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느림을 견디는 파리 조급증에 빠진 서울

고현학(考現學)으로 풀어본 두 도시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입력2013-02-21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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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은 배달 문화의 최선진국이다. 자장면뿐 아니라 피자, 햄버거, 선물, 장롱까지 배달되지 않는 것이 없다. 연애편지도 퀵서비스로 보내는 사회.
    • 서울에서 파주까지 30분이면 서류가 배달되는 사회.
    • 그러나 신속한 서비스 사회의 이면에 느림을 견디지 못하는 조급증이 숨어 있다.
    느림을 견디는 파리 조급증에 빠진 서울

    비오는 날의 파리 뒷골목.

    고고학(考古學·archaeology)과 대비되는 고현학(考現學·modernology)이라는 말이 있다. 고고학은 수천 수만 년 전에 살았던 인류의 희미한 흔적을 발굴해 그 조각들을 이어보며 그들이 살았던 삶 전체의 모습을 유추하는 학문이다. 반면 고현학은 지금 여기 눈앞에 보이는 대도시의 풍물들을 마치 수천 수만 년 전의 사물처럼 신기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현대인의 삶의 양상을 이해하려는 일상의 지적 활동이다. 고고학자가 사라진 문명과 지나간 역사의 자국과 조각들을 맞춰보며 지난날의 삶을 재구성한다면, 고현학자는 대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에 다가오고 몸에 부딪히고 손에 잡히고 입에 들어오는 온갖 사물의 형태와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현대 도시의 핵심은 거리에 있다. 거리에는 사람들과 자동차와 유행의 물결이 흐른다. 고현학자는 거리를 걷는 젊은 남녀의 패션과 자동차의 형태와 색채, 건물 외양의 변화는 물론 간판과 광고판 위의 문구들, 대형 화면 위에 쏟아지는 현란한 이미지들, 가판대 위의 작은 물건들, 지하철 안 사람들의 표정과 몸동작, 그리고 그들이 쓰는 언어생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들은 해석을 요구하는 기호들이다. 도시는 수없이 많은 이질적인 기호가 서로 교차하며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모순을 빚어내는 기호의 제국이다. 고현학자는 그 일상의 기호들이 갖는 숨은 의미를 해석하는 일상의 민속학자다. 그는 현상의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외피를 뚫고 들어가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현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들이 여행자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인다. 1980년대 초 프랑스 유학 시절 알프스 부근의 샹베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외국에 처음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나에게는 거리의 광장에 만들어놓은 둥근 화단이 이색적으로 보였다. 그곳에 피어 있는 분홍색, 청색, 은색, 보라색 꽃들의 배합이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그 꽃밭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랬더니 함께 여행하던 프랑스 친구가 “네 눈에는 그게 새롭게 보이냐? 그거 아무 데나 다 있는 거야!”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행객은 현지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해서 눈여겨보지 않는 사소한 것에 감탄할 권리가 있다. 여행자에게는 포스터에 쓰인 글씨, 건물 지붕의 형태, 상점의 진열창, 슈퍼마켓의 일상적 물건들, 식당의 차림표, 텔레비전 뉴스 진행자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인다.



    오래 살아서 익숙해진 도시도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새로운 풍경을 찾아 멀리 떠날 필요가 없다. 프랑스 혁명을 반대했던 보수주의 사상가 조셉 드 메스트르의 동생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야말로 여행자의 눈으로 일상의 풍경을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민한 눈으로 침대, 침대 시트, 스탠드, 탁자, 벽에 걸린 그림, 유리창, 커튼 등 침실의 익숙한 물건들을 두루 관찰하고 나서 ‘나의 침실여행’과 ‘나의 야간 침실 탐험’이라는 두 권의 여행기를 출판했다. 당연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눈만 가지고 있다면 돈도 힘도 들이지 않고 자기가 머무는 일상의 장소에서 즐겁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자 그럼 여행을 떠나보자.

    풍경 #92 일상의 역사적 공간들

    매일 거기에 서 있으니까 당연하게 보이는 건물들 하나하나에도 역사가 있다. 그것들을 이어보면 긴 역사적 연대기를 만들 수 있다. 궁궐과 성벽, 숭례문과 흥인문 같은 것이 조선시대의 역사적 유물이라면,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우정국 건물, 독립문, 조선호텔 옆의 원구단, 교보빌딩 옆의 비각은 합방 전 개화기의 흔적들이다.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과 겨우 명맥을 유지한 옛 서울시청사, 어정쩡하게 남아 있는 서울역사, 서울시 의회로 쓰이는 옛 국회의사당 건물, 일민미술관이 된 동아일보 구 사옥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근대적 건물들이고,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이순신 장군 동상은 박정희 시대의 유물이다. 종로 2가의 삼성빌딩과 신문로의 흥국생명빌딩은 세계화 시대를 상징한다.

