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분단·접경 상징 도시에서 글로벌 첨단 도시로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3-02-22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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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기업·협력업체 동반 입주해 인구, 일자리 증가
    • 파주시 부가가치, 최근 5년간 경기도 Top
    • 파주 쌀 연 790t 구매…지역경제 활성화 기여
    분단·접경 상징 도시에서 글로벌 첨단 도시로

    LG디스플레이 파주 공장.

    서울 강변북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행주산성이 나오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한강 하류를 따라가면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와 만난다. 해질 녘에 편도 5차선, 왕복 10차선의 자유로를 달리다보면 멋진 낙조를 감상하게 된다. 왼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따라 파주 출판도시를 지나고, 다시 북쪽으로 10여 km를 더 올라가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두물머리와 만난다. 이곳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있다.

    오두산 전망대는 두물머리 너머 북한을 눈앞에서 관측할 수 있는 곳으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관광 명소다. 전망대에서 임진각 방향으로 약 5km는 임진강을 군사분계선 삼아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까지 이곳에는 대북방송을 하는 대형 스피커와 ‘월남환영’이라는 글귀가 반짝이는 네온사인이 설치돼 있었다. 파주시 탄현면 대동리 이장 신호범 씨는 “그때는 밤마다 들려오는 대북방송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잤다”고 회고했다.

    맑은 날 오두산 전망대에서 북녘을 바라보면 먼 발치로 병풍처럼 드리운 개성 송악산이 육안에 들어온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에서 1시간 남짓 달려와 싸늘한 분단의 현장과 맞닥뜨리는 곳이 파주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 반세기 이상 파주는 분단과 접경(接境)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LG디스플레이가 북한과 직선거리로 10km 남짓한 월롱면에 대규모 공장을 세운 것이 계기다. 파주 디스플레이 클러스터 프로젝트에는 18조 원이 투입됐다.

    桑田碧海 10년



    452만㎡의 디스플레이 클러스터는 크게 4개 단지로 구성돼 있다. LG디스플레이 본 공장이 자리한 단지가 월롱면에 172만㎡ 규모로 조성돼 있고, 여기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LG계열사 단지가 위치해 있다. 여기서 각각 2km, 2.2km 떨어진 곳에 협력사 단지가 들어선 문산 당동지구와 선유지구가 있다. 66만㎡ 규모의 당동지구에는 외국 투자기업이, 132만㎡ 규모의 선유지구에는 국내 기업이 입주해 있다. 파주시청 관계자는 “파주 디스플레이 클러스터는 본공장과 협력업체, 공장 주변 도로와 공원, 하천까지 합하면 여의도 면적의 2~3배 규모”라고 설명했다.

    자유로를 따라 임진각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낙하 인터체인지 우측으로 들어서면 LG디스플레이 공장으로 길게 뻗은 ‘LG로’가 나온다. LG디스플레이 서쪽 출입구로 들어서 언덕을 오른 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상가 건물과 아파트 형태의 기숙사가 줄지어 있어 마치 ‘미니 신도시’에 들어선 느낌이다. 공원 사이로 하천이 흐르고 병풍처럼 드리운 산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LG디스플레이가 들어선 후 ‘분단’과 ‘접경’의 이미지는 ‘글로벌’과 ‘평화’로 거듭났다.

    일사천리 행정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 건립 과정은 민·관·군이 힘을 합하면 ‘불가능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다. ‘공업 배치 및 공장 설립에 관한 법률(공배법)’은 파주시를 포함한 경기 북부 수도권에 대기업 공장 신축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국내 대기업이 외국 기업과 합작 투자할 경우 외국인 투자지분이 51% 이상인 20개 첨단 업종에 한해 2001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경기도는 청와대에 공배법 시행령 개정을 건의했고, 2003년 7월 1일부로 외국인 투자지분 50% 이상인 25개 첨단업종에 한해 2003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허용하도록 시행령이 개정됐다.

    분단·접경 상징 도시에서 글로벌 첨단 도시로

    경기 파주시 임진각을 찾은 관광객들이 망원경으로 군사분계선 너머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다.

