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호

30년 넘게 유해 찾아 헤매는 한묘숙씨, 그 기구한 삶

“내가 이중스파이라고요? ‘미스테이크’예요”

  • 배수강│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sk@donga.com

    입력2011-04-21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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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고아 아버지’ 美 위트컴 장군과 결혼해 ‘인생 2막’
    • “홍콩에 다녀오시오” 특명… 20년간 중국 생활
    • 25차례 북한 드나들며 유해 정보 수집
    • 갑자기 걸려온 전화… “오마니, 장진호에 뼈다귀가 떠다녀요”
    • 박철언씨 회고록엔 “한묘숙은 정체불명의 여인”
    • “노랑머리 나온다”며 강제로 자궁적출수술 받기도
    • ‘최초 공개’, 허담 前 조평통 위원장의 방북 초청장
    30년 넘게 유해 찾아 헤매는 한묘숙씨, 그 기구한 삶
    그를 만나기 전, 기자는 그가 기센 여장부이거나, 돈 많은 마나님, 혹은 미모의 ‘마타하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1979년 중국에 들어가 20여 년간 머물며 중국과 북한 고위층을 만나고, 북한을 25회 드나들면서 ‘미션’을 수행한 사람이니 보통은 아닐 거라는 예단(豫斷)에서다. 역시 예단은 빗나가게 마련. 그에겐 미안하지만, 3월 말 그의 서울 한남동 아파트를 처음 찾았을 때 기자는 “따님은 어디 계세요?”라고 말할 뻔했다. 왜소한 할머니(키는 145㎝, 몸무게는 35㎏이다)가 “제가 한묘숙입니다”하고 먼저 얘기하지 않았다면. 4월1일 오후 그를 두 번째 만나던 날, 그는 중국 단둥(丹東)에 있는 누군가와 국제전화를 했다.

    “잘 있었어? (북한) 관리들하고 헤어졌어? 그래, 뭐래?…너는 괜찮니?”

    수화기 너머 “오마니”하고 부르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 있던 기자의 귀에도 또렷이 들렸다. 한씨는 반가움인지, 귀찮음인지 모를 묘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미군 유해(遺骸)가 무더기로 발견됐대요. 장진호 인근에 비가 많이 와 ‘뼈다귀’가 둥실 떠다닌다나. 이번엔 쌀이나 의료기기, 뭐 이런 걸 (가져오면) 좋겠다는데, 갈 시간이 되나 모르겠네.”

    한묘숙(86)씨는 그렇게 여러 차례 기자를 놀라게 했다. 짐작은 했겠지만, 한씨의 ‘미션’은 6·25전쟁 중 북한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를 찾아 미국의 가족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이다. 단둥에서 그에게 전화한 사람은 북한 관리와 친한 일종의 연락책이다. 북한 내 미군 유해나 ‘도그태그’(Dog Tag·군번줄)를 찾으면 전화를 하는데, 쌀과 의료기기는 연락책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답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이 활동을 30년 넘게 해왔다. ‘미션’을 알리지 않고 활동하다 보니 별의별 소리도 다 들었다. 미친 사람, 이중스파이, 대북 로비스트….



    기자는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세 차례 그를 만났다. 여러 차례 전화 인터뷰도 했다. 보청기를 꼈지만 그에겐 큰 소리로 또박또박 질문해야 했다. 오래된 기억만큼 그가 말하는 연도와 통계도 명확하지 않았다. 한 차례 인터뷰 후 관련 자료를 찾아 확인한 다음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종종 뭔가 불안한 듯 얘기하기를 꺼렸다. 정보기관에 끌려가 조사받은 경험 때문인지, 논란거리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했다.

    한무숙·말숙씨와 자매지간

    유해 발굴이라는 그의 운명은 처음부터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한씨는 작가인 한무숙(1993년 작고)·말숙씨와 자매지간이다. 가야금 명창 황병기씨는 그의 제부(弟夫)다. 아버지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의 소론(少論) 가문, 어머니는 통의동 노론(老論) 가문 출신. 아버지는 경남 하동, 사천 등에서 30년간 군수로 재직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결한 것으로 알려진 한길명씨는 그의 큰아버지다.

