게 여러 차례 기자를 놀라게 했다. 짐작은 했겠지만, 한씨의 ‘미션’은 6·25전쟁 중 북한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를 찾아 미국의 가족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이다. 단둥에서 그에게 전화한 사람은 북한 관리와 친한 일종의 연락책이다. 북한 내 미군 유해나 ‘도그태그’(Dog Tag·군번줄)를 찾으면 전화를 하는데, 쌀과 의료기기는 연락책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답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이 활동을 30년 넘게 해왔다. ‘미션’을 알리지 않고 활동하다 보니 별의별 소리도 다 들었다. 미친 사람, 이중스파이, 대북 로비스트….
기자는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세 차례 그를 만났다. 여러 차례 전화 인터뷰도 했다. 보청기를 꼈지만 그에겐 큰 소리로 또박또박 질문해야 했다. 오래된 기억만큼 그가 말하는 연도와 통계도 명확하지 않았다. 한 차례 인터뷰 후 관련 자료를 찾아 확인한 다음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종종 뭔가 불안한 듯 얘기하기를 꺼렸다. 정보기관에 끌려가 조사받은 경험 때문인지, 논란거리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했다.
한무숙·말숙씨와 자매지간
유해 발굴이라는 그의 운명은 처음부터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한씨는 작가인 한무숙(1993년 작고)·말숙씨와 자매지간이다. 가야금 명창 황병기씨는 그의 제부(弟夫)다. 아버지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의 소론(少論) 가문, 어머니는 통의동 노론(老論) 가문 출신. 아버지는 경남 하동, 사천 등에서 30년간 군수로 재직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결한 것으로 알려진 한길명씨는 그의 큰아버지다.
한씨 역시 젊은 시절 충남 천안과 서울 한남동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며 사회사업을 했다. 적어도 남편 리처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1894~1982) 장군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사회사업이 천직인 줄 알았다. 위트컴 장군은 6·25전쟁 때 부산의 미군 2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낸 인물. 1954년 준장으로 퇴역한 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백악관과의 연락업무를 수행했다. 위트컴 장군 사후인 1985년, 그가 미국 LA에 설립한 ‘위트컴 희망재단’도 미군 유해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한씨는 이 재단의 이사장이고,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LA본부를 이끌고 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우스워요. 항상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1964년 어느 날 장군이 양장을 하고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양장을 하고 미국대사관에 갔는데 그날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는 남편을 ‘장군’이라고 불렀다. 그 호칭을 말할 때면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