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자연과 문명의 접합점에서 발견하는 절대 고독

충북 영동

  •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입력2011-11-22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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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 한성기 시 ‘역(驛)’ 전문

    시인보다 시를 먼저 알았다. 시각적으로 단출한 모양 그대로 시는 단순하고도 읽기 쉽다. 군더더기가 없다. 그러면서도 아무렇게나 행(行)만 바꾸어놓고 시인 양하는 ‘못된 시’들과는 전혀 격이 다르다. 짧고 단순하지만 시에 품격이 있다. 더 정서적으로 표현하자면 ‘울림’이 있는 것이다.

    시 한 구절이 모든 표현을 대신한다는 말을 빌리자면 제5연이 그렇다. 절구(絶句)다. 건방진 생각으로는 1, 2, 3, 4연쯤이야 누군들 못 쓸까 싶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 연에서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를 발견하고 나면 절로 탄식이 나온다. 깨달음과 놀람에서 비롯된 울림이 이 구절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데서 갖는 고적감(孤寂感)을 이보다 더 절실하게 드러낸 시가 있는가? 젊은 날, 우연히 이 시를 접하고 내가 가진 느낌이 그랬다. 외로워 죽을 것 같은 심정을 시는 또 이렇듯 무연하게 옮겨주고 있어서 더욱 끔찍하고 놀라웠다. 놀라운 시 구절 하나를 발견하고 나면 괜스레 얼굴도 모르는 시인이 그리워지는 것도 그 젊은 날의 일이었다.

    1981년인지 82년인지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직장 때문에 거처마저 옮겼던 그 무렵 나를 찾아온 글쟁이 친구와 함께 대낮부터 대전천(川) 너머의 허름한 술집을 찾아들었는데, 연로한 한성기 시인이 그곳에 먼저 와 진을 치고 있었다. 예를 차려 인사를 올리니 그이는 반갑다며 합석을 강요했다. 불콰한 낯빛, 웅웅 울리는 음성. 시인은 새파란 소설쟁이 둘을 앉혀놓고는 금세 문학이야기였다. ‘잘못 왔어.’ 막걸리 잔을 비우면서도 나와 친구는 달아날 궁리부터 했으며 그러곤 틈 봐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후 시인은 이태를 더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움과 달아남. 그 이에 대해 내 연분은 이렇듯 몹쓸 것이 돼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더 흐른 뒤 대전시민회관 화단 한쪽에 그이의 시비가 섰는데 그 모양새가 참 어눌했다. 정작 회관 뜰에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큰길 버스 정류장에서 쳐다보면 장승처럼 그것이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비에도 시 ‘역’이 새겨져 있지만 주변 분위기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차마 새로 읽어볼 맛이 나지 않는다.

    적막한 황간에서 병마와 싸우던 시인

    충북 영동군 황간은 예나 지금이나 작은 고을이다. 10년 전 20년 전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적한 가도 양쪽으로 작은 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고 집 나온 개들이 게으른 걸음을 걷고 있다. 시장 모퉁이의 막걸리 집 주모 또한 10년 전 그대로 텃밭에서 딴 풋고추만 달랑 안주로 내놓을 줄 알며, 마을을 휘도는 개울에서는 해질녘만 되면 여전히 피라미 떼가 수면 위로 뛰며 은빛을 튕기는 장관을 연출한다. 변하지 않는 황간. 그래서 언제 찾아가도 정겹다. 하여 나는 거처를 다시 서울로 옮기고도 자주 황간을 찾았다. 강가 매운탕 집에서 바라보는 월유봉(月留峰)이 철따라 날씨따라 모양새를 달리하는 것이 좋고 반야사(般若寺)의 호젓함을 즐기다가 백화산 주행봉을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모양새를 크게 달리한 것이 황간역이다. 작은 성냥갑 같던 전형적인 시골 간이역이 아담한 현대식 건물로 고쳐졌으며 아지랑이 놀던 선로에는 시속 300㎞의 고속열차를 지나다니게 하는 전신주들과 전선들이 어지럽게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시골역 플랫폼에 서면, 한평생 몹쓸 외로움 속에 살다간 시인을 만날 수 있다. 한성기의 시 ‘역’의 무대가 바로 이 황간역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직후 산후병으로 아내가 세상을 떠났는데 둘째, 셋째 딸이 차례로 어미를 따라갔다. 그뿐인가. 시인 스스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깊은 병을 앓았다.