    한씨 역시 젊은 시절 충남 천안과 서울 한남동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며 사회사업을 했다. 적어도 남편 리처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1894~1982) 장군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사회사업이 천직인 줄 알았다. 위트컴 장군은 6·25전쟁 때 부산의 미군 2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낸 인물. 1954년 준장으로 퇴역한 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백악관과의 연락업무를 수행했다. 위트컴 장군 사후인 1985년, 그가 미국 LA에 설립한 ‘위트컴 희망재단’도 미군 유해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한씨는 이 재단의 이사장이고,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LA본부를 이끌고 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우스워요. 항상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1964년 어느 날 장군이 양장을 하고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양장을 하고 미국대사관에 갔는데 그날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는 남편을 ‘장군’이라고 불렀다. 그 호칭을 말할 때면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위트컴 장군과의 결혼은 그에게 재혼이었다. 전 남편과 이혼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나려고 했지만 유학 정보가 없었다. 그 때 도움을 청한 인물이 장군이었다. 장군은 평소 그의 고아원을 찾아 전쟁고아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등 고아원 운영을 도왔다. 결혼 이후 친정 가족들과는 생이별했다. 당시로는 생소한 이혼에, 더구나 외국인과의 재혼으로 가족들은 그와의 연락을 끊었다. 가족들은 ‘노랑대가리 나온다’며 반강제로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 자궁적출수술을 받게 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 고문으로 사이공으로 간 장군을 따라 그곳에서 몇 해를 보냈다. 어느 날 장군은 불쑥 “홍콩에 한번 다녀오라”고 했다. 거기서 중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라는 뜻을 살짝 내비쳤다.

    “유해를 가져오려면 북한에 가야 하고, 그러려면 중국을 경유해야 하니 그때로서는 홍콩에서 방법을 알아봐야 했다.”

    그의 표현대로 홍콩, 대만을 100번도 넘게 드나들었다. 그곳에선 주로 중국이나 북한 소식을 듣고 중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찾았다.

    지도 들고 중국行

    기회를 엿보던 중 홍콩에서 알게 된 사업가의 초청으로 1979년 중국 진입에 성공했다. 그제야 장군은 아내에게 “6·25전쟁 때 죽어간 미군 병사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구체적인 ‘지령’을 내렸다. 장군이 왜 중국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그토록 애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중국으로 갈 때면 장군은 지도 한 장과 만날 사람 리스트, 미국대사관 위치를 알려줬다. 장군은 주(駐)프랑스 미국대사관에서 무관으로 일한 적이 있어 그때 사귄 중국 고위층을 잘 알았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면 국제적으로 힘들어진다”며 그는 중국 고위층 인사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기자의 재촉에 다음과 같이 짧게 힌트를 줬다.

    “중국 톈진(天津)의 갑부 왕광잉(王光英)씨는 영국에서, 동생 광메이(光美)씨는 미국에서 공부했죠?”

    왕광잉씨는 중국의 전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의 처남. 두 살 아래 동생 광메이씨는 류 전 주석의 아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8년간 옥살이를 하다 복권돼 톈진시 부시장과 국제신탁투자공사 부이사장을 지냈다. 한씨가 왕씨와 친분을 쌓을 즈음인 1983년에 왕씨는 홍콩에서 ‘광대보업공사’를 설립했다. 중국 경제발전에 필요한 첨단 기술과 외자 유치를 위한 중국 정부의 전략적 기업이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는 그에게 ‘붉은 자본가’라는 명칭을 붙여줬다. 한씨가 만난 사람들이 어떤 ‘그룹’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에 내리면 마중 나온 사람이 ‘홍치’(紅旗·중국 자동차 상표)를 끌고와 나를 에스코트했어요. 장군이 다 연락을 해놓았는지 그대로 따라가면 됐어요.”

