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와 만수천 풍경
승용차를 이용하는 경우, 88고속도로의 지리산나들목을 나오는 것이 이편으로 가는 손쉬운 길이 된다. 인월면을 통과한 뒤 60번 도로로 옮겨 타면 곧 만수천 상류다. 가까운 뱀사골을 둘러보고 산내로 나와 하천을 따라 내려가면 실상사가 있는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닿는다.
개울에 걸린 해탈교를 건너면 먼저 장승 두 기가 찾아오는 이를 반긴다. 원래는 다리 이편에도 한 쌍의 장승이 있었는데 1963년 홍수 때 떠내려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홍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5년 전인가 내가 다시 찾았을 때도 다리 이편 마을은 그해의 만수천 범람으로 입은 생채기가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실상사 절간은 멀쩡했다. 마을 편에서 보면 절간의 입지가 마을보다 결코 높아 보이지 않는데도 그렇다. 묘한 착시현상이 이곳에서도 일어난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도 가장 먼저 개찰(開刹)된 실상사는 들판 가운데 앉은 절이다. 따라서 산간의 절집과 같은 변화 있는 모양새는 아니다. 그러나 절간에 들어서기 직전 몸을 돌려 남쪽을 바라보면 유서 깊은 절이 왜 이곳에 앉았는지 짐작되는 바 없지 않다. 천공을 향해 우람히 치솟은 천왕봉이 정면으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실로 장엄한 이 거대 산봉을 이곳에서처럼 뚜렷하게 대면할 수 있는 자리가 달리 없다.
신라 흥덕왕 3년(828) 때 세워졌다는 실상사 또한 여러 차례 소실과 복원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두 기의 잘생긴 석탑이 있으며 탑 사이에는 꽤 덩치가 큰 석등이 서 있다. 석등에 불을 켜는 일을 위해 돌계단을 붙여놓은 게 이채롭다. 실상사에서도 소문난 명물 둘은 약사전의 철재여래좌상과 보광전의 범종이다. 보는 이를 단번에 압도해버리는 거구의 철불은 특이하게도 맨땅에 좌정하고 있다.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지기(地氣)를 붙잡아 누르기 위해 그렇다는 속설이 있다. 듬직한 얼굴, 당당한 가슴, 불쑥 나온 배…. 마주하는 이의 마음까지 넉넉하게 해주는 근사한 불상이다. 보광전 범종 겉면에는 꽤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일본 국토의 형상이라고 믿고 있다. 절터를 잡을 때부터 풍수학적 고려가 있었다는데 이렇듯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절의 한 특색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실상사를 일본의 대항마(對抗馬)로 하는 상징체계가 자연스럽게 민간에 생겨났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근래는 불교의 사회참여 방식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실상사가 부각되었다. 불살생(不殺生) 실천의 농장공동체 운동, 대안학교 운영 등이 그 예다.
이른 아침 다시 절집을 둘러보고 나온 나는 문 앞에 선 채로 천왕봉을 쳐다보며 심호흡을 한다. 구름에 가려 꼭대기의 형체는 드러나지 않지만 저 높은 곳에도 내가 디뎠던 돌과 흙이 있음을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봄과 아래에서 쳐다봄이 이렇게 판이하다. 그리고 절 문 앞에서 나눠지는 세 갈래 흙길을 본다. 산으로, 들판으로, 마을로 가는 길이 분명한데 하필이면 그것이 절 문 앞에서 그러하니 괜스레 마음이 쓸쓸하다.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지나온 발자욱 역시 눈에 가리웠으므로
나는 어디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한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바람은 바삐바삐 지나가 버리고
눈을 쓴 댓잎의 손가락은 너무 많아
그 방향을 가늠할 수는 없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한 발 한 발 찍은 생각들은
거친 눈보라로 날려가 버리고
어쩌다 손바닥 위에 놓인 생각들은
눈처럼 녹아버려 그 온기를 잡을 수 없다.
實相은 정말 있는가.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흰 눈에 갇혀
눈감은 것처럼 어두운 저녁.
마음의 집을 허물어 버리고
절 한 채를 들여놓는다.
- 김규진 시 ‘실상사 가는 길.1’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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