    파주시청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2월 25일 취임 후 처음으로 서명한 법안이 공배법 시행령 개정안”이라고 말했다. 이 덕분에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필립스와 LG가 각각 50% 지분을 보유한 LG필립스LCD(지금의 LG디스플레이)가 파주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규제 완화로 산업단지 조성은 가능해졌지만, 그다음엔 산업단지 부지 가운데 70%가 임야라는 점이 걸림돌이 됐다. 산업단지 부지 8.3ha가 산림청 소유 국유림이었다. 당시 산림법 및 산림청 보전임지전용허가 기준에 따르면 임야가 3ha 이상 편입될 경우 개발사업 협의 자체가 불가능했다. 투자 기업과 파주시 관계자들이 산림청 관계자들과 수차 협의한 뒤 같은 규모의 임야를 구입해 교환하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사유지의 경우 파주시 직원들이 밤낮 없이 토지 소유자들의 집 앞에서 기다리며 설득한 끝에 승낙서를 받아냈다.

    국유림 교환과 토지 보상 문제를 매듭짓자 이번에는 군사보호구역이 난제로 떠올랐다. 군과의 협의 과정도 속전속결이었다. 몇 차례 실무협의를 통해 조정을 거친 끝에 2003년 3월 24일 월롱산에서 ‘모든 의사결정을 현장에서 마무리 짓는 현장종결형 회의’를 갖고 사업 시행의 기본 방향을 수립했다. 산업단지 부지에 매장된 문화재도 발목을 잡았다. 투자 기업이 요청한 시한에 맞추기 위해 파주시는 한겨울에 대형 천막을 치고 문화재 발굴작업을 벌였다

    이인재 파주시장은 LG디스플레이 인허가 과정을 떠올리며 “물 들어올 때 배를 대라는 말도 있다”며 “글로벌 기업이 투자 의사를 갖고 있을 때 행정적으로 적극 지원해야 투자가 결실을 본다. 절차와 요건을 따지면서 머뭇거리다가는 다른 나라에 빼앗기기 십상”이라고 했다.

    LG디스플레이 산업단지의 성공적 가동 이후 여러 외국 기업이 파주에 투자 의향을 밝히고 있다. 전후방 산업 연관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파주시의 특별한 ‘기업만족 서비스’ 프로그램도 한몫을 했다. 강석재 파주시 경제복지국장은 “기업이 투자 상담을 요청하면 공무원이 해당 기업을 방문해 현장에 대해 설명한다”며 “산업단지 분양방식도 차별화해 분양금액 1~3년 무이자 할부 납부제, 기존 업체가 신규 업체를 중개해주면 분양가의 일정부분을 되돌려주는 제도도 도입했다”고 전했다.

    “미군 1사단 주둔 효과”

    LG디스플레이를 비롯한 대규모 공장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파주시는 발전을 거듭했다. 무엇보다 인구가 크게 늘었다. 2003년 24만 명에서 LG디스플레이 공장이 본격 가동한 2006년엔 29만 명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40만 명을 넘어섰다.

    접경지역에 세계 최대 규모의 LCD산업단지가 조성된 뒤 파주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효과다. 안보 전문가들은 “군사분계선 인접 지역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조성된 것은 미군 1개 사단 이상이 주둔하는 것과 맞먹는 안보 불안 경감 효과를 가져온다”고 평가한다.

    파주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선 뒤 이 지역 출신에겐 대기업 취업 문호가 활짝 열렸다. LG디스플레이는 매년 수십 명의 파주 출신 근로자를 채용했다. 중소기업에 다니다 지난해 LG디스플레이에 입사한 박영규 씨는 “나고 자란 고향에서 세계적 대기업에 다니게 돼 뿌듯하다. 친구들도 무척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LG디스플레이는 지역 출신 근로자 채용에서 한발 나아가 장애인 고용을 목적으로 한 사회적 기업도 설립했다. 지난해 출범한 ‘나눔누리’는 헬스키퍼와 스팀세차, 도서대여점 등 7개 사업분야에서 37명의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고용으로 소득 창출 기회를 제공하는 직접적인 기여 외에 지역 농축산물 구매와 같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도 지역경제 활성화에 일조한다. 김재삼 LG디스플레이 과장은 “구내식당에서 사용하기 위해 지난해 790t(약 21억 원어치)의 파주산 쌀을 사들였고, 설과 추석 등 명절에는 사내 특판을 통해 홍삼, 수삼, 머루주, 과일, 꿀 등 지역 농산물 6000만 원어치를 구매했다”고 말했다.

