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 8차례 넘나들며 탈북자들과 동행
- 갓난아기 업고 칠흑 같은 밀림 속 밤새 뛰는 母性
- 소시지와 콜라 잘 먹던 꽃제비 진혁, 남한 적응 잘 하길
한국 방송 사상 최초로 집단 탈북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낸 채널A ‘특별기획 탈북’주요 장면들.
입이 자꾸만 바싹 말랐다. 수풀 어딘가에 일곱 살 꽃제비 진혁이(가명)가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 진혁이가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압록강을 건너온 지 3시간이 넘었다. 바깥 기온은 영하 25도. 그 어린아이가 혹한 속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당초 계획대로라면 진혁이는 사흘 전에 강을 건너 우리와 만나야 했다. 하지만 저쪽 상황이 여의치 않은지 날짜가 계속 미뤄졌다. 진혁이를 도와줄 북한 측 브로커와 연락을 주고받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진혁이가 강을 건넜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K씨와 부랴부랴 국경으로 향했다.
“야! 빨리 나오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지만 진혁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급해진 K씨가 소리를 질렀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그때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차 온다! 숨어!”
K씨와 나는 차 시동을 끄고 풀숲에 몸을 숨겼다. 중국 공안이 “이 밤에 국경에서 뭐하느냐”고 물으면 뭐라 답한단 말인가. 다행히 차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멀어졌다. 우리는 다시 북한 측 브로커와 연락을 하며 진혁이를 찾았다. 길 위에는 브로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가 드문드문 있었다.
“저기 있다, 빨리빨리!”
거짓말처럼 어둠 속에서 진혁이가 나타났다. 다른 탈북자의 등에 업힌 채였다. 카메라를 든 손이 떨렸다. 진혁이가 타자마자 K씨는 급히 차를 몰았다.
“괜찮아? 이름이 진혁이 맞아요?”
온몸을 오들오들 떨던 아이는 간신히 “네”라고 답했다. 분명히 일곱 살이라고 들었는데 몸집은 서너 살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팔다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입고 있던 꼬질꼬질한 옷은 압록강의 겨울을 버티기엔 한참 부족해 보였다. 다운점퍼를 벗어 아이의 몸에 덮었다. 추위와 공포에 시달렸을 아이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살얼음 낀 강 건넌 일곱 살짜리
진혁이를 만나기 두어 주 전, 나와 강태연 PD는 생생한 탈북 과정을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우리 두 사람은 다큐멘터리 프로를 만들며 잔뼈가 굵었다. 감시의 눈을 피해 탈북 과정을 촬영하는데 커다란 장비를 가져갈 수는 없다. 작은 핸디캠과 그보다 더 작은 몰래카메라를 챙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혁이의 사진을 봤다. 순간 PD로서의 감이랄까, 어떤 강렬한 느낌이 전해졌다. 만나본 적도 없는데 ‘이 아이를 반드시 한국으로 데려오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생겼다.
진혁이는 양강도 혜산시에서 유명한 꽃제비였다. 진혁이 어머니는 중국으로 도망쳤고 아버지는 진혁이가 보는 앞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꽃제비들은 보통 무리를 지어 다니지만 진혁이는 나이가 너무 어려 무리에 끼지 못했다. 낮에는 시장과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며 땅에 떨어진 쌀알이나 과일 껍질을 주워 먹고 밤에는 남의 집 담장 밑에서 잤다. 기온이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지는 혜산의 겨울을 버티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흥분됐지만 걱정이 없진 않았다. 중국으로 떠나면서 우리 둘은 “현지 군인이나 경찰에 잡히면 어쩌느냐”는 얘기를 나눴다. 고민해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잡히면 고생은 하겠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현지에 도착해보니 13명의 성인 탈북자 그룹은 이미 강을 건넌 상태였다. 강 PD는 이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중국 모처의 안전가옥(안가)으로 향했다. 나는 압록강 근처에 남아 열네 살 소녀 윤정이(가명)와 일곱 살 진혁이가 넘어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윤정이는 예정대로 넘어왔지만 진혁이가 늦어지면서 압록강 인근에서 며칠을 더 기다려야 했다.