    수십 차례 한국과 중국을 오가다 그는 아예 중국에 눌러앉았다. 주로 베이징(北京)호텔과 젠궈(建國)호텔에 투숙했는데, 젠궈호텔 810호에서는 8년간 거주했다. 1982년 위트컴 장군이 서울 용산 미8군 내자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도 그는 중국에 있었다.

    “돌아가실 때도 ‘북한에 묻힌 유해를 제발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말씀을 남겼대요. 얼마나 가슴 아프던지….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미혼이던 그가 구태여 나와 결혼한 건, 자신이 죽어도 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퇴역 미군 출신인 김계현 위트컴 희망재단 이사의 생각도 비슷했다.

    “미군 대령이나 장군들은 진급을 위해 현지 여성과는 결혼하지 않는다. 출세를 다 버리고 한 이사장과 결혼한 것은 그 이유임이 분명하다.”

    30년 넘게 유해 찾아 헤매는 한묘숙씨, 그 기구한 삶

    1989년 허담 조평통 위원장이 한씨에게 보낸 초청장. 안기부에 원본은 빼앗겼지만 한씨는 복사를 해 놓았다.

    중국에 오래 있다보니 그를 찾는 한국 사람도 많이 생겼다. 한중(韓中) 수교 이전이어서 1980년대 후반 한씨는 주중 한국대사관 ‘비슷한’ 역할을 했다. 김영삼(YS)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방중(訪中) 요청 친서를 직접 공산당 간부에게 전달했고, 대기업 인사들과 중국 고위층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저는 고향이 북한이어서 당시 (1989년에 열린) 평양축전에 가려고 초청장을 받고 싶었어요. 방법을 찾던 중 누군가가 ‘베이징 젠궈호텔에 있는 한 이사장을 찾아가 봐라’고 조언해 한 이사장을 만났어요. 그땐 다들 한 이사장을 찾던 시절이었어요.”(김계현 이사)

    “마미” 외치다 죽어간 美 해병대

    한씨의 호텔에는 이처럼 중국이나 북한 관련 업무가 있는 사람들과 중국 고위층,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자주 찾았다. 이즈음 한씨는 북한의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연이 닿았다. 1990년 6월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허담의 초청장이 있어 가능했다. 중국에 들어간 지 11년 만이었다.

    “당시 허담은 김신(김구 선생 아들), 김복동(당시 노태우 대통령 처남), 한묘숙 이렇게 세 사람을 초청했어요. 김신은 김일성이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초청한 거죠. 그런데 초청장을 들고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초청장을 빼앗겼어요. ‘중정’(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나와 나를 조사했는데, 나보고 김일성 앞잡이라고 하는 거예요.”

    3일간 조사받은 뒤 그는 무사히 풀려났다. 미국 시민권자인데다 미군 장군의 미망인인 덕이 컸다. 안기부 조사에서도 그는 유해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는 안기부는 몰랐어도, 이후 미국은 그의 활동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이때부터 안기부의 ‘주요 관찰 대상’이 된다. 초청장에 얽힌 얘기는 기사 뒷부분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1990년대 초, 북한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는 한씨는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북한에선 어딜 가든 지도원과 운전수, 참사가 따라붙었다. 먼저 선물과 칭찬으로 호감을 산 뒤 친해지면 북한의 외국인묘지와 장진호에 대해 슬쩍 물어보는 식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장진호 근처까지 갔을 때 북한 사람이 묻더군요. ‘마미(Mommy)가 뭐냐’고요. 엄마라고 했더니, ‘아, 미국 놈들이 오마니를 찾다가 죽어갔구나’하더라고요. 장진호 전투 당시 미군들이 죽어가며 ‘마미’하고 외쳤다는 거예요. 이역만리에서 엄마를 찾으며 죽어간 불쌍한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이….”

    장진호(長津湖)는 1950년 겨울 영하 40℃의 혹한 속에 미 해병대 1사단 1만여 명과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의 장진호에서 미 해병대 절반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남하는 2주간 지연됐고, 피란민 등 20여만 명이 그 유명한 ‘흥남 철수’를 할 수 있었다. 생전 위트컴 장군은 “장진호에 수천 구의 미군 유해가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북한에서도 유해 얘기는 꺼내지 않았어요. 장군도 일절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뼈다귀’ 찾으러 왔다면 아마 미쳤다고 했을 거예요.”

