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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n Sports - 마지막회

김응용 한화이글스 야구단 감독

8년 만에 현장 복귀한 한국 야구계의 살아 있는 역사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김응용 한화이글스 야구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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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은 1973년부터 자신이 몸담았던 한일은행의 감독으로 활동하며 지도자 인생을 시작했다. 1977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한국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고, 1980년에는 도쿄 세계 아마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남다른 지도력도 선보였다.

해태 왕조의 황제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지도자 인생도 화려했지만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김 감독은 어느 구단에서도 지도자로 낙점받지 못했다. 그가 한국 실업야구의 간판이자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의외의 결과다.

물론 당시 김 감독이 미국 유학 중이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는 크게 낙담했다. 이대로 지도자 생활을 접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라는 조바심이 들 무렵 해태타이거즈 야구단이 그를 사령탑으로 초빙했다.

‘감독 김응용’의 전성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김 감독은 사령탑 첫해였던 1983년 해태를 한국시리즈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86~1989년, 1991년, 1993년, 1996~ 1997년 등 해태에서만 총 9차례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9번 우승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시리즈 진출=우승’ 공식이다.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상대팀이 누구건 상관없이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우승했다. 한국시리즈 경기 내용도 압도적이었다. 삼성라이온즈와 맞붙었던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는 4승1무2패로 우승했다. 단 2패를 한 것이 가장 나쁜 성적이었을 정도로 해태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모기업인 해태의 가세가 기울어 구단의 지원이 다른 구단보다 훨씬 빈약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 대단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김 감독을 ‘해태 왕조의 황제’로 부르는 이유다.

프로야구가 개막한 1982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야구는 삼성라이온즈와 해태타이거즈 두 팀의 대결 구도로 전개됐다. 삼성과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3차례(1986, 1987, 1993년) 붙은 데다 각각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는 상징성까지 있어 두 팀의 라이벌 구도는 무척 치열했다. 기업 규모로만 보면 삼성과 해태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선수단 지원 규모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외환위기로 해태가 부도를 맞으면서 두 기업의 처지는 더욱 극명하게 달라졌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늘 해태가 삼성을 꺾었다. 게다가 삼성라이온즈가 한국 야구가 전기와 후기로 나눠졌던 1985년의 통합 우승 후 단 한 번의 실질적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자 영남 팬들의 아쉬움과 갈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1등주의’를 표방한 삼성 야구단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이 절실했던 삼성은 결국 1999시즌이 끝난 직후부터 우승청부사 김 감독을 데려오기 위해 집요한 애정 공세를 펼쳤다. 김 감독의 마음도 삼성 쪽으로 굳어졌고, 언론에서도 그의 삼성행을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박건배 해태타이거즈 구단주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박 구단주의 간곡한 설득과 마주했다. 마음을 접은 그는 2000년 시즌 1년 동안 해태에 더 몸담았다.

하지만 해태타이거즈는 더 이상 1980~1990년대 한국 야구계를 호령하던 팀이 아니었다. 선동열, 이종범, 조계현, 임창용 등 주축 선수들의 잇따른 이적으로 팀 전력이 순식간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것은 물론이고, 구단 살림도 빠듯해져 결국 야구단 운영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전락했다. 김 감독도 더 이상 해태타이거즈에 남을 명분이 없어진 셈이다.

적진의 수장 되다

결국 김 감독은 2001년 삼성의 사령탑으로 변신해 푸른색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떠난 지 반 년 만인 2001년 중반 해태 타이거즈는 야구단을 KIA에 매각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 감독의 삼성은 2001년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정규 시즌 3위였던 두산베어스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매번 우승을 눈앞에 두고 놓쳐야 했던 삼성의 악몽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김응용 감독은 자신의 이름값을 했다. 삼성은 2002년에도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고, 한국시리즈에서 당시 ‘야구의 신(野神)’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LG트윈스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삼성 구단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차지했다. 당시 승장 김응용 감독이 패장 김성근 감독을 치하하며 “야구의 신과 싸우는 것 같아 너무 힘들었다”고 했던 말은 지금도 전설적인 어록으로 야구계에 회자된다.

삼성라이온즈는 2004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현대유니콘스와 9차전(한국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현대에 패했다. 이에 김 감독은 그해 말 삼성의 사령탑 자리를 애제자 선동열(48) 현 KIA타이거즈 감독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사퇴했다.

야구인 최초 CEO서 다시 감독으로

삼성 구단은 구단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긴 김 감독의 공로를 인정해 그를 야구단 사장으로 임명했다. 감독에서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한 김 사장은 2005∼2006년 선 감독과 힘을 합쳐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등 사장으로 재임한 6년간 구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이 감독으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선동열 신임 감독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종의 ‘상왕’ 노릇을 할 것이란 우려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경기장의 선수와 코치진을 제외한 야구단의 나머지 모든 업무 즉 구단 운영, 마케팅, 판촉, 구장 운영, 홍보, 선수단 수급, 트레이닝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총칭해 프런트(Front Office)라고 한다. 삼성은 전통적으로 프런트의 입김이 강한 구단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사장으로 취임한 후 일절 현장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김 감독은 2011년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사장과 감독은 각자 다른 역할과 임무를 맡았는데 사장이 감독에게 간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현장을 총괄하는 사람은 오직 감독뿐이며, 감독보다 해당 팀의 야구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나 역시 감독을 할 때 위에서 간섭하는 걸 제일 싫어했는데 내가 사장이 됐다고 간섭하기 시작하면 팀이 어떻게 굴러가겠나”라고 답한 바 있다.

실제 그는 6년간 삼성라이온즈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1년에 선동열 감독과 얼굴을 마주한 것이 서너 번도 안 될 정도로 철저히 선 감독을 배려했다. 까마득한 선배이자 스승인 그를 선 감독이 어려워할까봐 마주치면 오던 길도 돌아가려고 했을 정도다.

프런트의 간섭이 심하던 한국 야구계에서 당시 김응용 사장의 이런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이외에도 그는 기업인 출신 야구단 사장 일색인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사회에서 야구인 출신답게 오랫동안 자신이 현장에서 느낀 문제점과 개선 방향 등을 밝혀 야구계 운영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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