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사회의 부조리나 불합리를 고치는 데 기여하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위로나 희망이 됐으면 하는 것이다. 역사라는 건 이미 실제로 일어났던 경험이므로 그 경험에 대한 이해는 곧 지금의 나나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유력한 방법이다. 이 연재는 그 이해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염이나 오해를 살펴보는 것이다. 진실을 잘 드러내기 위해, 오염을 줄이기 위해.
1월 25일 포털사이트 다음의 메인 화면에 필자가 ‘신동아’에 연재하고 있는 꼭지 중 1월호에 실린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질문 자체가 허구다’ 기사가 올라왔다. 어찌 반갑지 않으랴. 그런데….
-무슨 기자가 글을 이렇게 어렵게 쓰냐
-보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기사 내려라
-왜 이리 길어. 스크롤바 있어서 다행이네
이런 댓글은 오히려 이해가 간다. 아예 글쓴이가 기자인지 교수인지도 모르고, 기사는 연예인 신변잡기 읽듯 휙 읽고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니까, 그러려니 하면 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댓글은 고민이다.
① ‘이순신이 없었다면’, 왜 이 질문이 안 돼?
② 이 글의 요지는 ‘박정희가 없었다면’, 이런 질문은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박정희의 경제발전을 정당화하려는 논리인가?
③ 왜 이순신이야? ‘이승만이 없었다면’ ‘전두환이 없었다면’, 이런 질문을 해야지
1월호에서 내가 했던 얘기는 이렇다. 역사학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그 일을 했다는 사실만, 즉 임진왜란의 종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사실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학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해전에서 승리했을지 패배했을지에 대해선 논의할 수가 없다. 왜? 일어난 일이 아니니까! 일어나지 않았으니 사료(史料)가 없다. 그러니까 논의할 수 없다는 거다. 물론 영화나 소설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가정 아래 역사를 쓸 수는 없다. 그럼 이미 역사(학)가 아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지난 2월호에서 ‘판 페르시 없는 맨유’에 대한 영국 ‘더선’지의 기사를 통해 복습까지 한 것이다.
위 댓글에서 ‘허구적 질문의 오류’를 이해하는 것이 역사 탐구의 기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①은 허구적 질문의 오류, ②는 의도 확대의 오류다. 나의 의도를 넘겨짚은 데서 발생하는 오류다. ③은 비일관성의 오류다. 이순신에 대해서는 그런 가정을 하면 안 되고, 이승만 전두환에 대해서는 그런 가정을 해도 된다는 이중 잣대의 오류다. 내가 연재하는 글은 바로 이런 오류를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뜻이다.
정확성은 의무 아닌 미덕?
지나간 과거를 증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 진실은 결코 단순하지도 않고 순수하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더욱이 역사학자가 역사적 진실을 이야기하는 과정은 역사적 사건이 말하는 사실(事實)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얽히고설켜 있다. 나아가 역사가는 진실을 말해야 할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그것의 진실성도 보여줘야 한다. 말하자면 역사가는 성실성에 의해서 평가될 뿐 아니라 증명하는 능력에 의해서도 평가받는다.
지금 우리는 역사탐구 과정의 오류를 살펴보는 중이다. 크게 탐구-서술-논쟁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살펴보고 있다. 역사탐구 과정은 질문을 하고(문제 제기, 문제의식), 사실을 검증하고, 사실의 의미를 따지는 작업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그 세 단계마다 나타나는 오류가 있다. 지난 호까지는 역사탐구 중 질문이나 문제 제기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살펴봤고 이번에는 사실 증명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살펴보려고 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 관동대학살이 일본 자경단의 선동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은 그 말하는 의도와 상관없이 참이다.
“그 큰 전투(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가 1065년이나 1067년이 아니라 1066년에 벌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스트본이나 브라이턴이 아니라 헤이스팅스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다. 역사가는 이런 것들에서 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문제들이 제기될 때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라는 하우스먼(1859~1939)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역사가를 정확하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것은 어떤 건축가를 잘 말린 목재나 적절하게 혼합된 콘크리트를 사용해 집을 짓는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의 작업의 필요조건이지만 그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 바로 그러한 종류의 일들을 위해서라면 역사가는 역사학의 ‘보조학문’-고고학, 금석학(金石學), 고전학(古錢學), 연대측정학 등과 같은-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의지할 자격이 있다.”(‘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 김택현 옮김, 까치, 1997, p.21)
이 대목은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특히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라는 경구(警句)는 마치 역사학도가 됐음을 자부하듯 상투적으로 듣고 말했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카의 말에 대해, 지금 내가 저본으로 삼고 있는 ‘역사가의 오류( Historian′s fallicies)’의 저자 D H 피셔는 ‘오만한 태도’이며, ‘불행한 습관’이라고 지적했다. 왜 그럴까? 피셔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들은 종종 특정 진술이 정확할 것이고, 누군가가 그 정확성에 책임을 질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태도야말로, 왜 그토록 많은 역사적 진술이 실제로 부정확한지를 설명해준다.”
