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러당 90엔 돌파 … 막 내린 엔고 시대
- 달라진 원화 위상 … 대체안전자산으로 급부상
- 1100원 지키면 ‘엔저쇼크’ 버틴다
엔화 환율은 과거에도 강세와 약세를 반복해왔다. 은 실제 환율과 환율의 중기 추세를 보여주는 12개월 이동평균선, 장기 추세를 보여주는 24개월 이동평균선을 함께 나타낸 것이다. 실제 환율이 12개월선과 24개월선을 뚫고 올라가면 강세에서 약세로 추세 전환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2012년 초엔 엔/달러 환율이 12개월선을 벗어났지만 24개월선을 뚫지 못해 그 후 다시 강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최근에는 24개월선을 뚫고나와 엔화 약세로 추세 전환이 보다 명확해졌다. 2011년 초엔 일본은행이 양적금융 완화를 확대하고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되긴 했어도 이를 확실하게 추진하지 않았던 데 반해, 이번에는 아베 정권의 강력한 금융완화 및 엔저 의지가 반영되면서 엔고에서 엔저로 추세 전환이 좀 더 명백해지고 있다.
다른 주요 통화들과 비교해도 엔화 가치의 하락 폭은 유난히 크다. 2012년 하반기 이후 최근까지 노르웨이의 크로네가 달러에 대해 7.9% 절상된 것을 비롯, 유로와 스위스프랑이 각각 5.7%, 4.6%, 원화가 4.6%, 위안화가 2.0% 절상된 데 반해 엔화는 14.7%나 절하됐다.
“무제한 양적금융완화”
경기부진이 심화되고 양적완화 확대 필요성이 크게 높아지면서 ‘안전통화’로서 엔화의 매력이 상당히 약화됐다. 반면 원화 및 원화자산에 대한 평가는 과거에 비해 크게 향상됐다. 일정한 수준의 수익성과 더불어 안전성도 크게 높아진 것으로 평가되면서 원화는 국제사회에서 대체안전자산(alternative safe haven)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 결과 원/엔 환율도 빠르게 하락, 2010년 초 이후 3년 만에 1100원대에 진입했다.
2007년 리먼 쇼크 이후 6년째 지속돼 온 엔고 사이클이 최근 끝날 조짐을 보이는 것은 글로벌 금융시장의 위험이 완화되는 상황에서 일본의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일본 정부의 엔저 정책에 대한 기대가 고조됐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11월 아베 내각 출범이 확실해지면서 10월 초부터 이미 약세를 보이기 시작한 엔화의 하락세가 더욱 빨라졌다. 신임 아베 총리는 선거 과정에서 ‘2~3% 물가상승을 목표로 무제한으로 금융을 완화하겠다’‘일본은행법을 개정해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시중에 유통시키지 않고 일본은행이 직접 인수하도록 하겠다’는 등 초강경 발언을 거듭하며 엔화 약세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킨 바 있다.
그동안 일본은행은 미국의 양적금융완화에 대항하는 수준으로 양적금융완화 규모를 확대해왔고, 지난해 초에는 일본은행의 이러한 인플레이션 정책에 대한 기대로 일시적으로 엔저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번에는 아베 내각이 ‘무제한’ 양적금융완화, 그리고 일본은행으로 하여금 2~3%의 물가상승 목표 설정을 강제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국내외의 투자가들이 본격적으로 엔화 매각에 나섰다.
그간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이 지속됨으로써 미국 등 여타 국가와의 물가상승률 격차는 벌어졌고, 이것이 엔화에 대해 중장기적인 절상 압력으로 작용해왔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아베 내각이 인플레이션 유도를 공공연하게 내세우면서 엔화 환율의 중장기 흐름에도 변화 가능성이 감지된다. 아베 내각이 인플레이션과 엔저를 공약처럼 내세우면서 중의원 선거에서 대승한 데다 오는 7월에는 참의원 선거도 예정돼 있어 당분간 일본 정부는 민의를 내세워 엔화 약세 유도에 전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행이 직접 정부 국채를 인수하는 방안은 부작용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 명목 GDP의 2배가 넘는 막대한 정부 부채를 안고 있는 일본은 해마다 재정적자가 누적되고 있다. 일본 국채에 대한 신뢰가 하락해 금리가 2~3%p만 급등해도 재정에 미치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국가 예산 편성조차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일본 국채를 대량으로 보유한 일본계 은행들은 국채가격 하락으로 막대한 투자 손실을 입게 돼 다시금 금융경색에 빠질 수 있다. 더군다나 이런 영향은 일본 국내로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구미 금융기관들이 리먼 쇼크 이후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대출자산 회수에 나선 상황이다. 그 공백을 메우고 있는 일본계 은행마저 자산 매각에 나설 경우 글로벌 금융경색이 심화될 우려도 있다.
