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 모습을 보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건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그만큼 그의 지휘는 열정적이다. 그는 대중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로 클래식, 뮤지컬,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뛰어넘은 거장이었고,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시리즈를 기획한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주 장르에서 누리던 영예를 다른 분야에서도 지속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다.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이 야구선수로 전향했지만 야구의 황제로 남지 못했던 것처럼.
그런데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은 차원이 달랐다. 여러 장르를 섭렵한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그를 첫손에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80년대 초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을 호령하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미국의 포크가수 존 덴버와 듀엣을 결성해 ‘Perhaps Love’라는 불멸의 곡을 불렀는데, 그 배경에 번스타인의 미국적인 음악미학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테너 호세 카레라스가 도밍고와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음반을 낸 것도 그 곡의 지휘자가 번스타인이었기 때문이다. 번스타인은 서양 고전음악 분야에서 당대 최고 지휘자 반열에 올랐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적인 컨트리, 블루스, 재즈의 리듬과 선율을 클래식에 융합한 가장 미국적인 작곡자였다.
1959년 번스타인은 오늘날 세계 공연예술계의 중심이 된 뉴욕 링컨센터 개관식 총감독으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더 많이 받았다. 같은 시각에 인근의 브로드웨이에서는 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었다. 41세의 나이로 그는 이미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에서 모두 정상에 올라 있었다.
‘미국식 민족주의 음악’ 골몰
번스타인의 아버지 새뮤얼은 우크라이나의 독실한 유대교 집안 출신이다. 원래 랍비가 되려 했지만 러시아군대에 징집되지 않기 위해 1908년 미국행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망명 초기에는 어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그러나 새뮤얼에겐 유대인 특유의 사업수완이 있었다. 부지런하기까지 해서 미용 관련 상품을 많이 팔아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 동향 출신의 유대인 제니를 만나 보수적인 유대인 가정을 이뤘다. 종교적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던 이 가정에서 새뮤얼은 장남 루이스(나중에 ‘레너드’로 개명)에게 사제가 되기를 기대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랍비의 꿈을 아들이 실현해 대대손손 가문의 영혼에 등불을 밝히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또래보다 소심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어 여러 사람 앞에서 설교나 강론을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중에 그가 무대에서 지휘봉을 들고 곡의 정점에서 하늘로 펄쩍 뛰어오르며 강렬하게 카리스마를 발산하던 모습과는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다. 내성적인 데다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던 이 아이는 고모 클라라가 선물한 피아노 한 대를 계기로 적극적인 우등생으로 변모했다.
아버지는 경건한 집안에서 하루 종일 시끄럽게 피아노를 치며 몰두하는 아들이 탐탁지 않았다. 더욱이 유대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교회음악의 창작 분야를 중시하지 않았다. 번스타인이 작곡을 전공하기 위해 하버드대에 진학한다고 하자 새뮤얼의 상실감은 무척 컸다. 장남이 랍비의 길이나 가업 승계에는 전혀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명하고 입지전적인 인물인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적극 후원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지켜보는 조력자가 됐다.
수재들의 집합소인 하버드대에서 번스타인은 음악이론뿐 아니라 철학, 미학, 문학, 언어학, 사회학,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최고 권위자들의 가르침으로 섭렵하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엔 실증적 분석에 의존하면서 예술의 과학적 비평을 중시했다.
미국 음악이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맞았을 때였다. 실험정신과 도전의식을 가진 신진 음악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다. 이 아방가르드적 학파들은 18~19세기 음악 사조의 한계를 혁신적으로 개혁해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려는 공통의 의식을 갖고 있었다.
번스타인은 이 음악적 신세계를 미국 문화라는 범주에 아우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산업이 급격히 발전하는 가운데 다양한 인종이 맞물려 살아가는 미국의 20세기 상황을 담은 미국식 민족주의 음악을 작곡하려 했다. 이는 그가 1939년 제출한 하버드대 졸업 학위논문 ‘인종적 요소가 미국 음악에 끼친 영향’에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그는 하버드대 시절 4년 동안 범세계적 모더니스트로 신(新) 미국 문화의 전사가 됐다.
하버드대 교수였던 그리스 출신 지휘자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1896~1960)는 번스타인에게서 지휘자의 자질을 발견하고 지휘도 함께할 것을 권고했다. 그의 강력한 추천으로 번스타인은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서 헝가리 출신의 프리츠 라이너(1888~1963)에게 피아노, 악기 편성, 대위, 화성 등의 지휘와 작곡을 위한 실질적인 실기수업을 혹독하게 사사했다. 번스타인은 독일권에서 활동한 유럽 출신의 두 지휘자로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의 정신과 전통을 배울 수 있었다.
