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수능시험을 마치고 시험장을 나서는 학생들.
‘착한 의도’에서 출발
수능 개편안이 논의되던 초기에는 수능을 2회 이상 실시하는 복수 시행과 탐구과목 통폐합 등이 함께 논의됐지만 교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고, 유일하게 반영된 것이 수능을 수준별로 분화하자는 아이디어다. 선택형 수능에서는 국어, 수학, 영어가 각각 쉬운 A형과 어려운 B형으로 나뉘고, 문과는 ‘수학 A형+국어와 영어 B형’, 이과는 ‘국어 A형+수학과 영어 B형’을 치르게 되어 1개의 A형과 2개의 B형을 선택한다. 예체능계와 중하위권 대학에서는 2개의 A형과 1개의 B형, 혹은 3개의 A형이 허용된다.
선택형 수능은 학생의 수준에 맞게 시험 유형을 세분화해 학습 부담을 경감시키자는 ‘착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문과 학생들이 쉬운 수학 시험을 보는 만큼 이과 학생들도 쉬운 국어 시험을 볼 권리가 있다는 논리가 공감을 얻었다. 학생들의 교과별 수준 차이가 큰 만큼 자신의 수준에 부합하는 수능을 보게 하자는 총론적 주장은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선택형 수능이 현실과 만나는 각론에서는 심각한 폐해가 예상되기에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A형과 B형으로 시험 문제를 구분해 출제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국어 A형은 문학I, 독서와 문법I, 화법과 작문I을 출제범위로 하고, B형은 문학II, 독서와 문법II, 화법과 작문II를 범위로 한다. 그런데 국어과목의 특성상 문법을 제외하고는 난도의 구분이 모호하다. 수학의 경우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이과용 수리 가형과 문과용 수리 나형으로 구분해 시험을 치렀지만, 이는 수학의 내용 요소가 위계적으로 차별화되기에 가능했다. 국어나 영어는 그렇지 않다.
사교육 억제 효과 미미
선택형 수능 도입 계획이 발표될 무렵의 2011학년도 수능은 상대적으로 난도가 높았다. 따라서 B형의 난도를 당시 수능과 비슷하게 유지하고 A형은 당시 수능보다 난도를 낮출 경우 학습 부담 경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상황이 바뀌어 만점자 1% 배출과 EBS 강의 70% 연계를 추구하면서 2012학년도와 2013학년도 수능은 ‘물수능’이 됐다. 이런 기조를 유지한다면 쉬운 A형을 둘 필요가 없어진다.
선택형 수능이 시행되면 적어도 한 과목은 쉬운 A형을 선택하므로 사교육 억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어려운 B형에 대응하는 수업을 충실히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 때문에 학원에서 맞춤수업을 받는 학생수가 늘고 있다. 예를 들어 국어 B형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II과목들이 해당되는데, 이를 준비하려면 먼저 I과목들을 공부해야 한다. 이 경우 국어의 이수 단위만 해도 5단위씩 6과목, 총 30단위가 된다. 교육과정 안에 B형 과목들을 정상적으로 편성해 넣기가 쉽지 않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이뿐만 아니라 국어와 영어 A형을 보는 예체능계 학생과 B형을 준비하는 인문계 학생이 한 반에 있어 이동식 수업이 필요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분반 수업을 할 여력이 없다. 새 정부 공약 중의 하나가 3000여 개나 되는 대입 전형을 단순화하는 것인데, A형과 B형의 선택과 가산점이 얽히면서 가능한 경우의 수는 오히려 늘어나게 되고, 이처럼 고려사항이 복잡해지면 혼란과 불안으로 대입 컨설팅 업체가 창궐하게 된다.
각 분야에서 융합을 지향하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것이 전근대적이라는 지적이 계속돼왔다. 그런데 선택형 수능제에서는 계열에 따라 과목별로 일찌감치 A형과 B형을 선택해야 하므로 문과와 이과의 구분을 고착화할 수 있다. 실제 수능에서 과목 유형 선택은 계열에 종속되기 때문에 ‘선택형 수능’보다는 ‘계열별 수능’이 더 적절한 용어라는 지적도 있다. 문과와 이과의 칸막이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측면에서 선택형 수능은 현대사회가 길러내고자 하는 융합형 인재 양성에 역행하는 시험이라고 볼 수 있다.
A형과 B형의 난도 조정은 매우 복잡한 난제다. 수능에서 학생들은 원점수 이외에 표준점수를 받는다. 난도와 학생들의 점수 분포를 고려해 산정하는 표준점수는 상이한 난도의 사회탐구 및 과학탐구 과목들을 단일 선상에서 평가하는 데 유용하다. 표준점수는 그 시험을 치른 학생들의 평균과 표준편차로 결정되는데, 만약 시험이 어려워 전체 평균이 낮아지면 만점의 표준점수는 높아지고, 표준편차가 작아져도 표준점수는 높아진다. 만일 중하위권 학생들이 보는 A형의 문제가 약간 어려워 전체 평균이 낮아지면 만점의 표준점수는 높아지기 때문에 A형의 고득점자에게 유리해진다.
이런 상황이 알려지면 B형을 선택하려던 상위권 학생들이 대거 A형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B형을 치르고 대학 입학 전형에서 가산점을 받는 것보다, A형을 선택해 높은 표준점수를 받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B형을 치르려던 학생들이 A형으로 옮겨가게 되면 응시자가 줄어든 B형에선 등급을 받기가 어려워져 수능 최저기준을 못 맞추는 사례가 속출할 수도 있다. 이처럼 A형과 B형의 난도와 학생들의 향방에 따라 유형에 따른 유불리(有不利)가 달라지고, 매번 예측 불가능한 카오스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래도 원안대로 시행해야
선택형 수능안은 2011년 1월에 발표됐지만, 교육과학기술부는 새 정부 출범 후에 실시되는 수능이라 수수방관했고, 수능을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만점자 비율과 EBS 강의 연계율을 맞추느라 허덕이면서 새 수능에 대비하지 못했다. 선택형 수능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대학들은 이제야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무관심과 방치가 현재의 총체적 난맥상을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강행에 따른 부작용’과 ‘유보에 따른 혼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래도 전자가 바람직할 것이다. 단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몇 가지 보완조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모의평가 횟수를 늘리는 것이다. 올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하는 모의평가는 6월과 9월로 예정돼 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특별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서라도 그 횟수를 늘려야 한다. 모의평가라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출제자들은 A형과 B형의 난도와 변별력을 조정할 기회를 갖고, 수험생은 유형에 따른 시험 난도와 표준점수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의평가 후 A형과 B형의 성적 분포를 상세하게 밝혀 수험생에게 판단을 위한 정보를 충실하게 제공해야 한다.
둘째는 유형에 따른 가산점 부여 방식을 측정학적으로 객관화하는 것이다. 현재 A형과 B형을 모두 허용하는 중하위권 대학에서는 B형에 5~30%의 가산점을 부여하는데, 이런 일률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교한 보정 공식을 개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A형과 B형에는 공통문항이 있으므로 A형과 B형을 치른 수험생 집단의 평균과 표준편차를 반영해 B형의 가산점을 합리적으로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시가 대세이니만큼 수시에서 수능 최저기준을 없애 수능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선택형 수능의 부작용을 줄이는 우회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선택형 수능과 관련된 현재의 딜레마 상황에서는 묘안이 없어 보인다. 이럴 때는 최악(最惡)이 아닌 차악(次惡)을 고르는 게 최선이다. 선택형 수능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수험생의 예측 가능성과 정책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보완 대책을 세우면서 원안대로 실시하는 것이 최악을 막는 현실적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