    ‘가장 절망적이면서도 가장 살고 싶었던 때’, 시인은 이 적막한 황간의 산골에 묻혀 병마와 싸웠다. 간혹 약을 구하러 대전에 나가기 위해 역 출입을 했다. 플랫폼의 나무 의자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던 시인, 그가 바라본 조그마한 역은 언제든 있는 듯 없는 듯한 제 자신처럼 외롭고 적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인이 약 봉지를 든 채 거닐었을 황간 거리를 걷는다. 손바닥만한 면 소재지의 외줄기 큰길.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가는 데도 10여 분이면 족하다. 길을 더 나아가 강줄기 휘도는 곳에 이르면, ‘이런 곳에 이런 경치가 있나’ 싶게 홀연 멋진 풍광 하나가 펼쳐진다. 돌올한 산봉과 가파른 벼랑, 그 기슭을 파고들며 유연히 흐르는 청명한 물줄기. 월유봉이다.

    기이하나 삿됨이 없고, 품세가 작으나 그 자체로 넉넉한 이곳 산수는 그 자체로 완미(完美)의 한 폭 그림이다. 봄여름의 경치도 좋지만 늦가을 혹은 눈 내리는 날, 인적 그친 이곳에 서면 그 처연한 아름다움에 자못 가슴이 떨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그 너머편의 강변 오솔길의 운치 또한 아는 이만 알고 있는 비경이 된다.

    황간 중심지로 되나와 977번 도로를 타면, 소문나지 않은 또 다른 명소 반야사 석천계곡과 상주 모동으로 갈 수 있다. 황간고등학교에서 6㎞쯤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편이 상주 방향이며 왼편이 석천 골짜기로 가는 길이다. 충청도 영동과 경상도 상주로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석천 맑은 물줄기는 산협을 통해 상주에서 영동으로 흐르며 그 물줄기를 거느린 큰 산이 백화산(933m)이다.

    ‘한가롭지 말아라’

    먼 거리가 아니니 황간에 온 걸음이면 고개 너머 상주 모동에 가서 황희 정승을 배향한 옥동서원을 둘러보고, 산행의 여유까지 있으면 백화산을 오르면 좋다. 산마루에는 신라 백제의 격전지 금돌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금돌성에서 정상에 이르는 능선 코스는 조망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스릴까지 맛볼 수 있는 자극적인 산길이다. 반대편 황간 쪽의 반야사 입구에서 쳐다보이는 산봉이 백화산 정상 포성봉과 짝을 이르는 주행봉인데 등산객들은 되레 이편을 더 즐겨 찾는다.

    산행을 마다할라치면 신라 성덕왕 때 세워졌다는 반야사를 보고 나와 석천 개울물에 발을 담근 채 아득한 산봉에 걸쳐진 구름이나 쳐다보고 있어도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다.

    이름도 특이한 민주지산(1242m)은 황간의 이웃인 영동군 상촌면에 있다. 경부고속도로 황간 톨게이트 옆으로 난 579번 도로를 이용하면 한 시간 안에 산기슭의 물한계곡에 닿을 수 있다. 황간 월유봉 앞을 흐르는 강물 또한 이 물한계곡에서 비롯된 것은 물론이다.

    1980년대 초, 처음 이 골짝을 찾아가던 때의 기억이 새롭다. 골짜기를 돌고 돌아 한없이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차량은커녕 인적도 만날 수 없었다. 감꽃이 떨어지는 봄날이었는데 정녕 나는 이런 순결한 자연을 본 적이 없었다. 시간여행을 통해 태고로 돌아온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이제 이 계곡과 산도 예전의 그 처녀티는 많이 벗었지만 아직도 꾸밈새 없는 맑은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근래는 맑은 골물을 지키겠다고 골짝 양편에 길게 철망까지 쳐놓았지만 경관의 문제를 떠나서 그 고육지책을 이해할 수 있다. ‘한가롭지 말아라(勿閑)’라는 골의 이름은,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교훈이라기보다 자연이 사람에게 주는 교훈이다.

    민주지산은 충북 영동, 경북 김천, 전북 무주에 걸친 큰 산으로 각호산, 석기봉, 삼도봉으로 이어지는 8㎞의 주능선의 위용이 장쾌하다. 산행 기점은 물론 유원지 입구의 신암골이다. 또 다른 산행 기점의 하나인 도마령은 영동과 김천의 접경이 되는 고갯마루인데 황간에서 도마령에 이르는 49번 국도는‘한국의 아름다운 길’의 하나로 뽑힐 만큼 그 주변 경치가 어여쁘다. 특히 길가의 억새가 물결처럼 출렁이고 가로수로 심은 감나무에 붉은 감들이 가지가 부러져라 주렁주렁 달리는 늦가을의 경관이 일품이다.