브루노 발터 대타로 대박
1940년 번스타인은 라이너의 추천으로 또 한 명의 ‘인생의 스승’을 만났다. 커티스 음악원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탱글우드 여름 마스터클래스에서였다. 그곳에서 만난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1874~1951)는 보스턴 심포니의 상임지휘자이며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세 지휘자의 신임 덕분에 번스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출세가도에 들어서게 된다. 번스타인은 무대에서는 도발적일 정도로 격정적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소탈하고 겸손했다. 그의 스승들은 어린 제자를 단순히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 아니라 예술적인 동료로 대했고 번스타인은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스승 쿠세비츠키가 사망한 후 번스타인은 탱글우드 여름 마스터클래스를 맡아 스승의 유지를 받들었다.
“지휘대에 오르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눈을 빠짐없이 쳐다보게. 기죽지 말게나. 지휘자는 그들 앞에 서 있는 큰 나무일 뿐이네. 그러고는 지휘봉을 들고 작곡자의 비밀을 풀어내는 마술사가 되는 거야.”
지휘자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후에도 번스타인은 중대한 연주를 앞두면 늘 스승의 말이 귓가에 들린다고 회고했다. 그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지휘대에 오른 것도 스승을 추모하는 탱글우드의 무대였다.
번스타인에게 인생의 변곡점이 된 행운은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1943년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독일에서 망명한 유대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1876~1962)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공연 직전 고열에 시달리며 침대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뉴욕필은 할 수 없이 하루 전 대타로 설 지휘자를 물색했고, 당일 오전 뉴욕 필하모닉 부지휘자였던 25세의 번스타인과 연락돼 저녁 공연을 할 수 있었다.
레퍼토리는 슈만의 ‘맨프레드 서곡’, 헝가리 출신 미국 작곡가 로자의 신곡,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키호테’,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서곡 등으로 다소 생소했다. 번스타인은 침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지휘자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오케스트라 리허설도 없이 그대로 무대에 올라갔다. 명칭만 부지휘자였지 실제로는 보조 지휘자에 지나지 않은 25세의 병아리 지휘자는 67세의 세계적 대가에 손색없이 지휘를 잘 해냈다.
이 공연은 CBS방송으로 미국 전역에 생중계됐기 때문에 그는 다음 날 모든 일간지 문화면에 대서특필됐다. 미국인들은 망명한 유럽의 거장이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한 ‘made in USA’의 젊은 거장에게 열광적으로 기대감을 드러냈다. 1년 후 번스타인은 피츠버그 오케스트라를 맡으며 승승장구했고, 꾸준히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음악의 세계에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번스타인이 하버드대에 입학한 1935년 독일의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법’으로 독일 내 유대인들을 격리하기 시작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일어나는 뒤숭숭하고 불안한 국제정세 때문에 미국에 있던 번스타인도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 아래서 상념에 젖어 있었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1941년에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고 같은 해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로써 미국과 소련은 반파시즘의 동맹국이 됐고, 천식 때문에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던 번스타인도 어떤 식으로든 의식 있는 사회참여를 하고 싶었다. 소련 난민 후원행사와 기금 모금 운동을 비롯해 ‘미·소 우호증진 국민협회’에 가입하고 이념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물론 전쟁 기간에는 미국과 소련이 동맹국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전후에는 반파시즘이라는 명목이 사라지고 국제 정세도 180도 달라졌다. 그래서 각자 자신들의 사상적인 배경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긋고 오해를 일으킬 만한 색채는 모두 지워 없애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번스타인은 진보당의 헨리 윌리스를 적극 지지하고 사회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갔다. 윌리스는 1940년 민주당 대선주자 루스벨트의 파트너로 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긴박했던 경제위기 때문에 뉴딜정책 초기에 제기됐던 분배의 공정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다 친소주의적인 언행으로 비난을 샀다. 그러다 다음 대선에서 부통령후보로 공천받지 못하자 친정인 민주당을 탈당하고 진보당을 창당했다.
그런 인물을 지지한 탓에 번스타인은 냉전시대로 치닫고 있던 미국에서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48년 윌리스는 진보당 후보로 대선에 나갔지만 참패했다. 대선에 승리한 민주당은 번스타인과 윌리스가 속한 진보당에서 행해지는 공산주의자와의 모호한 동거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번스타인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게다가 1950년 일어난 6·25전쟁으로 인해 민심은 더 험악해졌다. 번스타인은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CBS방송의 출연금지자 명단에 오르는 등 언론매체에서도 대표적인 공산주의자로 공공연하게 거론됐다.