아베 내각은 전통적으로 대규모 공공사업을 선호하는 자민당 정책을 기반으로 현재 사업규모 20조 엔이 넘는 긴급 경제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200조 엔 규모의 국토정비계획도 밝혔다. 대규모 경기부양책 및 공공사업 실행으로 재정적자가 확대되고 국채발행 물량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아베 정권은 이를 일본은행이 인수하게 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용인하고 엔화 약세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엔저 가속화엔 한계
하지만 이런 정책을 전면적으로 실행에 옮길 경우 위험도 작지 않다. 전 세계 투기세력에 엔저 정책은 일본 국채 투매를 통한 막대한 투자수익 기회를 의미한다. 이 경우 엔화 가치는 매우 불안정한 국면으로 진입해 일본 정부의 통제범위를 벗어날 수도 있다. 이런 위험요인을 감안한다면 아베 내각의 정책에도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일본은행의 인플레이션 목표에 대한 간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일본은행법이 일부 개정될 가능성은 있지만 일본은행의 국채 인수를 전면 허용하는 법 개정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 이후 엔화 약세가 가속화한 데는 9월 일본의 경상수지가 일시적으로 적자를 기록한 것도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자력발전소 가동이 중단되면서 천연가스 수입이 급증해 일본의 경상수지가 빠르게 악화됐다. 특히 지난해 9월 일본과 중국 간 영토 문제까지 불거져 일본의 대중(對中) 수출이 14%나 감소하면서 경상수지에서 적자를 냈다.
일본 전자업체들이 TV사업에서 대규모 적자를 지속하는 등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 현상은 향후 무역수지 적자 기조를 더욱 고착화할 전망이다. 일본의 경상수지 구조는 해외자산으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인 소득수지가 경상수지 흑자를 뒷받침하는 양상이다. 하지만 일본의 해외자산은 채권 등 현금성 자산이 많은데다 그마저 최근의 선진국 금리 하락으로 인해 투자수익 확대에 한계가 따른다. 한편 지속적인 엔고로 일본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 해외 기업에 대한 대규모 인수합병(M·A)이 확대되면서 투자수지 적자 또한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안정화로 일본의 해외 증권투자가 회복되면서 엔화 약세 요인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2012년 일본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700억~800억 달러에 그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올해는 경상수지 흑자 폭이 다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경기의 회복과 엔화 약세 효과로 수출증가율이 당초 예상보다 높아질 전망이다. 한편 원자력발전에 좀 더 적극적인 자민당 정권의 재등장으로 일부 원자력발전소가 재가동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천연가스 등 원자재 수입 수요 둔화 요인으로 작용한다. 원자재 가격도 이란 핵 위기가 전쟁 상황으로까지 가지 않으면 2013년에 전반적으로 안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일본 경상수지 흑자가 과거처럼 큰 폭으로 늘어나긴 어렵고, 지난해보다는 소폭으로 늘어 올해는 900억~100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경상수지 측면에서 엔화 약세의 가속화에는 한계가 있을 듯하다.
제조업 약화, 무역수지 적자, 막대한 재정적자 누적 등 과거 엔고를 지탱해온 일본 경제의 강점과 안정성이 후퇴했는데도 그동안 엔고가 지속된 것은 2007년 리먼 쇼크 이후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이 크게 확대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직도 세계 최대 순채권국이다. 엔화 또한 안전통화 지위를 유지해 유로존 위기로 인한 위험이 고조될 때마다 엔화가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이후 유럽 재정위기가 소강상태에 들어서고 미국의 재정절벽 협상도 큰 고비를 넘기면서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심리가 회복된 것이 엔화에 대한 수요를 둔화시켰고, 특히 올해 초부터 엔화 약세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만 유럽 경제는 장기 정체 양상을 보이면서 긴축을 해도 재정적자가 계속되는 악순환이 나타나는 등 재정불안이 지속되고 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할 은행동맹이나 재정통합도 단시일 내에 성과를 내기 어려워 앞으로 상당 기간 금융 불안과 실물경제 침체가 지속될 전망이다. 미국도 재정지출 삭감 방안에 관한 완전한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다소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다. 