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옛것과 새것 섞어 신문명 일군 융합의 땅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콘스탄티노플

  • 안연희 | 서울대 강사·종교학 chjang1204@hanmail.net

    입력2013-02-21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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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660년경 형성된 이 도시의 첫 이름은 비잔티움이다. 기원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이란 새 이름을 얻는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오늘날의 도시명은 이스탄불. 콘스탄티누스가 호령하던 4세기의 이스탄불로 여행을 떠나보자.
    옛것과 새것 섞어 신문명 일군 융합의 땅

    이스탄불의 상징물인 아야소피아. 비잔틴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옛 도시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콘스탄티누스 광장에 우뚝 서 있던 그의 기념주는 남아 있던 일부마저 불에 타 복원 작업 중이다. 황제의 행렬이 지나던 메세(Mese·중앙의 큰 길)의 경로 중 일부가 현대 도시 이스탄불의 도로로 활용되는 게 몇 안 되는 남은 흔적 중 하나다.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잔해만 서 있는 오래된 돌담은 언뜻 콘스탄티누스의 성벽처럼 보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행객의 추정일 뿐이다. 이스탄불을 찾은 관광객이 으레 들르는 토카프 궁전의 정문에서부터 펼쳐지는 제1정원의 왼쪽 담 안쪽에 자리 잡은 하기아 에이레네 교회는 콘스탄티누스가 아프로디테 신전을 개조해 세운 첫 비잔틴 교회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의 모습은 니카의 반란 때 하기아소피아와 함께 전소됐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한 것이다.

    눈 밝은 여행자라면 유적이 즐비한 구시가지 쪽을 향해 걷다 밀리온(Milion·도로원표)의 흔적에 발길을 멈출 것이다. 주춧돌만 남은 밀리온의 잔해는 1960년대에 발굴됐다. 본래 4개의 아치형 개선문이 정사각형을 이뤄 둥근 돔형 천장을 떠받치고 있던 건축물이었다. 밀리온 위에는 콘스탄티누스의 모후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발견해 보낸 그리스도의 십자가 유물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밀리온은 신도시 콘스탄티노플의 첫 이정표이며 초석이었다. 흔적만 남은 밀리온의 기둥뿌리 앞에 서니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됐구나 하는 감회가 몸을 감싼다.

    로마 대체할 ‘새로운 처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처럼 위풍당당한 로마 제국의 근간엔 제국의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간 로마 가도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밀리온은 바로 그 모든 길이 시작되는 로마 가도의 원점, 곧 제국의 출발점이던 로마의 황금 밀리온(Miliarum Aureum)을 본뜬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메세는 밀리온에서 시작해 콘스탄티누스의 원형 광장으로 쭉 뻗어나간 중앙대로였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는 정적 막센티우스, 리키니우스 등을 차례차례 물리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정제(아우구스투스)와 부제(카이사르)가 난립하던 사두정치를 끝내고 로마 제국의 명실상부한 최고권력자로 등극했다. 재통합된 제국을 더욱 효율적으로 통치· 방어하고 구(舊)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중앙집권적 권력을 확립하고자 그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유서 깊은 로마를 등지고 아시아와 유럽의 관문인 비잔티움에 도시를 새로 조성해 제국의 무게중심을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비잔티움은 애초 기원전 7~6세기경 그리스인 비자스가 델포이의 신탁을 받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다. 그 뒤 로마의 속주로 편입돼 세베루스 황제 때는 욕장과 히포드롬이 있는 로마식 도시로 개조됐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마침내 ‘대제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콘스탄티노플로 화려하게 탈바꿈한 것이다. 신도시의 건설은 새로운 로마, 그러니까 비잔틴 제국의 탄생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바람에 따라 노쇠한 로마를 대체해 갱생시킬 ‘새로운 처녀’로 거듭난 콘스탄티노플은 옛 로마를 모방하고 변형했다. 비잔틴 제국의 원점이 되는 밀리온의 건축은 바로 로마의 황금 밀리온을 모방하는 동시에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로마의 중심을 만든 의례적 행위였다.