역사학자가 자신이 한 진술의 사실 증명을 위해 편하게 동원할 수 있는 보조학문은 없다. 이런 점에서 또 자신의 책임을 면제해줄 사람도 없다. 카의 견해는, 역사 탐구와 뗄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한 데서 나왔다.
상대주의자의 오류
사실 검증 과정에 대해 역사학계가 소홀하게 된 두 번째 이유로는 상대주의의 만연을 들 수 있다. 이 ‘어리석고도 유해한’ 교리는 1930년대부터 대중적으로 유행했다. 흔히 ‘보기 나름’이라고 양해하거나 배려하는 행태는 역사학과 역사가에 대한 냉소나 무력감과 같은 온갖 부정적 시각을 잉태했다. 역사학자가 마치 실제 일어난 일보다는 그가 믿고 있는 것을 다루는 사람처럼 여겨졌고, 심지어 역사 무용론, 역사 경멸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차츰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이 축적됐다. 그 비판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상대주의자들은 지식을 갖게 되는 과정과 지식의 명징성 간의 차이를 혼동한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1910년에 일본이 조선을 점령했다는 주장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할 수도 있다. 이 진술은 ‘그렇게 말한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사실이다. 한편 일본 역사학자들도 ‘어떤 의도에서’ 1910년에 일본이 조선에 의해 강점됐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진술은 거짓이고, 앞으로도 거짓일 것이다. 위안부 강제동원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정치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일본 자경단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말로 선동해 재일 조선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진술은 참이다. 일본 교과서 담당자들이 ‘무언가의 의도를 가지고’ 관동대지진 때 재일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진술은 의도와 상관없이 오류다.
이러한 어떤 지식(사실)의 의도 또는 배경에 대한 불확실성이나 의심을 사실 자체의 불확실성과 혼동하는 사례는 많이 있다. 이를 논리학에서는 ‘의도 확대의 오류’라고 부른다. 물론 상대주의의 이런 혼동은 ‘인신공격의 오류’ 등 다른 오류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둘째, 상대주의는 역사의 설명이 사실상 전체가 오류인데도 부분적으로만 오류라고 잘못된 논의를 편다. ‘불완전하다는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역사 설명은 전체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불완전한 설명이 객관적으로 참인 설명일 수 있지만, 그것이 전체적으로 진실일 수는 없다, 즉 부분만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대주의자들은 ‘전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관념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 전체가 참이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는 억지가 상대주의자들의 강력한 무기다.
사이비 증거
셋째, 상대주의는 역사와 과학의 차이를 잘못 설정하고 있다. 역사학은 과학과 달리 실증을 통해 일반성, 법칙성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선입견, 편견, 신념, 신앙 등에 따라 역사가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한 역사 서술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안된 말이지만 과학자도 이는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컴퓨터 과학자는 자신의 교회에서 주장하는 창조론을 옹호하기 위해 시사지 ‘타임’ 기사를 조작했다.
넷째, 상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이나 친구들은 상대주의로부터 어느 정도 예외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상대주의자 카를 만하임은 인텔리겐차를 진위 판정의 담당자로 상정했다. 하지만 이는 일관성이 결여된 견해다. 왜 인텔리겐차 외의 사람은 상대적인 진실(거짓)의 보유자로 남아 있고, 인텔리겐차만 사회 진단과 종합화의 전범(典範)이 되는가. 이런 점에서 ‘일관된 상대주의’는 자기논리를 부정하는 ‘지적인 자살’이다.
다섯째, 상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주관성이란 관념은 그 자체가 난센스다 ‘주관적’이란 낱말은, 그 반대어가 의미가 없으면 그 말조차 의미가 없는 연관 용어다.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은 짧다’는 말과 같다. 뭔가가 길지 않으면 짧은 것은 있을 수 없듯, 어떤 지식이 객관적이지 않다면 주관적인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 어떤 역사학자도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 전체’를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인 역사 지식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렸다.
사이비(似而非).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비슷하지만 아니다’는 뜻이다. 증명에도 사이비 증명이 있다. 사건에 맞는 증거를 찾아 서술하다보면, 첫눈에는 정확하고 실제에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던 증거가 의미 없는 것으로 판정날 수도 있다. 또 질문에 대해 엉뚱한 답변을 내놓는 동문서답형 증거도 있다. 그중 잘 빠지는 오류가 ‘부정 증거(negative proof)의 오류’다.