    ‘십승지지’에 보태고픈 영국사 둘레

    덕유산에서 시작한 금강은 무주를 거쳐 금산의 적벽을 지나고 이어 영동 호탄으로 흘러든다. 금강의 전체 수역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데가 바로 적벽-호탄-송호리 구간이다. 천태산과 갈기산 사이로 빠져나온 강물은 송호리에 이르러 아연 넓어지며 물가에 송림과 뽀얀 모래밭을 펼쳐놓는다. 이 강물은 조선시대의 악성 박연 선생의 사당 앞을 흘러 심천을 통과한 뒤 대전, 옥천 사이의 대청호로 흘러든다.

    영동군 양산면 호탄리 금강 가에 살던 심씨 노인은 재작년 가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이 깊어졌을 때 그는 집을 나서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녔다. 너른 세상을 구경하고 아울러 약초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일 년 넘어서 집으로 돌아온 그가 내게 말했다.

    “어딜 가든 여기보다 좋은 곳이 없더군요.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겠다 싶어 돌아왔습니다. 저 위쪽 얕은 데가 보이지요? 초등학교 다닐 땐데 어느 날 저기를 건너다가 엄마가 사준 고무신 두 짝을 떠내려 보냈지 뭡니까. 너무 귀하고 아까운 것이어서 차마 제대로 신고 다니지도 못한 것이었는데. 강물이 줄어든 뒤 소를 끌고 저 아래쪽으로 갔다가 모래톱에 그대로 곱게 얹혀 있는 고무신을 찾았지 뭡니까. 희한하지요. 몇 해 뒤 어머니가 강물에 쓸려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시신도 그 모래톱에서 찾았답니다.”

    껄껄,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노인을 보며 나는 그가 병마마저 다 떨친 줄 알았다. 단지 그는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뿐임을 안 것은 뒤늦은 그의 부음을 들은 뒤였다.

    이곳 호탄에서 옥천 방향으로 십여 리 찻길을 달리면 천태산 영국사로 가는 진입로를 만난다. 요즘은 찾아오는 이가 많아서 예전보다 호젓한 맛은 덜하지만, 주차장에서 천년 거목의 은행나무가 있는 영국사 절간까지의 그 길고도 예쁜 산길은 여느 절간 초입에서 쉬 만날 수 없는 정겨운 길이기도 하다. 맑은 물길이 산길을 따르는 곳곳에서 폭포와 돌탑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기슭에서 벌써 산중의 깊은 맛까지 흠씬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가쁜 숨을 쉬며 오른 고갯마루에서 마주하는 뜻밖의 풍경!

    산모롱이 에움길 돌고 돌아

    천태산 망탑봉

    석상 위에 올려져 있는 망탑

    절을 등지고

    달뜨는 소리 듣는가

    산이 그리워 돌 속에 뿌리를 박고

    산 속에 살았지만

    길길이 마을을 바라보고 서 있다

    -양문규 시 ‘망탑(望塔)’ 중에서

    천태산이 좋아서 아예 천태산 절 마을에 삶의 뿌리를 내린 시인은 어느새 이 산길에서 빤히 올려다보이는 ‘망탑’한테서도 속리(俗離)와 속간(俗間)의 경계에서 이편 세상과 저편 세상을 함께 그리워하는 속내를 읽고 있다.

    자연과 문명의 접합점에서 발견하는 절대 고독
    최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 동 대학 교육대학원 석사

    197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현 고려대문인회 회장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그물의 눈’ ‘식구들의 세월’ 등

    장편소설 ‘서북풍’‘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화담명월’등


    산중인데 산중이 아니다. 절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절이 있다. 밖에서 보면 도무지 사람 살 만한 데가 아닌 성싶은데 다락 논이 있고 동리가 있다. 영국사 둘레의 지세가 이렇게 기이하다.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에 새로운 땅을 보탤 수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곳을 추천한다. 천년 고목 은행나무가 절 앞에 버티고 있어서 한편으로 절은 더욱 작아 보이지만 산과 절은 서로를 부추기고 쓰다듬기에 더함도 덜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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