미국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주최하는 탱글우드 음악축제. 번스타인은 이곳에서 스승 쿠세비츠키를 만났다.
유럽 연주회에는 미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스칼라극장에서 지휘하는 영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오페라 ‘메데아’의 주연은 전설적인 마리아 칼라스로 예정돼 있었다. 번스타인의 입지를 유럽에 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당국의 불편한 심기를 달랠 만한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하고서야 새로운 여권을 발급받아 이탈리아로 떠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부정하고 폄하했다는 비난에 갇히게 됐다.
급진파의 변신
번스타인은 자신의 급진적인 사상과 활동이 왜 전통적 노동자 계층으로부터도 외면받았는지 생각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경제공황이 끝나고 찾아온 풍요 덕분에 소득이 늘어나 소비 문화를 만끽했다. 단란한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달콤한 맛을 아는 미국인들에게 계급투쟁이니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니 하는 케케묵은 말은 거부감만 일으킬 뿐이었다.
더구나 가장 중요한 국익을 외면하는 지식인들의 ‘기계적인 반대’는 나와 내 가족의 번영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낳았다. 이에 번스타인은 ‘국익을 저해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주는 사상은 자유주의 기업경제를 추구하는 미국 사회와 공존하지 못하고 배척당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변신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번스타인은 가장 미국적이고 미국인에게 사랑받는 지식인이 됐다. 진보당 인사에서 민주당의 열혈지지자로 변모한 뒤인 1956년 그는 하버드대 은사인 미트로풀로스와 뉴욕 필하모닉의 공동 상임지휘자가 됐다. 그의 높은 지적 수준과 유창한 언변, 젊고 호감 가는 외모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더욱이 유료 티켓 판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대인들의 구미도 만족시킬 수 있는 안성맞춤 지휘자였다.
1960년 민주당의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번스타인의 정치적인 입지는 더욱 넓어졌고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미국에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팝아트 등으로 상징되는 개인주의, 자유방임주의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번스타인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지지하는 셀마 대행진에 참가하는 등 여전히 정치적인 언행을 이어갔지만 대중은 과거처럼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펠레의 저주와 같은 것이었을까.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그는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을 지휘했다. 그러나 뒤이어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했고, 번스타인이 적극적으로 지지한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유진 매커시, 뉴욕 상원의원 후보 폴 오뒤어 등이 줄줄이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럼에도 번스타인은 베트남전 종전시위와 같은 각종 사회적, 정치적인 현안에 적극 참가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소수파요, 약자였다. 유대인이었고 급진적 진보주의자였으며 동성연애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강력한 소수’였기 때문에 항상 이슈를 몰고 다녔다.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 여배우 펠리시아와 결혼한 뒤 세 자녀를 얻었지만 그의 동성연애 행각으로 부부는 냉각기 끝에 별거에 들어간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숨기기 위해 결혼을 감행했다는 의심을 받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아내가 암으로 투병하자 집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껏 간호하며 곁을 지켰다.
‘강력한 소수파’
급진적 좌파였던 번스타인은 나치당원 출신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비교되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보면 두 사람에게서 반대 성향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다만 지휘 스타일에서 번스타인이 열정적인 행위예술가였다면, 카라얀은 절제되고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였다. 작곡자 번스타인이 음악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려 했다면, 피아니스트 출신인 카라얀은 음질과 소리로 음악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미국과 유럽 두 대륙을 대표하는 최고의 거장이었고, 서로에게 긍정적 시너지 효과를 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 크리스마스에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베를린에서 연주했다. 그는 폐암과 싸우고 있었지만 역사적 현장의 분위기에 고무됐다. 그는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 나오는 ‘신들의 불꽃보다 더 빛나는 환희여’라는 첫 문장에서 ‘환희’를 ‘자유’로 바꿔 부르게 했다.
번스타인은 얄팍한 순발력과 노련함으로 급변하는 미국 사회의 흐름에 재빠르게 대처한 장사꾼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1950년대에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시작한 TV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가 대표적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 오페라를 작곡하겠다는 의지도 충만했다. 걸작 오페라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는 활발한 지휘 활동 와중에도 교향곡 ‘카디시’(1963)와 ‘치체스터 시편’(1965), 뮤지컬 ‘거리에서’(1944)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57), 피아노와 관현악곡 ‘불안의 시대’(1949), 발레음악 ‘팬시 프리’(1944)’ 등을 작곡했다.
그는 풍부한 감성과 정열을 지닌 현대적인 로맨티스트였다. 그의 음악에는 그가 음악에 대해 품은 깊은 애정과 인간에 대한 예의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장례식 때 추도행렬이 지나가자 공사판 일꾼들도 모자를 벗고 경건하게 애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