이처럼 국제 금융시장의 위험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엔화 약세 압력을 가중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일본에 이어 미국이나 유럽도 ‘제로금리’ 정책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등 비정상적인 통화정책 환경이 올해 안에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0년 만기 국채금리 기준으로 과거 3~4%p에 달했던 미일 간의 금리차가 1%p 정도로 축소된 상황에서 엔화가 달러화에 대해 큰 폭의 하락세를 이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지난해 12월 공개시장위원회(FOMC)를 통해 미국의 실업률이 6.5%(12월의 실업률은 7.8%)로 떨어질 때까지 제로금리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FRB의 공식 견해로는 2015년 이후에나 실업률이 6.5%로 떨어질 것으로 보여 미국의 제로금리 정책은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올해 미국이 금리를 인상 할 공산은 거의 없어 미국 경기의 회복세로 미일 간 금리차가 다소 확대되더라도 그 폭은 제한적일 것이며, 이에 따른 엔저 압력의 가속화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최근 엔고의 원인과 강도, 지속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엔고 사이클의 마감은 비교적 명확해 보여도 엔화의 절하 폭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0년대 후반 이후로는 실제 환율의 변동폭이 수출물가로 본 구매력평가 환율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최근의 엔고 시기에도 엔화의 절상 폭은 제한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의 ‘초엔고’ 시기에는 명목 엔/달러 환율이 수출물가를 기준으로 한 구매력평가환율에 거의 근접하는 수준까지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2012년의 경우 수출물가 기준 구매력평가 환율은 달러당 47엔에 달하지만, 실제 환율의 최저치는 76엔 수준에 그쳤다. 엔고기에는 수출물가를 기준으로 한 구매력평가 환율 부근까지 엔화가 절상됐고, 엔저기엔 생산자물가를 기준으로 한 구매력평가 환율을 한계선으로 해서 엔화가 약세를 보이는 패턴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에는 실질 엔화 가치 대비 명목 엔/달러 환율의 변동폭이 과거에 비해 작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대 들어서는 엔화 약세가 생산자물가 기준 구매력평가 환율을 소폭 상회하는 수준까지 진행된 경우도 나타난다. 이는 일본 경제의 위상 약화라는 구조적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질 엔화 가치를 기준으로 한 절상 및 절하의 한계선과 국제금융시장의 위험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이번에도 생산자물가 기준 구매력평가 환율 수준 부근을 엔화 약세의 한계선으로 볼 수 있다. 2012년 1~11월 기준으로 본 생산자물가 구매력평가 환율은 달러당 92.5엔이다.
따라서 엔화 약세가 상당한 정도로 가속화되더라도 올해 상반기 중에는 달러당 92~93엔 전후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80엔대 초중반 수준에 머물렀던 주요 글로벌 금융회사들의 엔/달러 환율 전망치가 최근 들어서는 90엔대로 상향조정되는 흐름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아베 내각에 대한 기대와 함께 엔화 약세가 진행되겠지만, 점차 정책 효과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엔저 흐름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올해 평균 엔화 환율이 달러당 90엔대로 올라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순채권국인 일본이 해외투자를 확대하지 않으면 엔고가 발생하기 쉽고, 미일 간 금리격차가 과거처럼 크지 않은 상태에서 아베 내각의 무리한 엔저 유도 정책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경우 급격한 엔고로 돌아서는 반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달러당 85~92엔 머물 듯
엔화 환율 하락세는 일본 기업의 수익확대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이후 엔화가 지속적으로 강세를 나타냈지만, 구매력평가 환율 수준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했다. 반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기업들과의 경합은 더욱 치열해졌고, 수익 또한 압박을 받아온 터라 향후의 엔화 약세는 일본 수출기업들의 수익성 제고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교역상대국과의 교역규모와 물가수준을 고려해 계산되는 일본의 실질실효 환율은 2007년 7월에서 2012년 11월 사이에 21.9% 절상된 반면 한국, 미국, 독일 등은 하락세를 보였다. 특히 일본 재계에서는 엔화가 강세를 보이는 동안 한국의 원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한일 간 경쟁력 측면에서 일본이 크게 불리했다는 인식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원화와 엔화 사이의 상반된 흐름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했다. 과거에는 두 나라 경제 및 산업구조의 유사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원화와 엔화의 가치가 비슷한 흐름을 나타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제금융시장에서 엔화가 대표적인 조달통화로 급부상하면서 엔화 가치는 자국의 경제상황을 반영하기보다는 국제적인 금융위험의 척도로 부각됐다. 장기 경제침체로 인해 제로금리 및 양적완화 정책을 지속하면서 캐리 트레이드 등에 있어 투자자금 조달처가 됐기 때문이다. 반면 원화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그동안에는 유사시에 변동성이 크게 높아지는 위험통화로 인식됐다.