    그가 북한에서 유일하게 ‘사업 아닌 사업’을 하게 된 것도 장진호 근처로 가기 위해서였다. 장진호 가까운 곳에서 송이버섯을 채취해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 돈은 썼지만, 죽어간 미군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현지인들에게서 ‘수천 구의 미군 시체가 장진호에 수장(水葬)됐다’는 이야기도 이때 들었다. 1999년까지 그는 스물다섯 번 방북했지만, 방북 초청장은 수도 없이 받았다. 그때마다 갈 수는 없었다.

    “1만5000달러(약 1630만원)가 없으면 안 들어갔어요. 그들(북한 고위층)은 옷이나 의약품, 특히 일본약 구심(求心·심장약)을 많이 요구했어요. 옷도 렛떼루(상표) 떼고 (북한에) 들여보내야 하는데, 옷이 너무 많아 렛떼루 떼는 직원을 고용했을 정도였어요. 그냥 오라고 해도 빈손으로 갈 수가 있나요.”

    집 팔고 패물 팔아 유해 발굴

    ▼ 그 많은 물품을 어떻게 보냈나요?

    “주로 중국에서 트럭에 실어가거나 탁송화물로 부치죠. 들고 갈 물건은 비행기에 싣고….”

    ▼ 방북 횟수를 감안하면 물품 구입비용만 50만달러(약 5억4000만원)는 들었겠는데요?

    “어휴, 더 들었죠. 체류비에 교통비에, 다 합하면 100만달러는 넘을 거예요.”

    ▼ 그 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물려받은 재산과 장군 연금으로 했죠. 패물도, 집도 다 팔았어요. 정부든 기업이든 돈 한번 받아본 적 없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걸로 했지. 지금은 남은 게 별로 없어요. 다 쏟아 부었으니….”

    10억원이 넘는 가산을 ‘탕진(?)’했는데도 그는 ‘우습다는 듯’ 페니실린 이야기를 꺼냈다.

    “한번은 (북한에서) 페니실린균이 필요하다고 해서 가져다줬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지금까지 (부탁은 해도 실제로) 페니실린균을 들고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나요. 그런데 농축하고 배양하는 기술이 없어 그걸 들고 제가 러시아로 가기도 했어요.”

    ▼ 북한에서 고마워했겠군요.

    “그래서 노력훈장이라는 걸 줬어요.”

    ▼ 왜 미군 유해 발굴에 집착하시죠?

    “좋은 일이잖아요. 장군 유지도 받들고….”

    ▼ 성과는 있었나요?

    “1993년부터 단둥에서 일(미군 유해 및 군번줄 수집)을 해주는 사람이 연락 오면 확인하러 갔어요. 도그태그 수백 개와 수많은 유골을 가져왔지만 대부분 가짜였어요. 소뼈도 있었고, 가짜 도그태그가 대부분이었죠. 처음부터 버릇을 잘못 들여놓았는지….”

    한씨는 처음엔 유해를 확인하면 그 자리에서 수고비로 1000달러를 줬다. 하지만 유해와 군번줄을 가져와 주한미군에 의뢰하면 대부분 ‘가짜’로 판명 나 차츰 액수를 낮췄다. 지금은 대부분 선물을 준다.

    “미 국방부 산하의 ‘전쟁포로·실종자 사무국(DPMO)’에서 유해가 발굴되면 사망·실종자 명단과 맞춰보고 친인척 유전자 감식을 통해 진위를 밝힙니다. 정확해요. 그 사람들은 뼈 색깔만 보고 미국인인지 아닌지 맞힙니다. 아, 이런 사람들에게 넘겨받은 도그태그를 확인하니 살아서 있는 사람 거였어요. 가짜를 만들었는가 봐요. 이 일은 미군이 나서야 하고 저는 협조하는 역할밖에 안 돼요.”

