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No Fear’정신으로 꼴찌 팀 패배주의를 한 방에 날린 지도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1-09-20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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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말 한국 야구에 제리 로이스터라는 외국인 감독이 부임했다. 그는 7년간 부진한 성적을 거둬 패배주의에 찌든 롯데 자이언츠를 맡아 3년 연속 4강에 올려놓는 기적을 연출했다. 그는 선수가 가진 단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번트를 비롯한 감독의 작전에 의존하는 세밀한 야구 대신 장타를 선호하는 메이저리그 식 '빅볼'을 선보이며 구도(球都) 부산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특히 로이스터 감독은 자신의 입지를 위해 선수 혹사도 마다하지 않는 일부 지도자와 달리 당장의 성적보다는 선수들의 미래를 더 중시하는 선수단 운용을 통해 바람직한 스포츠 지도자의 상(像)을 재정립했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8888577’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비밀번호다. 이는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롯데 자이언츠 야구단이 거둔 시즌 순위를 나열한 숫자다. 4년 연속 꼴찌, 7년 연속 포스트 시즌 탈락도 유례없지만 2002년 성적은 치욕에 가깝다. 2002년 롯데는 시즌 동안 35승 1무 97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승률은 0.265였다. 8개 구단에 불과한 한국 야구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꼴찌 팀도 4할을 웃도는 승률을 거둔다. 거기서 조금 더 힘을 내 반타작만 하면 4개 팀이 겨루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승률 2할은 프로 팀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부끄러운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부진한 성적에 롯데 선수들은 헤어날 수 없는 패배주의에 빠졌다. 초반부터 앞서지 못하면 역전 가능성을 완전히 접어둔 채 그냥 맥없이 포기해버렸다. 선수단은 물론 팬들마저 분노의 감정을 넘어 절망과 좌절이 섞인 체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한국 야구팬 중 가장 열정적이고 때로는 극성맞다는 평가를 받는 롯데 자이언츠의 연고지 부산 팬들은 급기야 선수단의 각성을 촉구하며 ‘야구장 안 가기 운동’이라는 극단적인 행위까지 벌였다. 당시 부산 사직야구장에는 “너희가 응원해라. 야구는 차라리 우리가 할게”라며 선수단의 부진한 성적을 질타하는 문구의 플래카드가 걸렸다.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단 인원보다 야구를 보러 온 관중 수가 더 적은 웃지 못할 광경도 벌어졌다.

    하지만 지난 4년간 롯데 자이언츠는 완전히 다른 팀으로 변신했다. 30년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사령탑이었던 제리 로이스터(Jeron Kennis Royster·59) 덕분이다. 로이스터 감독은 부임 첫해에 꼴찌 이미지가 강했던 롯데를 단숨에 시즌 3위로 올려놨다. 반짝 성과가 아니냐는 일각의 시선이 있었지만 롯데의 돌풍은 2009년과 2010년에도 이어졌다. 시즌 초 부진에 시달리며 꼴찌를 면치 못했지만, 6월 이후 무서운 상승세를 발휘하며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3년 연속 4강에 진출한 건 롯데 자이언츠 구단 역사상 최초였다.

    로이스터 감독이 롯데에 부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덕 아웃 한구석의 화이트보드에 ‘No Fear(노 피어·두려움은 없다)’라는 문구를 써놓는 것이었다. 이 ‘노 피어’ 정신은 꼴찌 팀인 롯데가 단숨에 강팀으로 변모한 원동력이자, 로이스터 감독이 역대 롯데 감독 중 팬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감독이 된 이유다. 그는 ‘노 피어’라는 단어를 통해 선수단 전체에 만연해 있는 패배주의를 걷어내려 했다.

    그는 항상 선수들에게 ‘롯데는 강팀이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면서 자신감을 심어줬다. 선수를 엄격히 훈육하고 조련한다는 이미지가 강한 국내 지도자들과 달리, 그는 선수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에 주력했다. 선수들의 개별 훈련이나 게임 운영에도 크게 간섭하지 않고 선수들을 완전히 믿고 맡겼다. 물론 무한한 자유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이 따르긴 했지만 그는 야구 감독이 디렉터(Director)가 아니라 매니저(Manager)임을 온몸으로 보여준 최초의 지도자였다.



