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의 원림(園林)과 정자를 이야기하면서 소쇄원, 식영정 등 소문난 몇 군데만 언급할 수는 없다. 담양 땅에는 가사문학관 근처뿐만 아니라 곳곳에 유서 깊고 아름다운 정자들이 흩어져 있다.
배롱나무 꽃 대궐로 이름난 명옥헌은 호남고속도로 창평나들목을 나오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물론 담양에서 광주호로 가는 국도에도 표지판이 나온다.
정말이지, 나는 그때까지 배롱나무가 뭔지 몰랐다. 배롱나무가 나무 백일홍의 본래 이름이란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 어릴 때 내가 살던 곳에서는 도무지 이 말이 없었던 탓이고, 훨씬 뒷날에 더러 배롱나무란 표기를 보면서도 이런 나무가 따로 있는가보다, 하고 그냥 무심히 지나쳐왔다.
배롱나무뿐인가. 그 사이 여러 차례 소쇄원을 다녀오면서도 나는 명옥헌을 몰랐다. 사람들이 소쇄원이 있는 줄 몰라 턱없이 한적하던 때, 소쇄원 제월당 시원한 마루에서 낮잠까지 한숨 자고 나오던 때에도 이 정원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길가 간판 하나를 보곤 불현듯 길을 달리해 명옥헌을 찾아갔다. 그곳이 배롱나무 꽃 천지일 줄이야! 야산을 넘고 논 가장자리를 돌아 다다른 작은 마을.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늘어뜨린 그늘에 차를 세웠다. 사과나무 이파리마다 뽀얀 소독약을 묻히고 있는 과수원의 옆길을 따라 걸을 때에도 햇살은 따가웠다. 여름이었다. 옥수수 밭이 있는 둔덕을 넘어서자 아연 연분홍 꽃의 세상. 명옥헌이 자리한 딴 세상이 그렇게 골 안에 펼쳐져 있었다.
배롱나무 꽃들의 세상
정원을 만들고 다듬은 이의 고요하고도 사치스러운 심성이 쉬 손에 잡히는 듯했다. 가지마다 꽃등을 단 커다란 배롱나무들이 둘러선 연못은 사람의 손길을 오래 맞지 않은 듯 규모에 걸맞지 않게 태고의 적막 같은 것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연못이 아래 위 둘이나 있는데 가운데 통행로를 지나면 마루 높은 정자 한 채가 오도카니 바위덩이를 올라타고 있다.
정자 마루에 앉아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 꽃무리와 그 사이로 비치는 초록 물빛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좋아라, 옛사람이여. 아침저녁으로는 짧은 낚싯대 하나 들고 물가에 앉아 분분히 수면에 떨어지는 꽃잎이나 희롱하고, 소나기 내리고 천둥 우는 때는 정자 마루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골에 피는 물안개나 지켜보면 그만, 그밖에 달리 탐하고 샘낼 것이 무엇 있으랴.
꽃의 헌사로움과 물의 적요가 소리 없이 어우러져 절묘한 풍광 하나 빚어내는 데가 곧 명옥헌이다. 그런 탓에 한 다감한 시인이 ‘완전한 사랑’을 운위하며 자못 위험스레 ‘목마름의 절벽’과 ‘산산이 깨어지는 물방울’을 부르고 있어도 그 계절, 그 꽃등 아래를 걸었던 이로서는 십분 그 감정에 동참하고 싶기도 한 것이다.
생이 아름다운 때가 있다면
필시 저런 모습일 게다.
(중략)
완전한 사랑이란 이를테면 그
소나기 같은 것일 게야
목마름의 절벽에서 비류직하(飛流直下) 하며
산산이 깨어지는 물방울
몸과 마음의 경계를 깨끗이 지우는 일
몸도 잊어버리고 몸이 돌아갈 집도 다 잊어버리고
그게 우수수 목숨 지는 것인 줄 다 알면서도
여름 내내 명옥헌 꽃 지는 배롱나무
여자의 환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 이지엽 시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부분
배롱나무의 작은 꽃들은 다투듯 계속피고지고 해서 그렇게 가을이 무르익어갈 때까지 핀다고 한다. 담양 현지에서는 배롱나무를 ‘쌀밥나무’라고 더 많이 부르는데 쌀밥나무가 초복에 한 번 피고 중복에 두 번 피고 말복에 세 번 피면 나락이 팬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나무의 ‘쌀밥’이 ‘여자의 환한 눈물’로 바뀌는 자리가 곧 현실의 눈과 시의 시선이 교차하는 자리임도 여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명곡 오희도가 외가가 있는 이곳에 와서 독서하던 것을 기려 그의 넷째 아들 오이정이 정자를 세우고 연못을 파서 별장으로 꾸민 것이 명옥헌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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