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그콘서트의 꽃거지’.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거지의 이 말에 멀쩡하게 생긴 아가씨가 지갑을 뒤적여 500원을 준다. 궁금하면 못 참는 거다.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고 나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한동안 그게 싫었습니다. 원래 얘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무슨 역사학자가 옛날얘기나 하는 사람인 줄 아느냐, 이렇게 생각했지요. 귀여운 자부심? 지금 보니 재미있는 얘기 해달라는 분들이 맞았습니다. 역사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 안타까워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처음 그걸 시도했습니다.”
한편 폴 벤느는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이상길·김현경 옮김, 새물결, 2004)에서 “역사는 첫째 진실의 축적이고, 둘째 줄거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에게 해달라던 이야기나, 역사학자인 나를 보고 해달라는 이야기는 같다. 특히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게 공통점이고, 그것의 근원은 호기심이다. 벤느의 말을 빌리자면, 호기심은 ‘인식하고 서술하는 주체’인 역사가의 ‘주관성’이라는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자칫 역사가의 (종종 욕망과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호기심에 역사서술이 종속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해 비판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호기심이란 ‘인류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지적인 활동’이다. 역사가의 ‘역사 쓰기’뿐 아니라 독자의 ‘역사 읽기’ 또한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에 의해 이루어진다. 벤느의 생각에 이 호기심은, 사회적인 요인들, 예를 들어 역사가의 사회적 위치, 이해관계, 이데올로기, 독자의 계급성 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사무욕(無私無慾)’한 인류학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국가든, 전쟁이든, 동성애든, 음악이든 무엇이든지 역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이 호기심이라는 인간의 속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질문
호기심은 곧 질문으로 이어진다. 궁금하면 묻는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답이 나오는 질문과 답이 없거나 많아서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질문이 그것이다. 수학은 답이 나오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오랫동안 못 푼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걸릴 뿐이지 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에 비해 인생의 많은 질문은 답이 없거나 여러 가지 답이 얽혀 있어서 어느 것이 답이라고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랑이 뭔지, 인생이 뭔지, 더 구체적으로 나는 왜 그녀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는지, 하루하루가 왜 이리 팍팍한지 등등.
답이 떨어지는 질문은 그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답이 없거나 여럿인 질문은 질문이 질문을 낳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어쩌면 답이다. 질문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마치 스님들이 수양하면서 들고 있는 화두(話頭)처럼. 아니, 그게 화두일 것이다. 불가(佛家)에만 화두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선가의 깊은 경지를 감히 짐작할 바는 아니나,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꾸준히 남아서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의식, 풀려고 늘 지니고 다니는 문제의식이 넓은 의미의 화두가 아닐까 한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갖는 질문도 그런 화두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공부란 답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질문을 잘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호기심이 질문을 낳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라도 질문을 잘 다듬어야 한다. 질문을 잘하는 것, 이게 모든 탐구의 첫 관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심

송시열(1607~1689·왼쪽), 그리고 윤휴(1617~1680). 조선시대에 주자(朱子)의 주석과 다른 해석을 냈던 윤휴. 조선 사람들은 논쟁을 했을지언정, ‘주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는 저지르지 않았다.
이를 건강한 회의주의(懷疑主義)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회의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간과되어온 질문을 제기하고, 공인된 답을 새로이 조망하고, 증거를 세심하게 재검토하는 자세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학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책이 현실을 재단하던 시절!…조선의 사대부들은 제 손으로 책을 고르지 못했고, 주어진 책은 도무지 버리지를 못했다.…주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가 멀쩡히 자행되어서는 만만 안 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를 두고 했던 통탄이다. 실제로 나는 이 ‘통탄’의 배경이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이 일이 언제, 누구의 일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몇 차례 그분에게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성사되지 못했다.) 추론컨대 문맥으로 보아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정조(正祖) 이전인 것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건 확실했다. 아마 백호(白湖) 윤휴(尹?)에 대한 서술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근사하리라 생각한다. 조선 성리학에 대해 ‘정통과 이단’의 투쟁이라는 인상을 갖게 했던 미우라 구니오(三浦國雄)의 논문이 나온 이후, 곧잘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윤휴의 논쟁을 두고 위와 같은 인식에 바탕을 둔 서술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