    로이스터는 누구인가

    로이스터는 195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그는 1973년 21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서부 지구의 명문 팀인 LA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3루수였다. 선수 로이스터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5년간 메이저리그에서 그가 거둔 성적은 타율 2할4푼9리, 홈런 40개였다. 결국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뉴욕 양키스 등을 전전하다 1988년 은퇴했다.

    로이스터는 1999년 마이너리그에 속한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수비·주루 코치를 맡으며 야구 지도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메이저리그에 소속된 밀워키 브루어스의 타격 코치를 지낸 그는 이듬해인 2002년에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감독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그해 밀워키 브루어스는 53승 94패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결국 그는 1년 만에 성적 부진으로 해고당했다. 2003년 이후에는 LA 다저스 마이너리그 팀의 수비 코디네이터, LA 다저스 트리플A팀의 감독 등을 지냈다.

    로이스터는 2007년 말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전격 부임했다. 당시 그를 발탁한 사람은 신동빈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였다. 7년간의 기나긴 암흑기 동안 롯데는 여러 명의 지도자와 만났지만 어떤 지도자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암흑기 초기인 2001년에 롯데를 맡았던 고(故) 김명성 롯데 감독은 2001년 7월 순위 싸움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로 때문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에 한국 야구 역사상 유일한 4할 타자로 화려한 선수 커리어를 갖고 있는 백인천 감독을 영입했지만 그는 감독으로서 최악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퇴출당했다. 롯데는 팀 프랜차이즈 출신인 양상문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켰지만 그 역시 포스트 시즌 진출에는 실패했다.

    양 감독의 퇴출 후 2006년 롯데 감독이 된 사람은 강병철 감독이었다. 그는 1984~86년, 1991~93년 롯데의 사령탑을 지내며 재임 기간 롯데를 두 번이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베테랑 강 감독마저 2년 연속 7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결국 구단은 완전히 새로운, 일종의 모험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신동빈 구단주가 연락한 사람이 바로 일본 야구단 지바 롯데 마린스의 바비 발렌타인 전 감독이었다. 메이저리그 명감독 출신인 발렌타인은 2004년 롯데 마린스 사령탑이 됐다. 부임 1년 만인 2005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일궈내며 파란을 일으켰다. 발렌타인 감독의 능력을 확인한 신 구단주는 그에게 외국인 감독의 추천을 부탁했다. 이때 그가 추천한 사람이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로이스터 감독이었다. 로이스터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동양의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야구 인생을 시작했다.

    ‘검은 부산갈매기’ 한국 야구에 새 바람 일으키다

    로이스터 감독은 2008년 시즌을 준비하는 스토브리그가 한창인 2007년 말 한국 땅을 밟았다. 언급한 대로 그는 부임하자마자 ‘No Fear’라는 팀 슬로건을 직접 지어 구단에 제시했다. 그는 겨울 동안 하루 10시간 이상씩 하던 훈련을 필수 훈련 3∼4시간을 제외한 자율훈련으로 대체했다. 선수들에게 끼와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줬다. 그라운드 와인 파티 등 선수들과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졌고, 꾸준히 자신감을 심어주는 말로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선수들을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롯데에는 홈런 타자 이대호와 에이스 투수 손민한만 존재한다는 일각의 편견을 깨고 무명 선수들에게도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덕아웃과 라커룸이 시끌벅적해졌고 선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는 성적으로 이어졌다. 공격에서는 정수근, 김주찬, 박기혁이 마음껏 뛰기 시작하며 공격의 물꼬를 텄다. 간판 거포 이대호와 멕시코에서 영입한 용병 타자 카림 가르시아의 홈런포도 불을 뿜었다. 에이스 손민한이 선발 마운드를 든든히 지키는 가운데 젊은 투수인 장원준과 송승준이 한 단계 성장한 기량을 선보였다. 롯데는 초반부터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위기도 있었다. 7월 중순 주장 정수근이 음주 폭행 사건으로 무기한 실격 처분을 받는 물의를 일으켰다. 롯데는 정수근 사건 후 5위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이내 새로 주장에 선임된 조성환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며 전열을 정비했다. 특히 8월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가진 2주간의 휴식기를 거치면서 롯데는 화려한 부활에 성공했다. 롯데는 올림픽 브레이크 직후 팀 창단 최다 연승인 11연승의 신바람을 내며 결국 2008년 시즌을 3위로 마감했다.