    이 신도시의 건설 일화를 윤색한 후대 작가들의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긴 창을 들고 그 중심원점에서 직접 광활한 신도시의 경계선을 지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짐은 짐 앞에 걸어가는 보이지 않는 인도자이신 신께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널리 회자된 이 일화가 묘사한, 창을 들고 도시 경계선을 긋는 콘스탄티누스의 의식은 고대 로마 전통을 따른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이 오래된 도시지만 새로 건립됐다는 이중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행위였다. ‘새로운 태양’으로 떠오른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로마, 제2의 로마 콘스탄티노플을 창건한 것이다. 남쪽의 마르마라 해에서 황금뿔 만(Golden Horn)까지 부채꼴 형상으로 이어진 콘스탄티누스 성벽의 경계선은 옛 비잔티움의 면적을 몇 배나 넓혔다. 적극적인 이주정책, 곡식 수송선의 정박, 건축주에 대한 세금 면제 등 콘스탄티누스의 정책은 콘스탄티노플을 단기간에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황제의 개종

    콘스탄티노플의 또 다른 이점은 로마의 유서 깊은 가문과 원로원의 권위도,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크와 같은, 확립된 그리스도 교회의 전통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뜻대로 도시를 설계하고 그에 부합하는 제국의 종교로 그리스도교를 세우고 다듬기에 두루 용이했던 것이다. 옛 제국의 영광과 권위를 모방하면서도 새로움이 주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티누스의 유일무이한 권력을 효과적으로 상징화해 전시하도록 기획됐다. 웅장한 황궁과 함께 바실리카 구조의 원로원 의사당을 새로 세웠으며 기존의 공중욕장과 히포드롬을 더욱 크고 화려하게 증축했다. 황제가 신민에게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던 전차경기장과 광장은 상징적으로 특히 중요한 공간이었다.

    옛것과 새것 섞어 신문명 일군 융합의 땅

    콘스탄티누스의 대리석 두상.

    콘스탄티누스는 옛 비잔티움의 경계에 있는 밀리온 자리에서 새로운 시가지가 뻗어나가는 지점에 원형 광장을 만들고 중앙에 테베의 돌로 거대한 자신의 기념주(지금은 불탄 채 남아 있는)를 세웠다. 이 기념주 맨 꼭대기엔 프리기아에서 가져온 아폴론 신상의 몸통에 자신의 두상을 붙인 동상을 세워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게 했다. 도시 어디서나 보이는 높은 언덕에 세워진 거대한 기념주 위의 동상은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로마를 건설한 확고한 중심이며 세계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준 구원자라고 웅변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옛 로마의 중심 상징과 도시 구조를 모방한 새로운 로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비전과 구상을 주요 건축물에 형상화한,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콘스탄티누스의 관용령에 따라 박해받는 소수종교에서 황제의 후원을 받는 종교로 격상된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냈다.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구상과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조우는 건축물, 상징물을 배치하는 방식에 점진적 변화를 야기했다. 이를테면 로마와도 예루살렘과도 다른 비잔틴 제국의 특징을 담은 모델이 모호한 형태로나마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4세기의 콘스탄티노플은 극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대제가 로마가 상징하는 이교(異敎)와 절연하고 세운 그리스도교식 도시는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교부가 윤색한 이야기에 따르면, 결전을 앞두고 하늘에서(혹은 꿈에서) 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자를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그 문자를 수놓은 라바룸 군기를 앞세워 정적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후 그리스도교에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줬으며, 승리에 대한 감사로 콘스탄티노플을 세워 그리스도교의 신에게 봉헌했다.

    그러나 좀 더 객관적인 사료에 기대는 많은 역사가는 콘스탄티누스의 소명과 환시, 종교적 순수성에 의혹을 제기할 뿐 아니라 새 수도 창건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콘스탄티누스와 그리스도교의 관계, 그가 세운 콘스탄티노플의 성격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이다. 개종 이후에도 그가 종교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보였음을 입증하는 자료 또한 적지 않다. 개종 동기와 신심(信心)의 진정성을 놓고 서로 엇갈리는 주장이 맞선다. 제국 통합을 위한 전략적 선택, 아들과 혈족 살해에 대한 양심의 가책, 신의 소명에 사로잡힌 자의 종교적 과대망상 등 개종을 놓고 다양한 내외적 동기가 추론돼왔다. 그만큼 콘스탄티누스는 복합적 면모를 지닌 인물로 보인다.

    박물관 같은 도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 이후 그간 몰수한 교회 재산을 되돌려주고 성직자 세금 면제, 막대한 기부 등 특혜를 제공하며 친(親)그리스도교 정책을 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를 볼 때 그가 온갖 형태의 이교를 근절했으며 이교와 관련한 관습조차 용인하지 않았다는 일부 그리스도교 교부의 서술은 사뭇 그들의 소망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주색 황제 옷을 벗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 흰옷을 입은 것은 임종에 이르러서였다.