    소뼈와 가짜 군번줄

    여기서 잠시 북한과 미국의 유해 송환 문제를 짚어보자. 유해 송환은 1954년 유엔 측이 북한으로부터 4011구의 유해(국군 유해 2144구, 나머지는 유엔 참전군 유해)를 돌려받은 이후 잠정 중단됐다. 1990년대 초 북한은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며 보상금을 요구했다. 199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북한에 인력과 장비를 보내 유해 발굴 작업을 벌여 220여 구의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2005년 북핵 문제로 북·미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 발굴 인력의 안전 문제로 작업을 중단했다. 지금까지 133구의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씨는 북한에서 발굴한 유해는 몇 구를 제외하고는 ‘가짜’일 거라고 단언했다.

    “북한은 창고를 만들어 유해를 쌓아두고 있어요. 그런데 그 유해가 누구 건지도 몰라요. 검사도 안 해요. 미군 유해를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생각하니 양만 많으면 돼요. 대부분 다른 사람 유해일 겁니다. 어휴, 이젠 너무 세월이 흘렀어요.”

    ▼ 가짜로 판명 나면 화가 나지 않나요?

    “화내면 나만 손해잖아요. 하나라도 더 찾아내야 하니까요. 이 일은 오장육부 다 내놓고 해야 해요. 죽은 사람이건 산 사람이건 친절하게 해주고 비위를 맞춰야 합니다.”

    ▼ 힘들지 않았나요?

    “….”

    그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듯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장육부 다 내놓고’ 일을 했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일. 그 중 한 가지는 박철언 당시 대통령정책담당보좌관과 얽혀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1989년 박철언씨가 대북 밀사로 북한을 오가며 북측 관계자를 만난 사실이 야당 의원들에게 알려지면서 정치권 이슈로 떠올랐지요. 그때 야당 의원들에게 그가 오간 사실을 알려준 게 나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이 때문에 중정(안기부)에 잡혀가 고생했습니다.”

    박철언씨는 자신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2권에서 한씨를 ‘정체불명의 여인’이라고 묘사하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김신 장군의 밀입북 기도와 관련, 조사하던 중 드러났다. 한묘숙이라는 62세 여성을 통해 김영삼(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비밀리에 중국 방문을 추진하는 거 같은데, 평양 공작 일환인 거 같다. 통로나 시기가 부적절하다…(중략)…다음날(1989년 8월10일) 청와대 소식당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공작적인 브로커에 말려 김복동 장군도 중국 방문 문제에 연루돼 있는 것 같다. 한묘숙이라는 여자가 교섭했던 모양인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안기부장에게도 그렇게 일러놓았다’고 했다.”

    한씨는 ‘어이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두 김씨나 박철언씨와는 당시 일면식도 없어요. 북한 관리가 호텔로 초청장 3장을 준 거뿐입니다. 저도 책을 보고 ‘그래서 박철언씨가 그동안 나를 미워했구나’하고 생각했어요. 책이 나오고 주변에선 ‘가만있느냐’고 했는데, 그런 사람하고 싸우기도 싫고, 내가 정치하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오직 유해 때문에 가는 건데. 관심 없어요.”

    한씨는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이중스파이’로 의심받았다고 했다.

    “1990년도에 코미디언인 고(故) 이주일씨 일행이 베이징에 왔더라고요(당시 이주일씨는 연예인 응원단장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딸과 함께 만났는데 누군가 딸을 데리고 나갔어요. 언어와 지리를 모르니 통역가이드로 쓰려나보나 했어요. 그런데 저녁에 돌아온 딸이 그러더라고요. 자기를 데리고 간 사람은 안기부 직원인데 ‘한묘숙씨는 간첩이니까 어머니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고. 나를 간첩으로 본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어요. ‘옛날 여자’가 무슨 간첩을 합니까?”

    한창 북한을 드나들며 정보 수집하던 1993년 어느 날, 평양 고려호텔 5층 255호에 있을 때는 한 직원이 올라왔다.

    “오마니 큰일 났어요. 아랫동네(남한)에서 오마니를 이중스파이라고 하는가 봐요. 39호실 높은 양반이 보자고 해요.”