    구도(球都) 부산의 야구팬들은 이를 화끈하게 성원했다. 홈 개막전부터 만원사례를 기록한 부산 관중은 2008년 시즌에 열린 63번의 홈경기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1경기에 매진을 연출했다. 2008년 시즌 롯데의 총 관중은 최종 137만9735명으로 롯데 구단 사상 최다였다. 롯데의 선전과 부산 팬들의 열기 덕에 한국 프로야구도 1995년에 이어 무려 13년 만에 관중 500만명 시대를 다시 열 수 있었다.

    부산 팬들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바로 로이스터 감독의 열창이다. 시즌 초부터 로이스터 감독은 “롯데가 4강에 진출하면 부산 관중이 가장 좋아하는 응원가인 ‘부산갈매기’를 구장에서 부르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는 2008년 마지막 홈 경기였던 9월28일 기아와의 경기에서 3만명의 관중 앞에서 허남식 부산시장과 함께 ‘부산갈매기’를 불렀다. 허 시장은 노래에 앞서 로이스터 감독에게 부산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로이스터 감독은 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국가대표 감독에 이어 두 번째로 부산의 명예시민이 된 외국인 감독이라는 영예도 누렸다. 로이스터 감독은 “롯데 관중은 세계 최고의 팬”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8년 만에 가을 잔치를 맞은 롯데의 포스트 시즌 성적은 좋지 않았다. 워낙 오랜만에 큰 경기를 치러본 터라 롯데 선수들은 경험 부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시즌 성적은 롯데보다 한 단계 낮지만 30년 내내 한국 야구의 강팀으로 군림해온 노련한 삼성 라이온즈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내리 3패를 당하고 말았다. 포스트 시즌에서 거둔 부진한 성적은 두고두고 로이스터 감독의 발목을 잡는다.

    갖은 악재 겪으며 강팀 기틀 다진 2009년

    롯데의 2009년은 파란만장했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출발해 천국에서 마무리한 한 해였다. 만년 하위에 머물다 무려 8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던 터라 시즌 전 롯데 팬들의 기대는 어마어마했다. 시범 경기 성적도 좋았다. 롯데는 시범 경기에서 11승 1패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지난해 선전이 돌풍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정규 시즌에 돌입하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마운드와 타선의 동반 침체로 바닥을 헤맸다. 에이스 손민한이 어깨 통증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나머지 선발들도 컨디션 난조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와중에 주장 조성환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주장이자 롯데 선수들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조성환은 4월23일 SK와의 경기에서 SK 투수 채병용의 볼에 얼굴을 강타당해 광대뼈가 4곳이나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롯데 선수들은 크게 동요했다. 6월5일 롯데의 성적은 20승33패로 5할 승률에서 무려 마이너스 13경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독보적인 8위여서 도무지 치고 올라갈 기미가 안 보였다. 6월에 마이너스 13이라는 성적을 연출한 팀이 4강에 진출한 사례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2008년 당시 ‘성적은 좋지만 지나치게 메이저리그 식 야구만 추구해 한국 야구의 실정을 잘 모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로이스터 감독은 전술 변화를 시도해 난관을 돌파했다. 어지간하면 주전 선수만 주로 기용했던 2008년과 달리 그는 적재적소에 후보 선수들을 투입해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가 기용한 후보 선수인 박정준, 김민성, 장성우 등은 팀이 어려운 시기에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을 200% 소화했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10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두산베어스 대 롯데자이언츠 2차전 경기가 9월30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렸다. 연장 10회 초 1사 1,2루 상황에서 롯데 이대호가 역전 3점 홈런을 날리고 홈인해 로이스터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감독의 용병술은 여름부터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6월 초까지 최하위에 머물던 롯데는 7월 들어 천적 SK를 대파하는 등 연승을 거두며 4위로 올라섰다. 시즌 전체를 날릴 수도 있다던 당초 우려와 달리 주장 조성환은 정확히 부상 40일 만에 복귀했다. 에이스 손민한도 가세했다. 팀 분위기가 활기를 되찾자 두산에서 건너온 홍성흔의 방망이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전 팀 두산 베어스에서 장타자의 잠재력을 갖춘 포수로 평가받았던 홍성흔은 롯데로 온 후 지명타자로 활약하며 몰라보게 달라진 장타력을 선보였다. 초반에는 부진을 면치 못했던 투수 송승준은 6월 말부터는 3경기 연속 완봉승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며 초반 부진을 완전히 털어냈다.