    산과 논밭뿐이던 시골 마을에 첨단기업이 들어서 18조 원이 투자되고 3만 명 이상의 대규모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산업단지 인근 지역경제도 활성화됐다. 음식점과 숙박업소, 편의점 등이 들어서 새로운 지역상권이 형성됐다. 이는 파주시의 세수(稅收) 증대로 직결됐다. LG디스플레이가 파주시에 매년 납부하는 세금만 100억 원이 넘는다. 대기업과 연관 기업들이 파주시에 잇달아 들어서면서 파생되는 경제유발효과도 크다.

    파주시는 대기업과 인구 유입에 따라 국도와 지방도를 확장하는 등 원활한 기업 활동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경의선 복선 전철이 서울 마포구 공덕역까지 연결돼 서울 도심부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공덕역에선 서울지하철 5, 6호선과 공항철도 환승이 가능하다. 파주는 더 이상 분단과 접경 도시가 아니다. 글로벌 첨단기업 유치를 계기로 이미 첨단 기업도시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이인재 파주시장 인터뷰

    “아직 풀어야 할 규제 많다”


    분단·접경 상징 도시에서 글로벌 첨단 도시로
    ‘에너자이저.’ 지칠 줄 모르고 시정에 몰두하는 이인재 파주시장에게 공무원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파주시에 투자한 기업들 사이에선 ‘일사천리 행정가’로 유명하다. 이 시장은 투자 유치를 가로막는 불필요한 행정절차와 규제를 대부분 없앴다. 2월 1일 파주시청에서 이 시장을 만났다.

    -파주시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이 계속 늘고 있는데.

    “지난해 파주시 외자유치 규모가 1조8000억 원이 넘는다. 그 덕에 3125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지난해 경기도가 유치한 외자의 80%를 파주시가 끌어왔다.”

    -외국 기업들이 파주시로 몰려드는 이유라면.

    “서울에서 가까워 우수 인력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통일로와 자유로를 통해 김포공항, 인천국제공항, 인천항까지 1시간이면 갈 수 있어 물류수송의 최적지다. 파주시엔 복잡한 행정절차와 규제가 없다. 파주는 양해각서 체결 이후 보통 3년 이상 걸리는 행정처리 절차를 1년 만에 끝내주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원천기술을 보유한 일본 기업 이데미쓰코산은 지난해 1월 파주시와 투자협약을 체결한 지 9개월 만인 10월에 공장을 준공했다. 현재 제조시설을 설치하고 있어 3월 하순이면 제품 양산이 시작될 전망이다. 비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대만 기업 ASE코리아도 지난해 2월 협약을 체결한 지 7개월 만인 9월 말에 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세계 3위의 LCD 유리원판 제조기업 NEG(Nippon Electric Glass)가 설립한 한국법인 EGkr은 5월에 협약을 체결하고 석 달 뒤인 8월 말에 공장 건립에 들어갔다. EGkr은 파주시의 신속하고 적극적인 행정 지원에 만족해 최근 5억 달러 규모의 2단계 투자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인재 시장은 문화관광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1조6000억 원이 투입될 ‘파주 프로젝트’에는 ‘페라리월드’ ‘스마트시티’ 조성 사업 등이 포함돼 있다. 40여 개 놀이시설과 문화·전시시설이 들어설 페라리월드는 관람객이 자동차 경주를 체험할 수 있게 꾸밀 예정이다. 스마트시티는 세계의 IT 관련 기업과 교육·연구기관을 모아 시너지 효과를 낼 자족형 기업도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 해 파주시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300만 명이 넘는데, 대부분 임진각에 와서 망원경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고 떠나는 안보관광에 그친다. ‘파주 프로젝트’는 관광객이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길 거리가 풍부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추진되고 있다.”

    파주시는 국내외 투자사와 건설사, 금융회사 등으로 구성된 특수목적법인(SPC)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투자 의향을 밝힌 효성그룹 부국증권 등 기업 관계자들과 투자협의회를 가졌다. 시 관계자는 “최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G그룹에서 20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고 귀띔했다.

    -새 정부에 바람이 있다면.

    “접경지역 지원특별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특별법인데도 국토기본법, 수도권정비계획법,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등 3개 법률보다 우선 적용하지 못한다는 단서조항이 있다. 접경 지역민들은 지난 60년간 국가 안보를 위해 지역발전도 못하고 희생을 강요받았다. 화장실과 축사를 고치려 해도 군과 협의해야 한다. 접경지역이라고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다. 차별받고 소외됐던 지역에 관심을 갖고 합리적인 수준으로 규제를 풀어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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