    콘스탄티노플의 기공식 및 준공식 때도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언급되지 않았다. 즉위 25주년을 기념해 40일간 열린 축제와 함께 성대하게 거행한 콘스탄티노플의 준공식 때는 금박을 입힌 대제의 거대한 목상이 거리 행렬의 중심에 서 있었는데, 목상의 손에는 도시의 수호신인 튀케 여신의 작은 신상이 들려 있었다. 로마 종교의 전통적인 유혈 희생제의는 제거됐지만, 이교의 의식과 황제를 숭배하는 의례는 그대로 재현된 것.

    다만 축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콘스탄티누스가 성 에이레네 교회의 미사에서 새로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기공식 때는 이와 비슷한 의식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제국의 이 새로운 수도가 마리아에게 봉헌되는 준공식 때 튀케 여신이 수호신으로 간주된 대목이다. 다른 신들의 신전이 전격적으로 폐쇄될 때도 튀케의 신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예외적으로 건재했다. 나중에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 논쟁을 낳은 마리아 숭배가 이 지역의 전통적 여신 숭배와 교감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렇듯 콘스탄티노플은 단지 그리스도교의 이상에 따라 세워진 도시도, 전통적 로마를 답습한 도시도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로마의 고대 문명이 남긴 유산이 후기 로마제국의 격변 속에서 서로 공존하고 하나로 통합돼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는 요람 구실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준공식 때 수도를 마리아에게 봉헌한 것처럼 그러한 통합의 구도 속에는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위치가 역전되는 조짐이 엿보였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사안에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공공장소가 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가져온 진귀한 기념물로 화려하게 장식됐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각 지역의 문화재로 가득한 거대한 박물관 같은 모습이었다. 히포드롬에 있었으나 현재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 있는 대형 청동 말들이나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 뒤에 있는 세 마리 청동 뱀 기둥은 현존하는 유물 중 단연 눈에 띄는 사례다.

    청동 뱀 기둥은 본래 기원전 479년 플라테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이 페르시아에 승전한 것을 기념해 델피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웠는데,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청동 말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광장으로 옮겨왔다. 그리스도교 교부 히에로니무스는 “콘스탄티노플이 등장하자 모든 도시가 발가벗겨졌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고대 종교의 힘이 깃든 성물을 신도시의 새로운 공간에 재배치한 콘스탄티노플의 도시 풍경은 후대에 점진적으로 진행될 그리스도교의 제국종교화와 이교의 쇠퇴를 예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고대 이교의 상징물들이 자신의 고유한 신전에서 분리돼 콘스탄티노플의 공공장소를 장식하게 된 것은 양가적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종교적 상징물의 임의적 자리 옮기기는 장소와 결부된 고유한 거룩함을 박탈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콘스탄티노플을 장식한 무수한 수집품이 이교의 힘이 여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둘째로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교 건축물이 대거 등장했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노플의 건설과 콘스탄티누스가 가진 그리스도교 신심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도시의 경관과 건축물이 그리스도의 달라진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 로마에 세운 대부분의 교회들은 도시 중심부가 아니라 주로 외곽이나 주변의 묘지에 위치했다. 그와 달리 콘스탄티노플에는 황제의 궁궐과 광장이 있는 도시의 심장부에 교회가 들어섰다. 궁궐, 광장, 교회가 밀접한 동선으로 연결되는 도시 설계는 이후 비잔틴 제국의 두 토대가 될 그리스도교의 종교 권력과 황제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예견하는 듯하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주교들은 황제의 권력을 뒷받침하고 제국을 떠받치는 새로운 지도자들로 부상했다.

    막강한 종교 지도자의 등장

    콘스탄티누스의 도시가 되기 전 비잔티움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별로 없던 곳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창건을 전후로 해 그리스도교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들은 사도들이 만든 기존 교회의 전통을 계승했다기보다 신의 대리자로서 자의식을 가진 황제가 세운 후 힘을 실어준 교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는 꾸려진 지 불과 몇 년 만에 총대주교좌로 승격됐으며, 교회의 수장은 황제의 최측근이 될 수 있는 선망의 자리가 됐다. 잘 알려진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리 논쟁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좌를 둘러싼 알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리우스 논쟁이나 네스토리우스 논쟁을 거치는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좌는 황제의 결정이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 유사본질파의 주교들로 여러 번 뒤바뀌며 요동치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주교들은 정치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하거나 권력을 위임받아 도시 지도자로서의 공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떠맡기 시작했다.