    한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면 강남역 부근의 삼성타운 빌딩들에서 시작해 삼성역에 이르는 테헤란로 양쪽에는 LG와 포스코를 비롯한 대기업의 현대식 건물들이 대한민국 경제의 비약적 성장을 보여주며 줄지어 서 있다. 이런 도시 공간에서 서울 사람들은 지난날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이제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 있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장소를 바꾸어 파리로 가보면 거기에는 프랑스 혁명 이전 절대왕조 시대를 상징하는 궁궐과 광장, 동상과 기념비가 즐비하고 혁명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수많은 성당이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콩코르드 광장에 남근처럼 힘차게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상징이다. 피라미드나 스핑크스와 함께 이집트 땅에 서 있어야 마땅한 오벨리스크가 파리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는 파리지앵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1830년에야 파리에 도착한 외래의 물건으로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행사한 프랑스 제국주의의 영향력의 산물이다. 파리의 군사 박물관인 앵발리드 입구와 건물의 복도에는 갖가지 모양의 대포 포신이 줄지어 서 있는데 그것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상징이다.

    트로카데로 광장에 있는 해양 박물관에는 거대한 배의 모형과 군함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의 모습을 그린 풍경화들이 걸려 있다. 그것은 프랑스가 육군만이 아니라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제국주의 국가였음을 의미한다. 오래된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들과 새로 지은 케브랑리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그런 제국주의의 문화적 전리품들이다. 루브르 박물관 앞마당에는 말을 탄 루이 14세 동상이 서 있고 앵발리드의 안 마당 정면 건물에는 나폴레옹 동상이 서 있으며 샹젤리제 거리에는 행진하는 모습의 드골 동상이 서 있다. 그들은 프랑스 제국의 영웅들이다.

    파리의 동쪽 허파라고 하는 뱅센 숲 입구에는 이민사 박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1931년 당시 프랑스 제국이 통치하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남태평양의 식민지 지역 풍물을 전시한 ‘식민지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문화궁전이었다. 이런 흔적들 때문에 파리 사람들은 제국의 영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아직도 파리가 세상의 문화적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산다. 프랑스의 영광은 이미 기울기 시작했어도 그들은 아직 그렇게 생각한다.

    풍경 #93 일상의 제국주의

    유학 시절 파리 14구에 있는 국제학생기숙사에 살 때 길 건너에 있는 몽수리 공원을 자주 산책하곤 했다. 지난해 9월 파리에 한 달 동안 머무를 때도 그 공원을 찾아갔다. 비가 오고 있어서 조용한 공원 어린이 놀이터 옆에 오래된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에 이 공원을 거닐 때는 무심코 지나갔지만 갑자기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 조형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안내판을 보니 기념비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유물이었다. 프랑스의 지리학자와 군인들로 구성된 사하라 사막 조사단원들이 사막의 원주민 투아렉족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을 기억하고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였다. 사하라 사막에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현지 조사에 나섰던 프랑스 식민주의의 첨병들에게 프랑스 공화국이 바친 헌사였다. 1870년대 프랑스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기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식민지 개척의 열정을 불어넣는 구실을 했을 것이다.

    또 어느 날 생제르맹데프레 대로를 걸어가는데 번듯한 건물 벽에 ‘프랑스 지리학회’라는 오래된 현판이 걸려 있었다. 19세기 후반 식민지 개척을 위한 기초 연구를 하던 학회의 본부 앞에서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렸다. 사이드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 학자와 작가들의 근동지역 연구 속에는 서구 제국의 우월감과 비서구 지역에 대한 편견이 들어 있음을 낱낱이 밝히지 않았던가! 프랑스 지리학회는 바로 그 오리엔탈리즘의 온상이었다.