부정 증거란 사실 명제를 부정 증거로 떠받치려는 시도다. 이런 경우이다. 역사학자가 “X가 일어났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난 뒤, 이를 근거로 “그러므로 비(非)-X가 사실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일이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주인공 해리슨 포드가 친구들과 성배(聖杯)를 찾아 나섰으나 끝내 못 찾았다고 치자.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찾아볼 만한 곳은 박물관부터 수도원의 보존소까지 다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때 해리슨 포드가 “성배는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물론 지구상에 성배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지 “성배가 있다는 증거를 우리는 못 찾았다”는 것일 뿐이다. ‘성배가 없다’고 결론 내리려면, 경험적으로(역사적으로) 올바른 과정을 통해 ‘성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줄 ‘긍정 증거(affirmative proof)’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종종 역사학자들이 “X는 깊게(넓게) 연구되지 않았다”고 말하면, 실제 ‘X에 대해 깊게 연구된 게 없는 게’ 아니라 대개 “나는 X에 대해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는 고백을 뜻한다.
‘가능한 증거(possible proof)의 오류’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는 참 또는 거짓의 가능성만을 제기함으로써 사실 진술이 실제 참인지 거짓인지 보여주려는 데서 생기는 오류다. 명백한 증거가 없을 때 생겨나게 마련인 문제 제기를 실제 참과 거짓을 가리는 증거로 들이대는 일은 심각한 오류 중 하나다. 경험적 증거는 가능성의 제기를 요구할 뿐 아니라 개연성도 요구한다. 벼락은 누군가가 평생에 서너 번 맞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럴 개연성은 거의 없다. 가능성 중에 실제 현실화할 수 있는 것이 곧 개연성이다. 더구나 그냥 개연성이 아니라, 해당 사실을 지지하거나 부정하는 개연성의 균형도 따져야 한다. 역사사가 법률가처럼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교리를 존중한다면, 마찬가지로 비합리적인 의심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순환 논증의 오류’는 많은 독자가 알고 있는 오류일 것이다. 전제를 ‘증명했다고 치고’ 결론을 내리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면서 생기는 오류다. 이 오류와 형제쯤 되는 것이 ‘가정 증명(presumptive proof)의 오류’로, 명제의 증명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들 오류와 사촌쯤 되는 오류가 다 알다시피 ‘증명(prevalent proof)의 오류’다. 이 오류는 증명 방법으로 다수의 의견을 끌어온다. 아마, 아, 그런 거, 하시는 분이 꽤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증명을 많이 듣는 환경에서 살고 있으므로.
됐다고 치고…
한때 조선시대 연구논문을 보면, 서론에 “조선 후기에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가 동요하면서…”라고 시작하는 게 유행이었다. 조선 후기만 해도 300년 전이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이제 겨우 반세기 지났다. 300년이란 시간을 너무 쉽게 한마디로 정리해버린 것이다. 조선 사회는 ‘상품화폐경제’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특히 자본주의 방식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비를 평민으로 만들려는 사상과 정책으로 인해 신분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이 ‘동요한다’는 특별한 증거가 없다. 그런데 ‘다 안다고 치고’ 논의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지막지하기 그지없는 서술이지만, 그땐 그랬다.
전에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놓고 어떤 역사소설가와 논쟁 같지 않은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이 주제는 나중에 역사 해석의 대표적인 오류 사례로 다룰 작정이니, 여기서는 그 일부만 살펴보자. 그 소설가가 하도 어처구니없는 근거로 십만양병설을 부정하기에, 나는 ‘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창했다’는 증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할 증거는 없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부정할 증거를 제시하라’고 말했다.
그 소설가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것은 율곡의 제자들인 서인(西人)이다’ ‘서인은 나쁘다’ ‘고로 십만양병설은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서인이 그렇게 나쁜지는 모르겠으나, 논리학에서 이런 논증을 ‘인신공격의 오류’라고 한다. ‘서인은 나쁘다’고 치고, 또 ‘나쁜 사람들이 한 말이니 거짓’이라고 치는 오류다. 공자는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진즉에 “그 사람이 형편없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는 말까지 막아버려서는 안 된다(不以人廢言)”고 점잖게 타일렀다.
나는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대해 당시의 시장(諡狀·시호를 내리면서 함께 주는 글), 묘비, 목격담 등 1차 사료 외에 “선조 7년(1574) 이이(李珥)가 황해감사로 부임해 황해도의 군적(軍籍·군사 명단)을 전국에서 가장 잘 정비했다는 평을 받았다”는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인용한 뒤 “이런 이이가 선조 16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십만양병’을 주장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어색한 일일까요?”라고 반문했다.
그랬더니 이분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부정하는 사료로 자신이 쓴 책을 내밀었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그러면서 “황해도의 군적을 잘 정비한 것과 십만양병 주장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라고 단정했다. 군적 정비가 군대에 동원할 병력을 파악하는 일인데, 이런 분야를 정비했다면 군사 십만 명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을 개연성이 높을까, 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을까. 이야말로 삼척동자에게 물어볼 일이다.