    이미 로마 제국의 곳곳에서 주교를 중심으로 통합된 그리스도교회가 상당한 사회적 힘을 획득하고 있었지만, 주교들이 명실상부하게 도시의 새로운 지도자요, 황제의 정치적 동반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현격한 변화였다. 콘스탄티누스의 공인 이후 주교들은 점차 세금 면제와 노예 해방권, 탄원의 권리, 민사소송의 중재권, 기부된 유산 관리권 등을 갖게 됐으며, 주교관을 하사받거나 공공 기금의 수혜자가 되는 등 막대한 혜택을 누리게 됐다. 그러한 혜택은 제국의 운영에 필요한 공적 역할을 담당할 의무를 수반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의무조차 새로운 힘의 일부였다.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그리스도교 주교들은 단지 황제의 위임을 받은 대리자 역할에 머무르지 않았다. 고대 도시의 명사들은 한마디로 ‘자신의 도시를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공공건물 건축, 기부, 자선 등 각종 공적 희사를 통해 그 사랑을 표현해 명성과 권위를 획득했다. 반면 주교들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자들’로 자처하고 모든 사람을 대신한 탄원자 역할을 하면서 새로운 도시 지도자의 권위 모델을 창출했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서 제국과 황제에 영합하는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대표적 인물이다. ‘가난한 자’라는 표상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신 앞에 선 인간의 보편적 상황을 의미한다. 막강한 사회적 힘을 획득한 주교들과 황제의 제휴와 공모, 힘겨루기와 타협은 이후 비잔틴 제국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반복돼 나타난다.

    황제와 그리스도교의 전략적 공존

    콘스탄티누스의 개종과 밀라노 칙령 포고와 관련한 이야기를 영웅적으로 들려주는 그리스도교 교부(에우세비오스, 소크라테스, 락탄티우스, 소조메노스 등)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스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와 교류한 가이사리아의 주교로서 로마 황제가 후원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확장과 통합에 적극적으로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니케아에서 열린 최초의 보편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가 한 역할을 상세히 기록했다.

    에우세비오스는 황제가 종교 문제에 개입하고 그리스도교 내부의 문제가 국가적 사안으로 다뤄진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상황을 신학적으로 해석했다. 먼저 그는 이전의 모든 역사를 콘스탄티누스의 시대에서 정점에 다다르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사로 재편해 서술하는 새로운 역사관을 도입해 당시까지의 세계사 연대기와 교회사를 서술했다.

    오리게네스의 제자 팜필루스에게 배운 에우세비오스는 신학적으로는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 지조가 없다는 평가를 받곤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에서 중도세력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할 정도로 동방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대제의 신임도 두터웠다. 337년 대제 사망 직후에는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와 업적을 성인이자 사도적 반열에 위치한 인물로 윤색해 찬양한 전기와 찬가를 지었다. 로마 황제를, 승리하는 그리스도교 시대를 열어준 지상의 신적 대리자로 격상시킨 그리스도교 정치신학의 한 범례를 제공한 것이다.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와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서술은 역사적 사실 자체보다는 그가 생각한 구원사의 관점에서 의미 있고 교훈적인 사건에 집중돼 있다. 콘스탄티누스와 정적들의 전쟁은 그리스도교와 이교적 우상숭배와의 종교 전쟁으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는 그리스도교의 승리와 동일시해 서술한 반면, 콘스탄티누스의 정적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아 마땅한 불경한 폭군으로 그려지고 있다. 엄밀한 역사적 관점에서 에우세비오스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과정과 자신과 콘스탄티누스의 관계를 윤색하고 그의 나쁜 평판이나 불미스러운 일은 고의적으로 누락 혹은 삭제했다.

    그리스도교 교부이자 성서신학자로서 그의 역사 서술의 목표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섭리하는 신의 역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의 모호한 종교적 태도, 무참한 친족 살해와 같은 부정적인 사실은 누락하거나 의도적으로 삭제했다. 그러한 선별과 편향성은 그 자신에게는 정당한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에우세비오스는 콘스탄티누스를 그리스도교 황제로 예찬하지만, 이교적 의식이 두드러졌던 콘스탄티노플의 건설 과정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말을 아낀다.