    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식인 한 사람과 어느 날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는 프랑스 특유의 반미감정을 담아 “미국 사람들은 지식인들도 아프리카 지리를 거의 모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아프리카 지리를 잘 아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있었으며 학교에서도 아프리카 지리를 많이 가르쳤고,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아프리카 식민지에 관료나 교육자, 모험가, 군인, 상인, 선교사 등으로 가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해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면 내가 살던 파리 16구에 폴두메르 대로(Avenue Paul Doumer)가 있다. 매일 걸어 다니는 그 길의 이름이 된 폴두메르는 알고 보니까 베트남 초대 총독을 지낸 정치인이었고 나중에 그 공적을 바탕으로 프랑스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풍경 #94 날림 공사와 사후 관리

    강남의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앞 버스 정거장 뒤에는 ‘가톨릭대학교’라는 흰색 네온 글자가 붙은 기둥이 서 있다. 그런데 벌써 오래전부터 ‘가’자와 ‘릭’자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X톨X대학교’라고 읽혔다. 왜 자기 학교의 얼굴인 간판을 저런 상태로 방치하는지 답답했다. 그러다 어느 날 불이 들어오지 않는 글자를 교체하는 공사 장면을 보게 됐다. 기사 두 사람이 작은 트럭에 연장통을 싣고 와서 이동 사다리 위에 올라가 불이 들어오지 않는 네온 글자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있었다. 공사가 끝나자 ‘가톨릭대학교’라는 다섯 글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나는 그 광경 앞에서 일단 급하게 공사를 마치고 나서 문제가 생기면 보수 공사를 하는 한국식 일처리 방식을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새로 교체한 ‘가’자와 ‘릭’자가 다른 글자들에 비해서 훨씬 환한 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쁘게 지나가는 행인들은 그런 차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내 눈에는 ‘가톨릭대학교’라는 다섯 글자들 사이의 밝기 차이가 어색하게만 보인다. 공사를 날림으로 하고 사후 관리에 뛰어난 나라,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 흔적 속에 들어 있다.

    풍경 #95 낯선 존댓말

    한 도시의 특징은 건물, 기념비, 간판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서울의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와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관찰해봐야 서울의 고유한 특성을 알 수 있다. 서울에 돌아와 모국어로 말하며 살아가니까 외국어를 할 때 느끼는 긴장감이 없어서 좋다. 그런데 대화를 할 때마다 존댓말에 신경을 써야 한다. 프랑스어에는 말하는 사람 사이에 높낮이에 따라 달라지는 존비법이 거의 없다. 편안하게 부르는 호칭 ‘튀(tu)’와 모르는 사람 사이나 윗사람과의 관계에서 사용하는 ‘부(vous)’라는 2인칭 대명사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말에는 존댓말과 반말 사이에 상대방의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무수한 등급의 대우법이 발달해 있다. 가수 변진섭이 부른 노래 가운데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옛 애인에게 반말을 해야 할까 존댓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가사가 나오지만, 모르는 사람을 만나 말을 건넬 때도 자동적으로 고려하게 되는 게 존비법이다. 일상에서 벌이는 말다툼 가운데 “누구한테 반말이야!”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걸 보면 아직도 우리는 일상 언어생활에서 서로 평등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불필요한 위아래를 가르고 있다.

    서울에 10년 만에 돌아와보니 오히려 존댓말 사용이 늘었다는 느낌이 든다. 친절을 강조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무턱대고 사모님, 사장님, 고객님 등 ‘님’자가 들어간 호칭을 사용하고 ‘시’자를 넣어 동사를 변화시킨다. 남성 노인들에게는 어르신네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런데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의 물건을 존대하는 잘못된 표현이 많이 들린다.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고 나자 도서관 직원이 “반납되셨습니다!”라고 말한다(“반납되었습니다!”가 바른말이다). 버스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스카프가 떨어진 것을 모르고 있으니까 옆에 있던 젊은이가 “스카프가 떨어지셨어요!”라고 말한다(“스카프가 떨어졌네요!”가 바른말이다).

    풍경 #96 집단주의 회식문화

    도시의 거리는 신경을 자극하고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시각과 청각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이미지와 소리들이 존재하고 사람과 사물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에서 학회를 마치고 부근의 맥줏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뒤 테이블에서 큰 소리로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라고 외치며 맥주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양복을 입은 남성들과 정장을 한 여성들 10여 명이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나로선 아주 오래간만에 보는 회식 문화였다.

