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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기다림과 그리움의 끝을 향한 행로

익산 김제

  •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기다림과 그리움의 끝을 향한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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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모악을 넘어

세상을 이기러 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발자국마다

늦게 눈이 녹고

올해도 핏빛 진달래는



눈부시게 나부낀다.

- 김용택 시 ‘모악산은 모악이다’

부분

석가모니 부처의 세상이 다한 뒤 이 세상을 제도하는 부처가 미륵이다. 질병도 고통도 없는 그 영화로운 미륵 세상의 이름이 곧 용화세계다. 수천 년 세월 동안 우리네 민초들이 미륵을 받들면서 미륵 오시는 때를 기다린 것도 모두 현재의 고단과 간난 때문이었다. 모악산(母岳山) 기슭의 큰 가람 금산사는 미륵 부처의 전당이다. 따라서 익산의 용화산과 함께 김제의 모악산은 우리네 미륵신앙의 홈그라운드가 되는 영험한 산이 다.

앞의 시에서 김용택 시인은 모악산을 가리켜 ‘제 살을 허물어 사람을 키우고’ ‘제 피를 흘려 풀뿌리를 적시는’ 산이라면서 그 역사성과 민중성을 여실히 드러내지만 나는 이런 엄숙한 이야기는 잠깐 접어둔 채 발걸음 가볍게 산길로 들었다. 핏빛 진달래가 피기는커녕 낙엽도 다 진 늦가을, 청승맞게 찬비까지 내리는 날이었다.

등산로는, 절을 지나 절을 버린 데서부터 시작된다. 심원암까지는 완만한 산책길. 도중에 갈림길이 있지만 표지판이 있어서 혼동할 염려는 없다. 암자를 지키던 스님마저 빗소리 좇아 큰절로 가신 것일까. 헛기침을 해보지만 인기척이 없다. 절 뒷마당으로 돌면 무성한 시누대 울타리를 만나고 그곳의 개구멍 같은 통로 끝에 다시 등산로가 이어진다.

제 피 흘려 풀뿌리 적시는 모악산

아연 산길이 가팔라진다. 비옷을 걸친 탓에 금세 땀이 난다. 20여 분 만에 능선 안부(鞍部)에 선다. 장군대다. 높은 데 올랐건만 비안개 덕에 그럴싸한 조망은 얻질 못한다. 정상으로 가는 오른편 길을 따라 오르면 또다시 시누대 무리를 만난다. 예사의 산죽들 모양 키 낮은 것들이 아니어서 우중 산행에서는 웬만큼 성가시기도 하다. 그렇지만 댓잎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만으로도 홀로 모악을 찾아든 감상은 오롯이 할 수 있다. 그리고 산길에 도열한 이 푸르고 날카로운 잎새들이 가지는 위의(威儀)와 함께 모악의 정한을 생각해볼 겨를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이 자연에 덧칠한 감상이면 어떠랴. 물상의 의인화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미륵 용화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이 산에 크고 높은 가람을 세우고 기구를 올린 내력도 결국은 그런 감정이입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었다. 탐관오리와 외세를 무찌르고자 떨쳐 일어난 동학도들이며 개세(蓋世)의 웅지를 품었던 정여립과 강증산이 이 산을 정신적 의지처로 여겼던 연유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산이 사람들을 키웠으며 그들이 세상을 이기기 위해 눈 덮인 산을 넘어갔다는 시인의 감개는 전혀 지나친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산을 찾고 강을 만나는 이들은 자연의 즉물적인 미감만 취할 것이 아니라 앎의 안목을 보태어 내재의 미감까지 얻어 느낄 줄 알아야 하는 법, 그렇게 보면 모악산은 산 스스로 넉넉한 탓에 만학천봉이며 기암괴석은 차라리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산은 위로 오를수록 더 깊어지는데

나는 저 아래 도시에서

한 뼘이라도 아파트 평수를 늘리려고

얼마나 얕은 물가에서 첨벙대기만 했던가

세상을 휘감고 흐르는 강물로 되지 못하고

하릴없이 바짓가랑이만 적셔 왔던가

-안도현 시 ‘모악산을 오르며’ 부분

같은 시대를 사는 같은 연배의 두 시인이 산 하나를 두고 가지는 생각은 이렇듯 다르다. 앞의 시가 심각하고 씩씩하다 싶으면 뒤의 것은 수줍고 살갑다. 이는 대상에서 가지는 느낌을 ‘우리’로 확대하는 것과 ‘나’로 축소하는 데서 오는 차이다.

더욱 굵어지는 빗줄기, 앞을 가늠할 수 없게 하는 비안개 그리고 동행 하나 없다는 적요감이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만 이런 시들이 거들어주는 탓에 크게 힘든 줄은 모른다. 그러곤 위의 시에 있는 시구처럼 ‘조금만 더’ ‘저기까지만 더 가보자’ 하다가 이윽고 정상 어귀에 서고 만다. 이제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일밖에 없지만, 산꼭대기 돌멩이를 디디고 서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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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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