    8월 초 다시 위기가 왔다. 손민한과 송승준이 다시 부진의 늪으로 빠지며 롯데는 8월6일 5위로 내려앉았다. 이후 한 달 내내 4강 티켓을 두고 삼성라이온스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9월 첫날 정수근이 다시 음주 논란에 휩싸였다. 롯데는 9월8일까지 5연패를 기록했고 4위 삼성과의 승차는 2게임으로 벌어졌다. 롯데가 쥔 마지막 반전 카드는 삼성과의 맞대결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삼성과의 2경기에 올인했다. 이때 그가 발탁한 후보 선수들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며 롯데는 2경기를 모두 가져갔다. 4위에 복귀한 롯데는 이후 4게임도 연거푸 승리하며 4강 티켓을 확정지었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시즌 초 5할 승률에서 13경기나 뒤지고, 막바지 순위 싸움이 한창인 9월 초 5연패를 당하는 등 2차례나 큰 위기가 왔음에도 포스트 시즌 티켓을 따냈기에 지난해보다 올해가 더 뜻 깊은 한 해가 됐다”고 말했다. 7년 연속 하위에서 맴돌다 2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면서 선수단의 가슴에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긍정적인 태도가 뿌리 깊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롯데는 2009년에도 포스트 시즌에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롯데는 두산 베어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조정훈의 호투로 1차전을 기분 좋게 따냈다. 하지만 2차전에서 0대 6으로 패하면서 상승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두산의 홈구장인 잠실에서 1승1패를 했으니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는 평이 많았지만 정작 롯데의 홈구장인 부산 사직구장에서의 성적은 더 나빴다. 사직에서 열린 3차전과 4차전에서 롯데는 두산의 불방망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대패했다.

    2010년에도 롯데는 수많은 부상 악재를 겪었다. 그때마다 새로운 스타가 등장해 위기를 넘겼다. 2010년 6월 수비의 핵인 유격수 박기혁이 왼쪽 복사뼈 골절상으로 전력에서 제외되면서 롯데의 부상 악재가 시작됐다. 에이스 조정훈은 오른 팔꿈치 부상으로 6월 중순 이후 시즌을 완전히 접었다.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정훈과 함께 마운드를 책임졌던 장원준은 7월16일 허리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홍성흔이 기아전에서 윤석민의 투구에 손등을 맞아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조성환도 기아 윤석민의 투구에 맞아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

    화끈한 공격 야구 선보인 2010년

    이런 상황에서 2009년 우승팀이자 시즌 5위 팀인 기아의 추격은 거셌다. 기아는 8월 중순 롯데와의 격차를 2경기로 줄이며 4강 희망을 살려냈다. 그러나 2009년과 마찬가지로 2010년에도 새로운 얼굴들이 기존 선수들의 공백을 잘 메웠다. 로이스터 감독이 2군 경기를 보고 직접 발탁을 지시한 어린 투수 김수완과 이재곤이 조정훈과 장원준의 공백을 잘 메워줬다. 타선에서 전준우, 문규현, 김주찬, 손아섭 등의 활약이 홍성흔, 조성환의 공백을 메웠다. ‘신진 세력’의 힘을 등에 업은 롯데는 8월17일부터 6연승을 내달리면서 기아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고 4위를 확정했다.

    3년 연속 4강 진출에 성공한 롯데는 한국 야구계의 강팀으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특히 타격 7관왕에 오른 이대호를 필두로 홍성흔과 가르시아, 강민호 등 즐비한 강타자들을 앞세워 화끈한 ‘빅볼 야구’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대호-홍성흔-가르시아로 이어지는 롯데의 클린업은 프로야구 사상 최강의 클린업 트리오로 군림했다.

