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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⑤

자연과 문명의 접합점에서 발견하는 절대 고독

충북 영동

  •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자연과 문명의 접합점에서 발견하는 절대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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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 한성기 시 ‘역(驛)’ 전문

시인보다 시를 먼저 알았다. 시각적으로 단출한 모양 그대로 시는 단순하고도 읽기 쉽다. 군더더기가 없다. 그러면서도 아무렇게나 행(行)만 바꾸어놓고 시인 양하는 ‘못된 시’들과는 전혀 격이 다르다. 짧고 단순하지만 시에 품격이 있다. 더 정서적으로 표현하자면 ‘울림’이 있는 것이다.

시 한 구절이 모든 표현을 대신한다는 말을 빌리자면 제5연이 그렇다. 절구(絶句)다. 건방진 생각으로는 1, 2, 3, 4연쯤이야 누군들 못 쓸까 싶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 연에서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를 발견하고 나면 절로 탄식이 나온다. 깨달음과 놀람에서 비롯된 울림이 이 구절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데서 갖는 고적감(孤寂感)을 이보다 더 절실하게 드러낸 시가 있는가? 젊은 날, 우연히 이 시를 접하고 내가 가진 느낌이 그랬다. 외로워 죽을 것 같은 심정을 시는 또 이렇듯 무연하게 옮겨주고 있어서 더욱 끔찍하고 놀라웠다. 놀라운 시 구절 하나를 발견하고 나면 괜스레 얼굴도 모르는 시인이 그리워지는 것도 그 젊은 날의 일이었다.

1981년인지 82년인지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직장 때문에 거처마저 옮겼던 그 무렵 나를 찾아온 글쟁이 친구와 함께 대낮부터 대전천(川) 너머의 허름한 술집을 찾아들었는데, 연로한 한성기 시인이 그곳에 먼저 와 진을 치고 있었다. 예를 차려 인사를 올리니 그이는 반갑다며 합석을 강요했다. 불콰한 낯빛, 웅웅 울리는 음성. 시인은 새파란 소설쟁이 둘을 앉혀놓고는 금세 문학이야기였다. ‘잘못 왔어.’ 막걸리 잔을 비우면서도 나와 친구는 달아날 궁리부터 했으며 그러곤 틈 봐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후 시인은 이태를 더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움과 달아남. 그 이에 대해 내 연분은 이렇듯 몹쓸 것이 돼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더 흐른 뒤 대전시민회관 화단 한쪽에 그이의 시비가 섰는데 그 모양새가 참 어눌했다. 정작 회관 뜰에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큰길 버스 정류장에서 쳐다보면 장승처럼 그것이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비에도 시 ‘역’이 새겨져 있지만 주변 분위기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차마 새로 읽어볼 맛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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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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