강 PD는 압록강에서 이틀 거리쯤 떨어진 안가에서 13명의 성인 탈북자와 함께 숨죽인 채 지내고 있었다. 근처 주민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창문은 커튼으로 가렸고 불도 거의 켜지 않았다. 집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고 목소리는 최대한 낮춰야 했다.
북한 양강도 해산시의 최근 사진.
갑자기 들려온 현관벨 소리에 일동은 순간 굳어버렸다. 사람들이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문 밖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윗집 아이들이 벨을 잘못 누른 모양이다. 탈북을 시도하다 북송된 경험이 있는 윤경 씨(26·여)는 특히 긴장된 표정이었다. 한 번 더 북송된다면 그땐 더 강력한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안가에서 머무르는 날이 많아질수록 긴장감은 점점 고조됐다. 한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발각될 위험도 커진다. 떠나야 할 날이 다가왔다. 안가를 떠나기 전, 탈북자들은 면도기에서 면도날을 떼어내 휴지에 쌌다.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차라리 면도날을 삼키고 죽겠다는 그들에게 강 PD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국놈’이 만든 약
탈북자들의 다음 목적지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A국. 국경까지는 버스를 갈아타며 5, 6일을 가야 한다. 13명이 집단으로 움직이면 어딜 가나 눈에 띄기 쉽다. 대화 소리가 들리면 들키기 십상이다. 탈북 브로커는 일행에게 몇 번이고 “말을 하지 마라”고 강조했다. 버스는 하루에 단 한 번 휴게소에 들른다. 나머지 시간에는 버스 안에서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버텼다.
위기는 불쑥 찾아왔다. 강 PD는 탈북자 분홍 씨(30·여)와 휴게소에 내려 일행의 먹거리를 사러 가고 있었다. 그때 중국 공안이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했다. 다행히 강 PD는 신분증이 든 가방을 들고 있었다. 또 분홍 씨가 중국어를 할 줄 알았던 덕에 두 사람은 적당히 관광객이라고 둘러댔고 공안은 자리를 떴다. 만약 가방을 차에 두고 내렸다면 공안이 버스 안까지 따라와 탈북자들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와 두 명의 아이는 성인 탈북자들이 출발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국경으로 향했다. 공안이 우리를 의심한다면 자녀를 데리고 여행 중이라고 할 작정이었다. 버스 멀미로 고생하던 진혁이의 눈이 가장 아이답게 반짝거리는 순간은 하루 한 번 들르는 휴게소에서였다. 휴게소에 있는 가게에 아이를 데려간 뒤 말했다.
“너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골라.”
진혁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가 뭔지 잘 몰라 머뭇거리더니 빵이며 과자를 하나씩 주워 담기 시작했다.
진혁이가 고른 것들은 하나같이 양만 크고 맛은 없었다. 빵은 종잇장처럼 뻣뻣했다. 아이에게 내가 고른 소시지를 줬더니 큰 눈이 더욱 커졌다.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콜라도 건네줬다. 진혁이는 물인 줄 알고 들이켜고는 톡 쏘는 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다. 그다음부터 진혁이는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소시지와 콜라부터 챙겼다. 한번은 윤정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기에 가지고 있던 아스피린을 반으로 잘라줬다. 약을 받아먹은 윤정이는 금방 머리가 나았다며 물었다.
“그거 무슨 약입니까?”
“이거 미국에서 만든 약이야.”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미국놈”이라고 말했다. 나는 “너희 잘 먹는 콜라도 미국에서 만든 건데?”라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래서 목을 그렇게 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먼저 출발한 성인 탈북자 그룹과 A국 국경지역에서 만났다. 강 PD와 헤어진 지 열흘 만의 재회였다. 탈북 브로커는 우리가 중국에서 A국으로 밀입국하는 길에 동행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루트가 공개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나와 강 PD는 촬영을 포기하고 합법적으로 먼저 국경을 넘었다. 15명의 탈북자는 브로커와 함께 산을 넘어 A국으로 들어올 것이다.
‘아들아 소중히 너를 키워서…’
나는 A국을 넘자마자 바로 탈북자들의 다음 목적지인 B국으로 갔다. B국의 안가를 답사하고 탈출 루트를 미리 가보기 위해서였다. B국을 둘러본 뒤 다시 A국으로 돌아온 나는 탈북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안가로 향했다. 감시가 약해진 새벽에 비를 맞으며 산을 넘어온 일행은 지친 얼굴이었다. 10개월짜리 딸을 업고 산을 넘은 분홍 씨는 특히 지쳐 있었다. 아기가 비에 맞지 않도록 비닐을 뒤집어씌우고 왔다고 했다.