    과거 롯데는 ‘소총부대’ 즉 단타를 주로 치는 선수들만 모아놓은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두 번의 우승을 차지했던 1984년과 1992년에도 공격력을 앞세워 우승했다기보다는 마운드의 우위, 그것도 최동원과 염종석이라는 에이스의 역투로 이긴 거나 다름없었다. 2000년대 들어 이대호라는 거포가 나타났지만 그 역시 홈런 타자의 이정표나 다름없는 30홈런을 한 번도 돌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이런 팀을 단 3년 만에 완벽한 대포 군단으로 바꿔놓았다. ‘노 피어’ 야구를 가장 충실하게 이행한 타자는 멕시코에서 온 용병 카림 가르시아였다. 그는 초지일관 ‘노 피어 스윙’으로 일관하는 타자였다. 배트가 볼에 스치지도 못하는 식의 어이없는 삼진도 종종 당했지만 일단 배트에 공이 맞기만 하면 여지없이 담장을 넘어가는 큰 타구를 만들었다. 로이스터 감독과 함께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롯데에 있었던 가르시아는 3년간 매년 30개가량의 홈런과 80타점 이상의 타점을 생산해냈다. 단 한 시즌도 타율은 3할을 넘지 못했지만 그가 투수들에게 주는 공포감과 위압감은 상당했다. ‘확률은 낮지만 저 선수에게 한 번 걸리면 여지없이 홈런을 맞는다’는 이미지가 투수로 하여금 공격적인 투구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홍성흔의 변화는 더 눈부셨다. 2008년 롯데로 온 홍성흔은 이적 첫해 3할7푼이라는 고타율을 기록하며 두산 김현수에 이어 타격 2위에 올랐다. 그러나 중심타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홈런과 타점은 생산해내지 못했다. 타율은 높지만 한 방이 부족한, 즉 카림 가르시아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선 선수였다.

    타격 2위를 기록한 3할 타자에게 타격 자세를 바꾸라고 주문할 수 있는 감독은 많지 않다. 괜히 타격 폼에 손을 댔다 잘 맞는 타자가 부진에 빠지면 선수도 구단도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로이스터 감독은 이를 과감히 시도했다. 주위에서는 우려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홍성흔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감독의 지원에 힘입은 홍성흔은 엄청난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파워를 키우고, 타구에 보다 더 강한 힘을 싣는 소위 갈매기 타법을 완성했다. 찬스에서 주저 없이 방망이를 힘껏 돌리며 ‘노 피어 스윙’에 주력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홍성흔은 2010년 타율 0.350(2위), 26홈런(공동4위), 116타점(2위)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기록했다. 홈런과 타점은 프로 데뷔 후 최다였고 전체 성적 또한 누가 봐도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다.

    이대호의 선전은 롯데의 불방망이에 정점을 찍었다. 이대호는 2010 시즌에 사상 초유의 타격 7관왕 즉, 타율(3할6푼4리), 홈런(44홈런), 타점(133점), 최다안타(174개), 득점(99점), 장타율(6할6푼7리), 출루율(4할4푼4리)에서 모조리 1위를 석권하며 토종 우타 거포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혔다. 타격 7관왕은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특히 그는 9경기 연속 홈런포를 가동하며 전세계 야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대호는 8월4일 두산전부터 8월14일 기아전까지 9경기 연속 홈런포를 쏘아 올리면서 세계 신기록을 경신했다.