그 결과 세계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국제금융시장이 안정적일 때에는 원화 강세-엔화 약세를, 세계경기가 급락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지면 원화 약세-엔화 강세를 나타내는 패턴이 정형화하고 있다. 원화와 엔화 사이의 동조성은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현저하게 낮아졌으며, 국제금융시장이 크게 불안하거나 불안이 해소되는 국면에서 원/엔 환율의 변동 폭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향후 국제금융시장의 안정이 지속된다는 전제하에 원/엔 환율의 하락 폭이 원/달러 환율 하락 폭보다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과 같이 실질실효 환율의 장기 추세를 보면 2012년 말 시점은 지나친 엔고도, 지나친 원화 약세도 아닌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2006~ 2007년경 원화가 고평가 국면에 진입했을 때 이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경쟁력을 높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이후 원화 가치가 크게 절하되면서 가격경쟁력도 크게 높아졌지만, 지금은 거의 대부분 소멸돼가는 상황이다. 따라서 상당수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실적 호조세는 원화 가치가 급등락을 나타내는 동안의 가격경쟁력에 더해 그만큼 경쟁력이 강화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익숙해진 ‘위기 이후의 원화 저평가’ 국면이 더는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향후 엔화 약세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원화 가치가 과거와 같은 고평가 국면으로 진입하면 한일 간 경쟁에서 한국 수출산업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엔저에 따라 일본의 자동차, 전자산업, 기계 등 주요 수출기업이 혜택을 보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일본 자동차 산업이 엔저로 크게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돼 자동차 산업에서 한일 기업 간 경합이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전자산업은 디지털 가전의 평판TV나 스마트폰 등의 분야에서 한일 기업 간 경쟁력 격차가 확대된 상황이라 약간의 엔저로 한국 기업이 큰 충격을 받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예상 외로 달러당 110엔대를 넘는 엔저가 발생할 정도가 되면 한국 수출산업 전반에 대한 충격이 클 것으로 보인다. 엔화 환율이 2008년 3월 수준, 즉 달러당 114엔 정도까지 도달할 경우 도요타의 영업이익이 2조6200억 엔(닛케이비즈니스, 2012.9. 10)으로 2012년 3월 결산 실적의 7.3배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일본 자동차 기업의 수익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이 자유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한 1997년 말 이후 엔화가 원화에 대해 약세를 나타낸 대표적인 시기는 2004년 초부터 2007년 7월까지 3년여에 걸친 기간이다. 이 기간에 원/엔 환율은 100엔당 1123원(2004년 1월 초)에서 746원(2007년 7월)으로 약 34% 하락했다.
2004년 초를 기준으로 이전 원/엔 환율이 일정한 범위 내로 유지되던 기간과, 이후 원/엔 환율 하락 시기에 우리 경제의 모습을 비교하면 와 같다. 전반적인 성장률 수준은 세계경제의 경우 원/엔 환율이 하락한 엔저 시기에 가장 높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2000년대 중반 서브프라임 사태 발생 직전까지 세계경제의 고성장-저물가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원/엔 환율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안정됐을 때의 성장률이 더 높았다. 엔저 시기에 세계 수요 여건이 우호적임에도 불구하고 2006~2007년 원고-엔저가 심화되면서 우리나라의 수출이 상당부분 제약을 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세계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과정에서 과잉 유동성으로 인해 발생한 석유 등 원자재 가격의 급등이 우리 경제의 소득증가를 제약한 측면도 있다.
자동차 ‘흐림’, 전자업체 ‘맑음’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좀 더 눈여겨볼 만하다. 2004~2007년에 지속된 세계 경제의 호황 국면에 힘입어 2004년까지는 원/엔 환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우리 수출이 높은 신장세를 나타냈다. 하지만 원화 강세와 엔화 약세가 심화되는 2005년 이후가 되면 수출증가세가 눈에 띄게 둔화할 뿐 아니라 수출제조업의 영업이익률도 소폭 하락했다. 일본과의 경합도가 높은 전기전자 부문이나 자동차, 철강 등의 업종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엔화가 약세를 나타낸다는 것은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이 완화되면서 세계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엔화 약세기에 원화가 강세를 띠더라도 세계 수요의 확대를 동반하는 경우에는 전반적인 수출증가세가 유지될 수 있다. 반면 최근처럼 세계 수요의 회복 속도가 느린 시기에 외채 증가를 동반한 원화 강세 심화 또는 원화 고평가 국면으로 진입할 때는 수출 위축이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전기전자 업종이나 자동차, 선박 등 운수장비, 철강, 화학 등 일본과의 경합도가 높은 업종 및 품목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다.
최근 자동차나 철강 등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업종지수 부진은 이러한 상황 판단 및 기대를 반영한다. 반면 전기전자 업종은 휴대전화, TV, 반도체 등 적지 않은 품목에서 상당부분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있어 원/엔 환율 하락으로 인한 주가하락 요인이 상대적으로 작게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엔화가 달러당 90엔 안팎의 수준에 그치고 원화 가치도 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원/엔 환율이 100엔당 1100원을 크게 밑돌지 않는다면 한국 경제·산업에 대한 엔저 충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