“산에서 내려오니까 처음 보는 글씨로 써진 간판이 보이더라고요. 그제야 우리가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국을 벗어나자 이들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 녹아내린 듯했다. 일행은 진혁이에게 노래를 해보라며 박수를 쳤다. 진혁이는 한번 빼는 법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양승원 PD와 진혁이. 진혁이는 남한에 무사히 들어온 것으로 확인됐다.
고여온 그 사랑으로
아들아 소중히 너를 키워서
어머님의 자랑이란다.
진혁이는 여기 오지 않았다면 어느 집 담장 밑에서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북한 사람들에게 꽃제비는 길고양이와 다름없다고 한다. 죽은 고양이를 돌보지 않듯이 죽은 꽃제비가 방치되는 일도 허다하다고 했다. 지금 노래를 부르는 이 아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 나는 전율했다.
진혁이와 단둘이 앉은 나는 궁금했던 것들을 조심스레 물었다. 머리에 난 커다란 상처가 우선 궁금했다. 아이는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아저씨들이 고기 사 먹고 남긴 찌끄러기 주워 먹다가….”
“진혁이는 뭐 먹고 살았어요?”
“사람들이 국수 먹다가 국수물 남긴 거, 아침에는 먹을 게 없으니까 뼈다귀 주워 먹고 무껍질 버린 거 먹고….”
“밖에서 자면 춥잖아. 추우면 어떻게 해요?”
“…울었어요.”
아이는 밖에서 살면서 눈치가 늘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기 어려울 때 울고 있으면 간혹 따뜻한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눈물은 어린 꽃제비의 본능적인 생존 방법이었던 셈이다.
A국에 도착한 날 밤, 우리는 B국으로 밀입국하기 위해 밀림으로 향했다. 나는 탈북자들과 함께 밀림을 건너기로 했고 강 PD는 미리 B국으로 가서 일행을 태울 차량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밀림을 안내할 B국 브로커는 출발 직전에 웃돈을 요구했다. 탈북자의 절박한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것이다. 탈북 과정을 총 지휘한 중국 브로커도 B국 브로커의 요구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의 목숨은 그에게 달려 있으므로.
“양 실장님(탈북자들은 브로커를 사장, 나를 실장이라 불렀다), 밀림 같이 갑니까?”
“그럼요, 같이 가야죠.”
탈북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말도 통하지 않는 현지 브로커만 믿고 따라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모양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밀림 속 ‘전투’
양승원 PD가 윤경씨(맨 왼쪽), 진혁이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10개월짜리 아기 혜미가 걱정거리였다. 밀림에서 울기라도 한다면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밀림을 안내할 B국 브로커는 “술에 설탕을 타서 먹이거나 수면제를 먹이자”고 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되받았다. 어느 부모가 아기에게 술을 먹인단 말인가.
“우리 혜미 잘 할 수 있어요.”
혜미 엄마 분홍 씨도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밤 12시의 밀림은 30cm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이었다. 불을 켜면 발각될 수 있다는 브로커의 경고에 아주 위급한 때가 아니면 불을 켜지 않았다. 나는 적외선 감지 기능이 달린 소형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카메라 녹화(REC) 버튼에 들어오는 빨간 불을 가리기 위해 껌을 씹어 붙였다.
나무와 수풀을 헤치며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길은 신체 건강한 남성인 내게도 쉽지 않았다. 더 큰 공포는 어둠이었다. 내디디는 발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오로지 소리와 감에만 의존해서 앞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누군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윤경 씨인 것 같았다. 신음조차 나지 않았다. ‘크게 다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괜찮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0여 m 낭떠러지였지만 등 쪽으로 떨어진 덕에 메고 있던 가방이 에어백 노릇을 해준 모양이었다.
밀림을 빠져나가는 데 2시간 반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시간이 지체되면서 꼬박 4시간이 걸렸다. 혜미는 4시간 동안 한 번도 울지 않고 조용히 분홍 씨의 등에 업혀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분홍 씨였다. 아이를 업고 장화를 신은 상태였는데도 늘 맨 앞에서 달렸다. 등산화를 신은 나보다도 빨랐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달렸으리라. 위기에서 더 빛을 발하는 놀라운 모성애였다.
