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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n Sports - 마지막회

김응용 한화이글스 야구단 감독

8년 만에 현장 복귀한 한국 야구계의 살아 있는 역사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김응용 한화이글스 야구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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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랑이의 발톱은 잠깐 감춰져 있었을 뿐 없어진 게 아니었다. 71세의 야구계 원로가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며 그라운드로 복귀했다. 감독으로 10회, 야구단 사장으로 2회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야구인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 바로 김응용 한화이글스 신임 감독이다. 야구인 출신으로는 사상 최초로 야구단 사장에 올라 6년간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하던 그가 사장보다 서열이 낮은 감독직을 불사하면서 하위 팀의 현역 감독으로 돌아왔다. 전무후무한 우승 경력을 가진 김 감독이 한화이글스에서 우승 트로피를 또 들어 올릴 수 있을지 한국 야구계의 모든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다.
김응용   한화이글스 야구단 감독
흔히 세상에 태어나 꼭 해볼 만한 직업으로 프로야구 감독, 해군 제독,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꼽는다. 특정 조직에서 무지막지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리더가 된다는 일이 그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감독 자리는 고작 8개뿐이다. 내년에 프로에 입성할 NC다이노스까지 합해도 고작 9개. 이 9명의 감독 중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감독은 더더욱 적다. 이런 상황에서 22년간 프로야구 감독으로 재직하며 무려 10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응용 한화이글스 감독이다.

그는 KIA 타이거즈의 전신인 해태타이거즈 감독으로 9차례, 삼성라이온즈 감독으로 1차례 등 총 10차례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는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연패기록도 달성했다. 그가 감독을 맡았던 지난 22시즌 동안 거둔 성적은 통산 2653경기, 1463승65무1125패, 승률 0.565다. 한국 프로야구 최장수·최다승 사령탑이기도 한 김 감독은 이런 유례없는 성과를 바탕으로 야구인 사상 최초로 야구단 사장직에도 올랐다.

김 감독은 현재 가장 젊은 야구감독인 김기태 LG트윈스 감독(43)보다 무려 28세 위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가 야구인으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들뻘인 다른 감독들과 겨루기 위해 감독직에 복귀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 감독이 1년도 버티기 힘들다는 감독직을 그토록 오래 유지하면서 계속 우수한 성적을 낸 비결은 강력한 카리스마, 뛰어난 위기관리 및 커뮤니케이션 능력, 팀워크에 대한 철저한 신봉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감독 시절 아무리 스타급 선수라 해도 성의 없는 플레이나 팀워크를 해치는 행동을 하면 “영양가 없는 타자”라거나 “정신병자”라는 험한 말을 쏟아냈다. 심판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코끼리처럼 그라운드에 등장해 육탄전도 불사했고, 덕 아웃에서는 의자나 방망이를 예사로 부수곤 했다. 선수들의 동요를 막으면서 결속력과 경기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고도의 노림수였다.



그는 또 팀이 연패에 빠졌을 때는 비판과 지적을 자제하고, 연패에서 탈출할 때 심한 질책을 하는 심리전의 대가이기도 했다. 구단주를 비롯한 선수단 외부의 입김이 아무리 세도 철저히 자기 선수를 보호하는 뚝심도 지녔다.

요즘 세대의 눈으로 보면 그는 모든 면에서 투박한 리더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요령과 수완이 아니라 성실과 땀방울을 소중하게 생각해 야구인으로서는 독보적인 커리어를 일궜다. 그는 2010년 사장직에서 은퇴하며 기나긴 야구 인생을 마감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장 은퇴 2년, 감독 은퇴 8년 만인 2012년 10월 최근 몇 년간 한국 야구계의 최하위 팀으로 전락한 한화이글스의 감독을 맡아 화려하게 현장에 복귀했다. 무엇이 이토록 오랫동안 그를 그라운드 위에 묶어두는 것일까. 왜 야구계는 많은 젊은 감독을 놔두고 산전수전 다 겪은 그를 감독으로 원하는 것일까. 김응용 감독의 리더십 요체를 탐구해보자.

한일은행의 코끼리

김 감독은 1940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했다. 6·25전쟁에 맞닥뜨린 소년 김응용은 1951년 1·4후퇴 당시 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한 뒤 남한에 정착했다. 이때 만든 호적에 나이가 한 살 적게 올라가는 바람에 주민등록상 1941년생이 됐다.

소년 김응용은 어릴 때부터 다른 소년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거구였다. 신체 골격도 남달랐던 데다 한 살 어린 동급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으므로 골목대장을 도맡아 했다. 운동 재능도 뛰어나 처음에는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야구 선수가 된 것은 부산 개성중학교 1학년 때 학급대항 야구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 우월한 신체조건을 가진 그는 출전 첫날부터 투수에다 4번 타자까지 겸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바로 다음 날 야구부 선수로 정식 스카우트됐다. 야구부 선수에게 주는 푸짐한 밥과 간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는 것이 김 감독의 회고다.

고인이 된 김 사장의 부친 김식영 씨는 당시 같은 학교의 서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처럼 아들의 입신양명을 바랐던 그의 부친은 야구에 빠져 공부를 등한시하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아버지는 “야구를 그만두라”고 종용했지만 소년 김응용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그럼 학교에 안 가겠습니다”라고 대들며 3일을 버텼다. 결국 아버지도 백기를 들고 말았다.

야구 명문 부산상고를 졸업한 김 감독은 1961년 실업야구팀인 한일은행에서 선수로서 전성기를 보냈다. 당시 한일은행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업야구의 최강자였다. 선수 시절 김 감독은 홈런 타자였다. 1965년과 1967년에는 실업리그에서 홈런왕도 차지했다. ‘코끼리’라는 김 감독의 별명도 그때 생겼다. 유독 큰 체구(185㎝ 95㎏)의 김 감독이 1루수로 활동하며 조그만 야구공을 받는 모습이 코끼리가 비스킷을 받아먹는 것과 흡사하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었다. 야구계 인사 중에는 지금도 김 감독을 ‘코 감독(코끼리 감독)’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김응용   한화이글스 야구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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