    그 얼마 후 다른 모임에서의 일이다. 모임의 회장이 중국식당에 가서 요리를 시켜놓고 모든 사람의 술잔을 다 채운 다음 유머 감각을 섞어 ‘우리는 조폭이다’라고 선창을 하면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라고 세 번 외치라고 말했다. 그런데 회장이 선창을 하자 사람들 대부분이 시키는 대로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라고 외치는데 누군가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풍경 #97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

    서울은 소음의 도시다. 아직도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사회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아나운서들의 목소리 톤이 파리의 아나운서들보다 훨씬 높다. 안정되고 차분하기보다는 들뜨고 흥분된 목소리다. 국회의 정책토론도 텔레비전의 심야토론도, 공청회에서의 발언도 모두 목청을 높여 자기 주장만 한다.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도 많다. 대개 중년 이상의 남자들이지만 젊은 여성들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도 있고, 영화관에서 상영 중에 큰 소리로 전화 받는 사람도 있다.

    며칠 전 국립중앙도서관에서였다. 오후 5시 이전에 신청해야 책을 빌려 볼 수 있는데 도서관에 비치된 컴퓨터의 작동이 느려서 신청을 못했다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종이에 책 제목을 써서 신청할 터이니 빌려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 사서는 규정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목청을 높여 사서를 꾸짖기 시작했다. 사서가 다른 열람자들을 위해 조용히 하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열람실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해도 듣지 않는다. 사서가 규정을 다시 설명해도 듣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책을 가져다 달라는 주장만 계속했다.

    풍경 #98 맛의 제국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는 말이 있다. 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조선시대 종가의 의무였다. 손님 접대의 기본 예의는 풍부한 음식 제공으로 시작된다. 일본 사람들처럼 딱 먹을 만큼의 양만 차려 내오는 밥상은 체신머리가 없고 야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누군가를 식당에 초대해 함께 식사할 때에도 남을 만큼 충분하게 시키는 것이 기본 예의다. 음식 남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음식의 양보다는 맛이 중요해지고 있다. 가난할 때는 배불리 먹는 게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살 만하게 되면 맛있는 음식을 찾게 된다. 지금 서울은 맛의 제국이다.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 다니는 맛집 순례가 유행이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음식을 만들거나 다 만든 음식을 보여주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제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혀로 직접 느끼는 미각이 가장 중요한 감각이 돼버린 느낌이다. ‘맛있는 여행’ ‘맛있는 수학’ ‘맛있는 책읽기’ ‘맛있는 위로’ ‘맛있는 세상’ 등 세상 만물이 온통 맛으로 수식되고 있다. 이제 세상은 맛의 제국을 지나 혀의 제국이 돼가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외식은 그리 일반화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중국집에 가서 만두를 먹고 난 다음 자장면을 시켜 먹는 게 일반적인 외식 문화였다. 그러나 88올림픽 이후 세상의 온갖 요리가 다 서울로 들어왔고, 영리한 요리사들은 그 요리를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바꾸었다. 불과 20~30년 사이에 서울은 세계 어느 곳보다도 맛있는 식당이 많은 도시가 됐다.

    풍경 #99 서울의 배달 문화

    요즈음 집에 아이들이 있어도 식사를 주문해서 먹는 경우가 많다. 너도나도 집에 앉아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다. 자장면만 배달하는 게 아니라 햄버거, 피자, 돈가스, 통닭, 된장찌개, 초밥 등 온갖 종류의 음식이 주문만 하면 곧바로 배달된다. 서울은 배달 문화의 최선진국이다.

    어느 날 저녁 무렵의 일이다. 아파트 출입구 현관 앞에 오토바이가 한 대 서 있다. 우리 동네 슈퍼에서 배달 나온 오토바이다. 검은색 오토바이의 뒷자리에는 노란색 플라스틱 바구니가 부착되어 있고 그 안에는 여러 집에서 배달시킨 물건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배달 일을 맡은 ‘알바’ 청년은 여러 개의 대형 비닐 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간다. 며칠 전 파주에 있는 어느 출판사에 교정을 본 책 원고를 보낼 일이 생겼다. 출판사에 연락하니까 곧바로 전화가 왔다. 퀵서비스 하는 분이 채 10분도 안 돼 도착했다. 원고를 건넨 지 30분 정도 지나자 출판사 담당직원이 원고를 잘 받았다고 전화했다. 퀵서비스의 위력을 몸으로 느꼈다. 이런 신속성은 파리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신속한 서비스의 이면에는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이 각박하게 살고 있다는 뜻도 담겨 있고 느림을 견디지 못하는 조급증도 숨어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위험하게 거리를 달리는 퀵서비스 기사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그리 편치 않다.

