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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술을 풀자 갱단도, FBI도 □을 주목했다

알 카포네와 금주법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술을 풀자 갱단도, FBI도 □을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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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란의 20년대’라는 조어가 있다. 금주법 시대의 미국을 가리킨다. 술을 밀매하는 조직폭력배가 창궐했다. 밀주 판매를 둘러싼 폭력조직 간 살인사건이 잇따랐다. 폭력조직이 벌어들인 검은돈의 일부는 부패 경찰과 관료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새로운 범죄 또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자 갱단은 다른 돈벌이를 모색하는데….

1929년 2월 14일 미국 시카고 북쪽의 한적한 동네 차고에 경찰관 복장을 한 2명과 깔끔한 코트 정장을 입은 5명이 들어섰다.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차고 안에 있던 7명의 남자를 일렬로 세웠다. 불심검문이라고 여긴 남자들이 한 줄로 서자 갑자기 총기가 난사됐다. 드럼 탄창을 장착한 톰슨 기관단총 세례에 7명은 그대로 쓰러졌다. 이른바 ‘밸런타인데이 대학살’이었다.

이탈리아계인 알 카포네는 부하들을 동원해 아일랜드계 경쟁조직 벅스 모런의 조직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주류 밀매권을 둘러싼 암투 끝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시카고 경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큰 진전은 없었다. 총탄 14발을 맞고도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한 피해자마저 “누가 쏘았느냐”는 질문에 “아무도 나를 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조직에 화가 미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몇 시간 뒤 숨졌다. 이윽고 수사를 통해 용의자들이 검거됐지만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모두 풀려났다.

사건 해결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들었다. 알 카포네가 쌓아놓은 거대한 인맥이 움직인 것이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빅 빌’로 불리던 윌리엄 톰슨 시카고 시장도 알 카포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낮과 밤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밤의 대통령이 바로 알 카포네였다.

1927년 알 카포네의 1년 수입은 당시 화폐가치로 1억 달러가 넘었다.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의 시민’으로 선정된 적도 있다. 1931년 탈세 혐의로 체포돼 징역 11년형을 선고받고 애틀랜타 교도소에 갇힐 때까지 아무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1934년 8월 탈옥이 불가능하다는 샌프란시스코 알카트라즈 섬의 교도소로 이송돼 또 한 번 유명세를 치른 그는 1939년 매독을 앓으면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영화(榮華)는 더 이상 없었다. 균이 뇌까지 퍼져 거의 식물인간 상태로 시름시름 앓다 1947년 숨졌다.

알 카포네는 1899년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갱단에 들어갔을 만큼 떡잎부터 노랗던 인물이다. 젊을 때 싸우다가 왼쪽 뺨에 칼을 맞아 큰 흉터가 생겼는데 이로 인해 훗날 ‘스카페이스(scarface)’란 별명을 얻는다. 1919년 갱단 보스 조니 토리오가 성매매 사업 확장을 위해 그를 시카고로 부르면서 알 카포네의 시대가 열린다. 1925년 토리오는 다른 갱단의 습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당하자 손을 털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토리오에게서 조직을 인계받은 알 카포네는 다른 갱단을 힘으로 제압하면서 시카고 암흑가를 장악한다.



두 얼굴의 보스

알 카포네의 활약상은 언론과 미디어에 의해 부풀려진 면이 많다. 물론 갱단의 잔학무도함과 위험성을 널리 알려 연방수사국(FBI) 조직을 키우려 한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공작도 주효했다. 알 카포네는 뉴욕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이다. 시칠리아 출신이 아니면 명함을 내밀기 어렵던 이탈리아 마피아 세계에선 정통파가 아니었다. 실제보다 부풀려진 세간의 평가를 그는 오히려 즐겼다. 기자들을 불러 일부러 과장된 모습을 연출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복장과 차량, 경호원과 미녀에게 둘러싸인 알 카포네는 폭력조직 보스의 모습은 이렇다는 전형을 보여줬다. 훗날 범죄조직을 다룬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갱단 보스는 대개 알 카포네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알 카포네는 범죄행위를 합리화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기자들에게 천연덕스럽게 “나는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사업가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받고 필요한 물건을 파는데 뭐가 잘못됐느냐는 논리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효심 깊은 아들이었으며 가족을 지극히 아끼는 자상한 가장이기도 했다. 또한 무료식당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줬으며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그를 의적(義賊)으로 두둔했다. 밀주, 성매매, 도박으로 돈을 벌던 그가 아인슈타인, 헨리 포드와 함께 당시 시카고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혔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카고가 주류 밀매의 근거지로 떠오른 것은 지리적 이유가 크다. 미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철도교통의 중심지였고, 미시간 호를 끼고 있어 운하를 이용한 수송도 용이했다. 특히 호수를 끼고 캐나다와 접해 있어 금주법 시기에 금주법과 상관없는 캐나다로부터 술을 몰래 들여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뉴욕도 갱이 창궐하긴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집권한 후 많은 이가 배를 타고 뉴욕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맨해튼 남부에 모여 살면서 ‘리틀 이탈리아’라는 거주지를 형성했다. 시칠리아 마피아들도 무솔리니 정부가 대대적인 범죄조직 소탕에 나서자 단속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뉴욕에 갓 도착한 이탈리아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뻔했다. 시칠리아 마피아 갱단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무솔리니의 집권은 뉴욕의 조직폭력 세력이 갑자기 커지게 된 요인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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