흙탕물 벌컥벌컥 들이켜고
탈북자들의 목숨 건 탈북 루트를 동행 취재한 채널A 제작본부 양승원(왼쪽), 강태연 PD
강 PD에게 지금까지 촬영한 영상이 담긴 메모리카드를 넘기고 급히 몸을 돌려 어두운 밀림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낭떠러지를 데굴데굴 굴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둠 속에 혼자였다. 길을 안내했던 브로커와 함께 돌아가야 하는데,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전화기를 켜보니 통화권 이탈지역이었다. 더 깊은 곳으로 잘못 들어갈까봐 움직이지도 못한 채 20분이 지났다. 더는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에 떨어졌던 길을 되짚어 움직였다. 멀리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토록 찾던 브로커였다.
반가움을 표시할 새도 없이 우리는 뛰어야 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지만 속도는 두 배였다. 숨이 턱까지 찼지만 조금 있으면 해가 뜬다는 생각에 죽어라 달렸다. 2시간 만에 우리는 A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땅에 고인 흙탕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A국 출입국사무소를 통해 B국으로 건너갔다. B국 안가에 모여 있던 일행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문제는 어린아이들이었다. 고된 여정을 겪으면서 아이들의 건강상태는 많이 나빠져 있었다. 10개월짜리 혜미와 진혁이의 상태가 특히 좋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들과 혜미 엄마를 B국의 대한민국 대사관에 맡겼다. 최종 목적지인 태국까지 가서 난민신청을 하는 것이 더 빨리 한국에 올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더 이상 아이들에게 힘든 길을 가게 할 수는 없었다.
탈북 일행은 10명으로 줄었다. 이제 강을 건너면 태국이다. 강폭은 한강보다 조금 좁은 정도지만 수심이 깊다. 우리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3명씩 작은 나룻배에 올라탔다. 멀리 강가에는 음식점들이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인적 없는 강가에 배를 대고 올라갔다. 지난한 여정이었다. 윤경 씨는 눈물을 훔치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탈북자들은 경찰서로 향했다. 나는 다시 배를 타고 B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배를 타고 가고 있는데 탈북자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 실장님! 고맙습니다!”
두 팔을 크게 흔들며 웃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채널A에서 1월 13일 첫 방송한 ‘특별취재 탈북’의 반응은 뜨거웠다. ‘목숨을 건 PD’라며 분에 넘치는 칭찬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목숨을 건 것은 내가 아니라 15명의 탈북자다. 나는 단지 그들과 동행했을 뿐이다.
나는 외교통상부와 통일부를 통해 진혁이가 언제 한국에 들어오는지 매일 확인했다. 그러던 중 진혁이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접했다. 외교부를 담당하는 동아일보 기자가 이 정보가 사실이라고 확인해줬다.
이제 여덟 살이 된 진혁이는 합동신문을 받은 후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에 입소했다고 한다. 앞으로 하나원 내에 있는 ‘하나둘학교’에서 교육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뒤에는 미성년자인데다 보호자도 없기 때문에 보호시설에서 지낼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에는 진혁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감사한 일이다. 진혁이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생활을 해온 아이다. 나는 그 아이가 북한에서의 생활을 잊고 살아가길 바란다.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진혁이만을 향한 동정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시청자가 “진혁이가 한국에 돌아온 다음 이야기도 꼭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나 역시 ‘특별취재 탈북’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제대로 마무리되려면 진혁이가 우리 땅을 밟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모습까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까지 이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다.
◆ 채널A 다큐 ‘특별취재 탈북’은…
1월 13일 채널A가 방송한 ‘특별취재 탈북’이 연일 화제다. 방송이 나간 후 제작진 앞으로는 탈북자들을 돕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고, 후속 제작 요청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 방송 사상 최초로 2명의 PD가 20일간 탈북자들과 동행하며 사선을 넘나드는 15명의 집단 탈북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1부 ‘강을 건넌 사람들’, 2부 ‘마지막 국경’ 등 총 2부로 제작된 이 다큐는 채널A 홈페이지(www.ich annela.com)에서 다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