    이대호와 홍성흔뿐 아니라 나머지 롯데 선수들도 로이스터의 ‘노 피어 스윙’을 장착하며 장타력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포수 강민호도 생애 첫 20홈런 고지를 넘어섰고, 손아섭과 전준우도 두 자릿수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로 성장했다. 롯데는 팀 타율, 팀 홈런 등 타격 주요 부문에서 8개 구단 중 독보적인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롯데는 포스트 시즌에서는 또 고비를 넘지 못했다. 두산 베어스와의 준플레이오프가 열리기 전 전문가들은 막강 타선을 자랑하며 페넌트레이스 후반기 승률 1위를 기록한 롯데의 우세를 점쳤다. 뚜껑이 열리자 전문가들의 예상이 들어맞는 듯했다. 롯데가 1,2차전에서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두산은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산은 3차전부터 불펜과 타선의 응집력을 앞세워 내리 세 경기를 따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특히 흐름이 넘어가기 시작한 순간부터 속출한 롯데의 수비 실책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결국 롯데 구단은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했다. 구단 측은 이제는 4강이 아니라 우승을 노릴 때이며 감독의 단기전 운용 능력에 실망했다는 뜻을 밝혔다.

    로이스터 감독과의 이별을 가장 아쉬워한 이는 롯데 팬이었다. ‘꼴데(꼴찌+롯데)’라는 오명을 썼던 팀을 강팀으로 바꿔놓은 외국인 감독에 대한 롯데 팬들의 사랑과 지지는 대단했다. 롯데 팬들은 포스트 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2010년 시즌 후반에 로이스터 감독의 재계약을 위해 직접 나섰다. 부산의 한 신문에 로이스터 감독의 연임을 지지하는 광고를 내는가 하면, 관중석에는 ‘로이스터 감독님의 연임을 지지합니다’라는 영어 문구가 쓰인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기도 했다. 당시 로이스터 감독은 이 일을 추진한 팬 카페에 “광고를 보고 눈물이 났다. 너무 감사하다”는 글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로이스터가 주는 교훈

    1) 리더는 조직원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야구계의 은어 중 ‘노예’라는 말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와 던지는 불펜 투수(중간 계투 요원)들을 일컫는 용어다. 로이스터 감독이 높게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결코 투수를 혹사시키지 않는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로이스터는 선수를 감독이라는 자신의 커리어를 연장하기 위한 장기판의 ‘말’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선수들은 야구를 같이 하는 동반자였다. 몇몇 감독은 자신의 재계약 시즌이 다가오면 성적 조급증 때문에 선수 보호를 생각하기보다 무조건 팀 승리를 위한 운영으로 일관한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단 한 번도 그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부상을 안고 팀을 위해 뛰는 것을 ‘투혼’이라고 칭송하며 박수를 치는 일부 한국 감독과 달리 그는 유일하게 ‘아픈 곳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내게 말하라’고 강조했다.

    다른 팀에서는 뛰어난 구위를 가진 불펜 투수가 3~4일 연속 등판하는 사례가 많다. 불펜 투수가 웬만한 선발 투수보다 많은 100이닝 이상을 소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불펜 투수들에게도 선발 투수처럼 등판일과 휴식일을 구분해줬다. 휴식일을 맞은 불펜 투수는 아무리 1점 차이의 긴박한 승부라 해도 어지간하면 마운드에 올리지 않았다. 국내 감독은 대부분 승부처가 되면 아낌없이 불펜 투수들을 투입해 경기를 이기려 한다. 때로는 선발 투수조차 불펜 투수로 썼다. 물론 이 작전이 잘 맞아떨어지면 해당 팀의 성적은 많이 올라간다.

    하지만 로이스터는 당장의 1승을 위해 향후 투수 운영에 무리가 될 만한 선수 운용은 되도록 피했다. 일부 성미가 급한 팬들은 너무 여유로운 운용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3년 연속 4강 진출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팀을 운용하는 일이 결국 좋은 성적을 낳는다는 점을 입증했다. 롯데 선수들이 “감독님을 위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로이스터 감독과 함께 하는 야구가 즐겁다”라고 이야기한 이유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기자는 2009년 8월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로이스터 감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불펜 투수 혹사 문제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오늘 경기를 이기기 위해 내일 써야 할 선수를 미리 투입한다면, 정작 그 선수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는 그를 기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경기에서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요. 제가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만 한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저는 분명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기 성과를 얻기 위해 장기적 계획을 바꾼다면 아무리 좋은 계획을 가져도 이를 달성할 수 없을 겁니다.”