    콘스탄티누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심사가 제국의 통합과 일치, 자신에 의한 제국의 평화였다면, 그를 예찬한 교부 에우세비오스를 사로잡은 주제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그리스도교 시대의 도래와 구원사의 완성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로마 황제와 그리스도교 주교들의 제휴는 그러한 서로 다른 초점이 더 큰 그림 속에서 모호해지거나 봉합되면서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적 진심만큼이나 황제에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는 에우세비오스 제국신학의 진의도 논쟁적이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 속에, 자기 시대까지의 모든 역사를 그리스도교 중심의 거룩한 구원사로 재해석하고자 했던 주교 에우세비오스와, 그리스도교를 통해 자신의 제국을 통합하고자 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서로의 위치를 상대에게 투영하고 관철하며 제휴할 수 있었던 ‘전략적 공존’의 공간이 콘스탄티노플에 마련됐다고 보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새로운 로마, 新문명을 낳다

    그리스도교의 첫 보편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담당한 역할에 대한 에우세비오스의 묘사는 그러한 제휴의 시너지 작용을 잘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제국의 평화와 하나 됨이었다. 그가 그리스도교에 기대했던 것도 그러한 정치적 통합의 구심점 역할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제국 도처에서 그리스도교는 여러 진영으로 나뉘어 상호 비방과 논쟁에 휩싸여 있었다. 공동체의 분열과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주교들이 대거 관련된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논쟁은 그 정점이었다. 제국의 통합과 평화를 위해 교회의 보편적 일치를 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느낀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황궁 근처인 니케아에서 최초의 보편공의회를 소집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아리우스 논쟁뿐 아니라 부활절의 절기 문제, 성직자 임면 및 예배의식 등이 주요 안건이었다. 300여 명의 참석자 대부분은 동방주교들이었지만 6인의 서방주교도 참석해 보편공의회로서의 구색을 맞췄다. 콘스탄티누스는 개회사에서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요를 전쟁이나 전투로 간주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신학적, 종교적 다툼보다는 통일의 중요성과 타협의 미덕을 우선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황궁으로 직접 주교들을 불러들여 환대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천사처럼’ 입장해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도적으로 참관했다. 그가 회유와 중재, 합의를 종용한 것은 니케아 공회의가 아리우스파를 정죄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정식화한 니케아신경에 합의하게 한 배후의 힘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가 끝나자 흡족한 마음으로 참석한 모든 주교를 초대해 즉위 20주년 기념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당시 참석자였던 에우세비오스는 “마치 그리스도의 왕국을 미리 본 것과 같은 꿈같은 광경’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에우세비오스는 이때 세상의 주인인 로마황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호의와 분쟁을 타결하는 압도적 위엄에 고무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교가 향후 교리와 신경을 확립하는 선례와 형식을 제공했다. 니케아 공의회에 이어 꾸려진 고대의 중요한 보편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칼케도니아 공의회, 에페소스 공의회 등이 개최된 장소는 모두 비잔틴 황제의 영향권에 있는 도시로서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와 틀을 확정 짓는 요람 구실을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후원자요 교회 밖의 사도를 자임한 로마 황제의 적극적인 개입, 일치와 통합에 대한 요구 속에서 통합된 정통 그리스도교의 틀이 형성됐음을 의미한다.

    콘스탄티누스가 주역을 맡은 서구 역사의 결정적 순간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것과 제국의 수도를 동쪽의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것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 혹은 비잔틴 제국으로 불렸다. 동로마 제국의 등장은 지중해 지역의 동서 교류와 통합을 가져왔다. 지리적으로 제국의 중심을 이동함과 더불어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심장부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명과 그리스도교가 흡수한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지역의 종교가 융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황제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격렬한 논쟁을 통해 그리스 철학과 동방 및 그리스도교 사상이 서로 융합한 공의회의 거점이었으며, 제국의 정치와 보편적 그리스도교의 지향이 접점을 이룬 구심점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선 로마나 예루살렘과는 또 다른 제3의 방식으로 옛것과 새로움이 교차하고, 그리스도교와 이교적 유산이 새로운 배치로 공존을 시도했다. 새로운 로마이자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중심으로 떠오른 콘스탄티노플은 역사적 융합의 생생한 상징물로서 지중해 세계의 중심에 지금도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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