    39호실은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의 비자금 관리와 외화벌이를 책임진 기관. 그는 39호실에 가서도 “내가 이중간첩으로 보입니까? 그건 미스테이크예요. 나는 마타하리가 아닙니다”라고 반박했다.

    30년 넘게 유해 찾아 헤매는 한묘숙씨, 그 기구한 삶

    남편인 위트컴 장군 사진은 그의 침대맡에 놓여 있었다.

    1999년 6월에는 대형 오보사건도 터졌다. 한국계 미국인 ‘카렌 한’씨가 북한에 억류됐는데 그가 한묘숙이라는 기사였다. 국내 신문 대부분이 ‘한묘숙=카렌 한’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기사를 살펴보자.

    “억류된 사람은 유명 여류 소설가 한무숙·말숙씨와 자매지간으로 국제 로비스트 한묘숙씨다.…남북한에 널리 알려진 로비스트로 서울을 수시로 드나들며 정부의 대북 인사들과도 여러 차례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85년부터 최근까지 삼성그룹과 연계해 대북 에이전트 활동을 해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 그는 한국에 있었고, 오보를 낸 기자들이 그를 직접 찾아와 사과하고 정정기사를 냈다.

    “카렌 한이라는 사람이 ‘장군 부인’이라며 제 행세를 하고 다녔대요. 그 사람과 같은 호텔(베이징호텔)에 있기도 했는데 서로 잘 몰랐어요. 삼성 일을 도왔는데…. 저는 유해 때문에 한 거지, 기업 돈 안 받아요.”

    그는 자신을 미워한 인사들과 그에게 부탁했던 여러 기업인 얘기를 했지만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요청했다. 1999년까지 중국에서 북한을 오갔던 한씨는 이후 중국과 북한 관련 일을 정리하고 돌아와 현재는 단둥 연락책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체력적으로, 금전적으로 현지에서 활동하는 것도 무리고, 미국의 재단 본부 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트컴의 사명감과 인류애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전쟁고아를 돕고, 미군 장군과 결혼해 30년 넘게 미군 유해를 찾아 돌아다니는 한씨의 일생은 한 편의 대하(大河)소설 같다. 아무리 옳은 일이고, 남편의 유지를 받든다 해도,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그 위험한 일을 왜 했을까. 처음엔 한씨의 활동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웠지만, 그가 “우리 장군” 하며 무한 신뢰를 보내는 ‘장군’에 대해 취재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취재를 종합해보면, 남편 위트컴 장군은 사명감과 애국심이 철저한 군인이었다. 인류애를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평소 누군가가 군용 종이에 메모라도 하려면 “정부 자산을 왜 함부로 쓰느냐”며 다그칠 정도로 공사(公私)를 분명히 했고, 상사가 한씨를 군용차에 태우려 해도 같은 말을 하며 사양했다.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손수건과 옷을 직접 빨아 빨랫줄에 널었다.

    군수사령관으로 있던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자 직접 이재민수용소를 설치했고, 군수물자를 이재민에게 풀어 미 의회 청문회에 서기도 했다. 당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현재의 부산대 캠퍼스를 지을 때는 25만달러 상당의 건축자재를 지원하는가 하면, 휘하 공병부대로 하여금 진입로와 부지조성 공사를 하도록 도왔다(부산대학교 60년사). 전쟁고아 진료를 위해 부산 메리놀병원 신축을 주도했고, 부대원들의 월급 1%를 신축기금에 헌금하도록 했다(메리놀병원 50년사). 퇴역 이후에는 한미재단을 만들어 수많은 고아원을 도왔다. 부산일보는 1982년 7월23일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 부산 UN 묘지에…’라는 제목으로 그의 부고 기사를 다뤘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유해 발굴도 이러한 사명감과 인류애 실천의 한 방안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한씨는 사후 남편을 만나 “부끄럽게도 그냥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일본이 항복한지도 모르고 28년간 괌에 숨어 산 일본군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1915~97)가 귀국 당시 했던 그 일성(一聲),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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