    2) 리더는 먼저 조직원에게 다가가야 한다

    로이스터 감독은 한국에 오자마자 선수와 코치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통역이었던 커티스 정 역시 교포 출신으로 한국어가 그다지 능숙하지는 않았다. 직책은 감독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 역시‘용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자신이 태어나고 야구를 했던 환경과 너무나 다른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로이스터 감독은 선수들이 자신을 허물없이 대하도록 ‘제리’라는 이름을 부르라고 주문했다. 그가 포수 강민호와 승리 후 펼치는 ‘하마 세리머니’는 로이스터가 어떤 유형의 지도자인지 잘 보여준다. 감독과 선수가 경기 후 손을 맞잡고 서로 얼굴을 들이대면서 크게 입을 벌려 소리치는 행위는 권위를 중시하는 국내 감독들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행동이다.

    ‘단장의 야구’가 아니라 ‘감독의 야구’를 추구하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감독의 권위는 엄청나다. 유교문화의 바탕까지 더해져 선수들은 감독을 지도자이자 어버이와 같은 존재로 여긴다. 물론 여기에는 장점도 많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국내 감독들이 필요 이상으로 감독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내세운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조건 선수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경기 후 하이파이브를 할 때는 언제 어떤 경우에라도 팀의 주장이 가장 먼저 오도록 했으며, 가끔 순서를 착각하고 먼저 나오는 다른 선수들에게 따끔하게 뒤로 가라고 이야기했다. 남보기에 매우 친밀감 있는 하마 세리머니를 같이 하는 강민호와 로이스터 감독이었지만, 사석에서는 따로 만나 사적인 시간을 가진 적이 없을 정도로 로이스터 감독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했다. 그는 단지 선수들이 야구를 더욱 즐겁게 하기를 원했고, 그런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권위가 다소 훼손돼도 상관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3) 리더는 직원들의 단점보다 장점에 주목해야 한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많은 국내 감독은 선수의 장점을 살리기보다는 단점을 보완하는 데 주력한다. 이와 관련, 한국 야구의 전설적 타자인 양준혁 전 삼성라이온스 선수는 2010년 8월 인터뷰에서 “한국 지도자들은 지나치게 정형화된 틀에 선수를 끼워 맞춘다. 물론 탄탄한 기초는 중요하지만 프로에 발을 담근 선수들은 그 자세에 몸이 길들어 있다. 이미 그 자세로 성공했기 때문에 프로에 와 있는 거다. 그러면 지도자가 그 선수만의 개성과 장점을 살려줘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로이스터 감독은 이 점을 잘 이해했다. 그는 특정 자세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선수 개개인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끄집어내려고 애썼다. 교과서적으로만 보면 어떤 선수의 자세가 굉장히 엉성해 보이고 가망성도 없을 것 같지만 이 친구에게 어떤 부분만 추가하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타자가 삼진을 먹고 들어오면 한국 감독들은 조용히 해당 선수를 다음 회에 교체해버릴 때가 많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적극적인 스윙을 했다며 해당 선수에게 박수를 쳐줬다.

    투수들에게도 설사 장타를 맞더라도 두려움 없이 과감한 몸쪽 승부를 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종종 승부처에서 마운드로 올라가 다른 팀 감독과 선수들이 다 듣는데도‘인코스(In course·몸쪽 공)’을 외쳤다. 상대 타자가 그 말을 듣고 몸쪽 승부를 준비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기던 경기를 역전당해 선수단의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짓이냐. 아직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며 덕아웃을 다 부숴버릴 것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에서 실수를 한 선수들이 감독에게 야단을 맞는 모습이 중계카메라에 잡혔던 게 한국 프로야구의 현실이었다. 명장으로 소문난 한 감독은 중계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도 실수한 선수를 무릎 꿇게 한 후 발로 머리를 가격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의 실수에 박수를 쳐주는 외국인 감독의 존재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그야말로 이질적이고 독특했다. 단순히 피부색과 국적이 다른 이방인이라서가 아니다. 로이스터 감독은 감독이 선수단을 장악하고 경기 흐름도 좌우하다시피 하는 한국 야구계에서 드물게 순수한 ‘즐거움의 야구’ ‘선수 스스로가 하는 자율 야구’를 추구한 감독이었다. 이게 바로 로이스터 매직의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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