많은 역사가가 어떤 사건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과, 그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어떤 사건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결코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타당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떤 사건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무시하는 것이 그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음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역사 증명의 규칙들
역사탐구에 필요한 증명이라는 점에서 확인해본 오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건전한 증거는 증명해야 할 사실(factum probandum)과 증거(factum probans) 사이에 만족할 만한 관계가 설정돼야 한다. 너무 뻔한 말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역사학도는 ‘만족할 만한 관계’에 대한 기준이 증명해야 할 사실의 성격에 의해 결정적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을 그렇게 선명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역사학에서 모든 사실은 질문에 대한 답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질문B에 대해 쓸모 있고 참이며 충분한 증거가 질문A에 대한 답변으로는 쓸모없고 잘못된 답변일 수도 있다. 역사학자는 ‘올바른’ 사실을 ‘제대로’ 확보해야 한다. 이로부터 논리적 모순이 없는 ‘정합성(整合性)의 규칙’이 연역될 수 있다. 역사 증거는 다른 질문이 아닌 해당 질문에 대한 직접 답변이어야 한다.
둘째, 역사학도는 ‘그런대로 납득할 만한(good)’ 상응 증거를 제시해야 할 뿐 아니라, ‘가장 합당한(best)’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가장 합당한 증거는 그 사건에 가장 직접적인 증거를 말한다. 물론 최선의 증거는 사건 그 자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신뢰할 만한 흔적, 직접 관찰 등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직접성의 규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증거는 항상 긍정 증거(affirmative evidence)라야 한다. 부정 증거(negative evidence)란 용어상 모순이다. 부정 증거는 전혀 증거가 아니다. 어떤 대상의 비(非)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긍정 증거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자가 대통령과 통화를 하지 않았는데, 통화를 했다고 보도했다고 치자. 이때 이를 비판하려면 기자나 대통령의 입에서 긍정 증거가 나와야 한다. 아니면, 그때 기자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든지, 대통령이 다른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든지 하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증거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자의 보도를 반박할 수 없고, 의심이 가더라도 역사학도는 반박이 불확실함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이를 ‘긍정 증거의 규칙’이라고 부르자.
넷째, 어떤 역사적 견해에 대한 증명의 책임은 항상 저자에게 있다. 비평가도, 독자도, 제자도, 나아가 다음 세대도 아니다. 이를 ‘책임성의 규칙’이라고 부르자.
다섯째, 경험적 증거에서 나온 모든 추론은 개연적이다. 그러므로 단지 A가 가능한 증거임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사학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다른 대안의 개연성과 연관시켜 A 증거의 개연성을 판단해야 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역사학도는 비(非)A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A를 반박할 수 없다. 오직 비-A가 A보다 더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만 반박할 수 있다. 이를 ‘개연성의 규칙’이라고 부르자.
정조와 애덤 스미스
여섯째, 어떤 사건에 대한 서술의 의미는 그 사건이 원래 갖고 있던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역사적 증거가 되는 서술도 시간과 공간을 떠나 마음대로 떠다닐 수는 없다. 어떤 증거도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영종대왕(영조) 52년-청나라 건륭 41년이다-3월 병자일(丙子日)에 영종이 훙(薨)하고, 6일 만인 신사일(辛巳日)에 왕이 경희궁(慶熙宮)의 숭정문(崇政門)에 즉위하였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正祖)가 1776년에 즉위했던 사실에 대한 실록의 기록이다. 이 진술은 오직 조선의 한양이라는 지도와 영조 52년 병신년(丙申年)이라는 조선 사람들의 달력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 아메리카 앵글로색슨들에게 독립선언은 영조 52년도, 병신년도 아닌 1776년이라는 전혀 다른 해에 이뤄졌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한 해 역시 병신년이 아닌 1776년으로 유럽의 경제학자들에게는 기억될 것이다. 그나마 달력에 조회해볼 수 있는 날짜나 연도의 상대성은 눈에 쉽게 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실과의 맥락에서 볼 때 그 상대성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일곱째, 하나의 경험적 사건에 대한 서술이 그 사건에 대한 증거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정확도는 증거마다 사뭇 다르다. 훗날 역사가는 통계학자를 본떠 자신들의 진술이 지닌 양적(量的)인 의미를 하나하나 열거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해도 같은 효과가 언어의 뉘앙스에 의해 발생할 것이다. 이를 ‘정확성’의 규칙이라고 부르자.
위의 일곱 가지 규칙은 정상적인 역사가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고 무의식 중에 적용하는 규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이런 규칙을 염두에 두고 역사를 탐구하고 증명한다면 실제로 어느 정도는 개선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연구 훈련을 받은 역사학자들이 저지르는 실제 오류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런 규칙은 독자들의 비평의 안목도 높여줄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위험한 것은 역사학자가 독자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