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방견문록<br>마르코 폴로 지음, 김호동 옮김, 사계절
부유한 베네치아 보석상인 니콜로 폴로와 동생 마테오 폴로는 1260년 다른 상인들과 함께 동방을 찾아 떠났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과 투르키스탄의 부하라 등을 거쳐 중국에 들어가, 베이징 근처에 자리한 쿠빌라이 칸의 왕궁에도 초대받았다. 9년 만에 베네치아로 돌아온 폴로 형제는 2년 뒤인 1271년 니콜로 폴로의 열다섯 살 된 아들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다시 동방여행길에 올랐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소년 마르코 폴로는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면서 ‘프레스터 존’이 산다는 상상 속의 동방을 목격한다. 유럽의 민간에는 이슬람권 너머에 예수를 믿는 프레스터 존의 왕국이 존재한다는 신화가 퍼져 있었다. 몽골군이 포로들을 학살할 때 주로 십자가형을 많이 쓴 것이 와전돼 동양에 기독교 국가가 나타나 이교도를 물리치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페르시아, 파미르 고원을 지나 중국 땅까지 들어간 마르코 폴로는 보는 것마다 진기함에 놀란다. 거대한 도시와 기이한 풍습, 화려한 궁정생활, 어마어마한 보물과 각종 특산품, 신화에나 나올 듯한 신비스러운 짐승들….
25년간의 아시아 여행을 마치고 베네치아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3년 후 제노바와 동방무역로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포로가 되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피사 출신의 작가인 루스티첼로에게 자신이 겪은 엄청난 모험담을 털어놓는다. 루스티첼로는 그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받아 써 출판한다. 고전 ‘동방견문록’(원제 Divisament dou Monde)은 이렇게 탄생했다. 원래 제목을 직역하면 ‘세계의 서술’이 된다. ‘동방견문록’이란 제목은 일본어 번역본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머릿속에는 지금과 같은 동·서양이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25년의 아시아 여행
이 책의 원래 제목이 그렇듯 내용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기보다 유럽을 제외한 세계 각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시아 여러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 러시아, 시베리아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이 책을 단순히 여행기로 여겨 영역본을 ‘Travels of Marco Polo’라고 이름 지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마가파라유기’(馬可波羅游記)나 ‘마가파라행기’(馬可波羅行記)라고 쓴다.
이 책은 유럽 밖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놀라움을 넘어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믿기지 않은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를 허풍쟁이로 여겼다. 어느 것에든 ‘수백만의…’ 하며 수를 부풀리는 그에게 ‘백만 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 책의 이탈리아어 제목이 ‘일 밀리오네’(Il Milione·‘백만’이라는 뜻)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숫자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여행 사실까지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었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아랍 상인들에게 정보를 주워듣고 얘기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실존 인물인지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그 같은 의심이 들 때도 있긴 하다. 만약 그가 중국에서 17년간 살며 체험한 게 사실이라면 한자나 젓가락 사용, 차(茶) 마시는 풍습, 전족(纏足), 만리장성, 인쇄술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무용담과 로맨스 작가였던 루스티첼로의 덧칠을 거치면서 당시 유럽인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과장이 더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쿠빌라이 칸이 마르코 폴로 일행을 환영하는 장면은 아서 왕 전설에서 트리스탄이 처음 궁정으로 왔을 때의 장면을 그대로 따와 고쳤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마르코 폴로가 양주(揚州)라는 도시를 3년 동안 통치했다고 한 부분도 중국 자료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의 글 중에서 명백한 자기모순이 드러나기도 한다. 자기가 주선해 제작한 투석기로 몽골군이 중국 남부의 요새 양양(襄陽)을 함락시켰다고 했지만, 이 도시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락됐다는 사실이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 상당 부분이 최근 들어서는 사실로 확인되거나 그렇게 추정할 만한 근거가 드러나고 있다. 배에 탄 사람을 잡아먹을 기회를 엿보며 강 속을 헤엄쳐 다니는 진짜 용(인도 악어), 몸집이 크고 줄무늬가 있는 사자(호랑이), 갑옷을 입은 괴물(코뿔소), 등에 궁수를 태우고 다니는 코끼리 부대, 깃털 길이가 3.5m나 되는 새(큰바다오리), 불에 타지 않는 천(석면), 나무처럼 타는 검은 돌(석탄), 돈으로 사용되는 종이(지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