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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그물코에 꿰인 삶 그 희망의 노래

경북 울진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그물코에 꿰인 삶 그 희망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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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 신라비가 전하는 이야기

죽변을 벗어나 남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최근에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새 명소 하나가 있다. 신라시대의 비석 하나가 발견돼 갑작스레 유명해진 봉평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되는 평창군의 봉평과 지명이 같아 괜히 친근감을 주기도 한다. 1988년 죽변면 봉평리에 살던 농부 한 사람이 밭갈이를 하다가 우연히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발견하는데, 그것이 곧 봉평 신라비다.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 이 비의 제작 연대는 524년(법흥왕 11년)께로 당시의 율령과 관제 등이 적혀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석비로 평가되었다. 이 비는 그해 국보로 지정됐다.

비문에는 이 비가 세워지기 전 이곳의 노비들이 험준한 산성에 함부로 불을 지르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조정에서는 대군을 일으켜 사태를 진압했고 이후 왕과 신료들이 모여 사후처리의 일환으로 얼룩소의 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는 의식을 치르는 한편 현지의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60대 혹은 100대의 곤장을 치는 형을 내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새 국보의 발견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좋은 계기가 됐다. 군(郡)에서는 거금을 투입해 전시관을 짓고 공원을 꾸몄다.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비석 하나만으로는 흥행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여겨 광개토대왕비, 진흥왕 척경비 등 소문난 비석들을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제작 전시하는가 하면, 예전 고을 수령들의 송덕비들까지 잔디밭에 도열시켰다. 중국 시안(西安)의 비림(碑林) 같은 명소를 이곳에 꾸미겠다는 식의 의욕은 엿볼 수 있지만, 실물이 아닌 모형들이 빚어내는 그 어정쩡한 느낌은 끝내 떨칠 수가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비문이 적고 있는 사건을 형상화해 당시 민중의 생활상이며 지배층의 제례 등을 볼 수 있게 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월송정에서 신선 되는 꿈



월송정(越松亭)은 울진공항 아래편의 구산해수욕장에 있는 이름난 정자다. 평해중학교 뒤쪽 진입로를 통해 솔숲으로 들면 이 빼어난 정자를 만나게 된다. 그 옛날에도 이곳엔 송림이 우거졌던 모양, 신라의 화랑들이 울창한 솔숲에서 달을 즐기고 바다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최초의 정자는 고려시대에 세워졌다.

관동 8경의 하나인 이 정자에 오르면 울창한 송림 사이로 뽀얀 모래밭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쪽빛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과 모래와 바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자연의 진체를 보여주는 자리에 정자가 서 있는 것이다. 여기에 눈부신 햇살이 있고 청량한 바람이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진다. 정철이 이곳의 아름다움과 분위기에 취해 신선이 되는 꿈을 꾼 것도 무리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누워 선잠에 설핏 들었는데, 꿈에 한 사람이 나에게 이르는 말이 그대를 내가 모르겠는가, 그대는 하늘에서 온 신선이시네’라는 관동별곡의 그 넉넉한 품도 이곳에서는 충분히 그럴 성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자는 성종 임금의 일화를 곁들이면서 한층 유명해졌다. 왕이 화공(畵工)에게 명한다. “조선 팔도의 정자 중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을 그려 오라.” 화공이 여러 정자의 그림을 바쳤는데 왕이 그림들을 살펴보곤 “월송정에 비할 것이 없다”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직접 가보지도 못하는 곳을 고작 그림으로 구경하는 왕의 처지가 딱하며, 제 땅의 경치에 1, 2등 등수를 매기는 심사도 각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월송정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철거됐다가 1980년 옛 모습으로 복원됐다.

월송정에서 나와 해안도로를 끼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방파제가 길게 바다로 빠져나간 후포항에 이른다. 오징어, 대게, 꽁치 등 어족의 집산지로 이름난 후포의 원래 지명은 ‘후리포’. 육지에서 그물의 양끝을 끌어당겨 고기를 잡던 ‘후리그물질’이 성행한 포구라서 이런 지명을 얻었다. 바다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포구에 서면 이 바다와 이 땅이 키운 한 시인이 떠오른다. 후포가 낳은 시인 김명인(金明仁)이다. 그가 예전 후리포의 생동감 넘치는 어로 작업을 추억한다.

“어릴 적만 해도 원양에서 쫓겨온 멸치떼가 시커멓게 동네 앞바다를 물들이면, 마을의 선도(先導)가 동산에 올라 목청껏 고함을 지르거나 횃불을 흔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장정들이 그물을 실은 배를 부리나케 띄워 밀려온 고기떼를 가두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동네가 달려 나가 그물의 양끝을 끌어당겼다. 그물 폭이 좁혀질수록 찢어져라 요동치던 고기떼의 장관으로 내 어린 시절은 얼마나 생동했던가.”

그러나 그의 시가 그리는 후포는 훨씬 더 고단과 적막에 기울어져 있다. 그립고 아픈 추억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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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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