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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환상의 출처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21세기 환상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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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적인 소설’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 격인 이 작품의 제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는 ‘돈키호테’의 저자는 16세기 스페인의 마드리드 근처에서 살았던 미겔 데 세르반테스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이 작품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제목은 ‘돈키호테’의 저자가 세르반테스가 아니라 메나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제목을 읽는 순간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대상 앞에서 잠시 망설이게 된다. 이때의 망설임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사실, 진리)를 교란하고, 나아가 전복시키는 작가의 의도를 수락하고 수용할 것인지, 그리하여 작가가 인도하는 작품 속으로 들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의사 결정 과정이다. 또한 이때의 망설임은 ‘소설’에서 ‘보르헤스적인 소설’로 넘어가는 관문(關門)의 문턱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세상의 독자는 이 망설임의 문턱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 문턱을 넘어 성큼 안으로 들어서는 자와 결연히 돌아서는 자. 한계를 해체하고자 하는 부류,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족속들은 전자로, 그들 앞에는 ‘환상’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보르헤스적인 소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 … 그 어떤 육각형 진열실에서도 위에 있는 층들과 아래에 있는 층들이 무한하게 보인다. … 좁은 복도에는 거울 하나가 있는데, 그 거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복제한다. 사람들은 이 거울을 보고 ‘도서관’은 무한하지 않다고 추론하곤 한다(만일 실제로 무한하다면 무엇 때문에 복제라는 눈속임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 반짝거리는 거울 표면이 무한함의 형태이며 약속이라고 꿈꾸고 싶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바벨의 도서관’(‘픽션들’ 수록) 중에서

이쯤에서 보르헤스적인 ‘환상’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비현실 또는 초현실적인 것(마술, 환상)’, 또는 모든 소설의 본질에 해당하는 ‘헛것(illusion)’의 창출과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곧, 이미 알려진 인간이든 익명이든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는 전기를 가짜로, 또 그 사람의 행적 일부를 부연 설명하는 주석을 가짜로 꾸며내는 것. 또한 죽음이나 문학(소설), 철학처럼 ‘형이상학적 관념 세계를 구체화하려는 작업’. 한마디로 보르헤스적인 소설 또는 환상(픽션)이란 가짜 전기, 가짜 주석, 관념의 구체화 또는 탐구 과정으로 요약되며, 이 모두는 도서관의 책들에서 출발한다.

보르헤스의 삶과 소설은 도서관과 따로 떼어놓고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파리, 제네바, 마드리드 등 유럽에서 교육받았고, 영어 및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도서관 사서로 출발해 국립도서관장 자리에 오른 보르헤스는 평생 도서관의 책을 섭렵하면서 시력을 잃어갔고, 인생 후반기에는 그가 평생 흠모했던 제임스 조이스처럼 실명(失明)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보르헤스의 환상이란, 보이는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에 구체성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절체절명의 창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나는 젊은 시절 여행을 했다. 나는 한 권의 책, 아마도 편람 중의 편람일 책을 찾아 돌아다녔다. 이제 내 눈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고, 나는 내가 태어난 육각형의 방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바벨의 도서관’(‘픽션들’ 수록) 중에서

세상에는 소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보르헤스적인 소설’이 있다. ‘보르헤스적인 소설’이란 ‘보르헤스적인 환상’과 이음동의어이고, 21세기 세계 문화의 핵심 코드인 혼종성의 기원이며, 2000년대 맹활약하는 일군의 한국 젊은 작가들이 지향하는 소설 세계의 원형(原型), 곧 출처(出處)다. 20세기 말(1994년) 미 서부 텍사스 주에서 스페인 문학을 전공한 황병하의 번역문으로 소개됐던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나를 비롯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제시하려는 한국의 젊은 소설가들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만큼 오랫동안 서가의 중심을 차지했다. 이번에 라틴아메리카 콜롬비아에서 스페인 문학을 전공한 송병선의 번역문으로 새롭게 소개된 ‘픽션들’은 21세기 한국의 작가와 독자에게 새로운 소설 미학을 열어줄 것이다.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신동아 201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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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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