    풍경# 100 자동차에서 전차와 자전거로

    도시를 도시답게 하는 건 대로와 자동차의 물결이다. 자동차는 편리한 이동을 보장하지만 소음과 대기오염과 인명피해의 주범이 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이던 임화는 종로에서 ‘다시 네거리에서’라는 시를 썼다.

    지금도 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

    낯선 건물들이 보신각을 저 위에서 굽어본다

    옛날의 점잖은 간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다지도 몹시 바람은 거리를 씻어갔는가?

    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

    지붕 위 벽돌담을 기고 있구나.

    임화의 시에 나오는 전차는 1960년대에 사라졌고 지금 서울 거리는 완전히 자동차 거리가 되었다. 임화의 시가 발표된 지 50년 후 1985년 시인 최승호는 수도 서울 대로에서 ‘붕붕거리는 풍경’을 썼다.

    바퀴 달린 기계들이 질주하는 아스팔트다

    작은 차들이 큰 차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아스팔트다

    인간이 쥐처럼 벌벌 떤다

    불어나고 우글쩍거리고

    충돌하며 인간의 피를 먹는 기계들

    최승호가 위의 시를 쓴 지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자동차는 비교할 수 없게 많아졌다. 서울에서 자동차는 계속 늘어나고 차도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파리에는 세월이 거꾸로 흐르는지 사라졌던 전차가 다시 설치되고 자전거 타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인간다운 도시를 만들기 위한 파리시 정책의 일환이다. 파리만이 아니라 낭트와 스트라스부르 같은 지방 도시들도 전차를 다시 설치했고 자전거 타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느림을 견디는 파리 조급증에 빠진 서울

    서울 종로 북촌의 한 카페에서 본 한옥 지붕들.

    서울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이다. 그는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할 때 타던 자전거를 한 대 가지고 와서 서울 거리에서 타고 다녔다. 그때 자전거는 첨단의 교통수단이었다.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윤치호가 서재필에게 자전거 타기를 배운 다음 미국에 자전거를 주문해서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자전거가 사라졌지만 요즈음 서울에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잠원동 성당 맞은편 아파트 담 옆에는 파리의 ‘벨리브’처럼 빌려 탈 수 있는 자전거가 죽 줄지어 서있다. 그런데 언제 봐도 자전거를 빌려 타는 사람이 없다.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자기 자전거가 있지만, 어른들은 자전거 탈 생각을 안 한다. 자동차가 점령한 서울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기는 아직 위험한 모양이다.

    풍경 #101 도시 산책

    ‘때때로 사는 서울을 미워하다가 그를 아주 버리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에는 그 교외에 약간의 사랑스러운 산보로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들어 있다.’

    1935년 시인 김기림이 쓴 수필 ‘청량리’의 첫 구절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도시는 조용히 걸을 수 있는 장소를 곳곳에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파리에 살 때 시내 중심부에 있는 뤽상부르 공원이나 생루이 섬에만 가면 세상 걱정을 다 잊고 고요한 산보와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서울에도 곳곳에 그런 장소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서초동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친 나는 거의 매일 저녁 서리풀 공원의 나지막한 산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서편 동작동과 상도동 쪽으로 지는 저녁노을을 볼 수도 있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소나무길을 걸을 수도 있고 보름달을 바라볼 때도 있고 흰 눈이 내린 길에 발자국을 남길 수도 있다. 그 산길 중간에서 팻말에 적힌 류근조의 시 ‘교외(郊外)에서’를 읽어보기도 한다.

    모처럼

    벤치에 홀로 앉아

    쏟아져 내리는 은행잎들을

    바라보노라니 아찔하게

    뉴턴의 중력重力같은 게

    기중기起重機처럼 나를

    공중으로 집어 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휘둘러보니

    아직은 햇볕이 부신 오후

    은행나무 둥지는 그대로

    제자리에 앉아 있었고

    앙상한 몇몇 가지엔 여전히

    순금의 신神의 시간들이 머물러 있었다.

    느림을 견디는 파리 조급증에 빠진 서울
    정수복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사회학박사)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現 한국문화사회학회 이사

    저서: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


    도시는 혼잡과 잡담의 공간이다. 타락과 퇴폐의 소굴이고 온갖 범죄와 비극의 온상이다. 그러나 도시 한가운에서 한순간 초월적 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 있다면 그 도시는 살 만한 도시다. 도심을 걷다가 어느 장소에서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영이나 환상을 볼 수 있는 도시, 시적인 순간을 느낄 수 있는 아우라가 있는 도시, 그런 도시에서 맑은 공기를 숨 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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