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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나라 속국…” 중국의 역사공작 ‘신청사(新淸史)’를 고발한다

  • 이정훈 │편집위원 hoon@donga.com

“조선은 청나라 속국…” 중국의 역사공작 ‘신청사(新淸史)’를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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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봉과 明軍 파병

“조선은 청나라 속국…” 중국의 역사공작 ‘신청사(新淸史)’를 고발한다

청나라 때의 변발. 만주족은 그들의 풍습인 변발을 전 중국인에게 적용시켰다.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책과 함께, 2004)에서

중국은 영토가 넓다보니 내지(內地)에도 이민족 거주지를 두게 됐다. 내지에 있는 이민족 자치구역은 ‘토사(土司)’라고 했다. 중국 정사는 토사와 번부는 외국전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본기나 열전 등을 기술할 때 번부와 토사에 대한 기록을 넣었는데, 이는 중국의 일부인 속국으로 본다는 뜻이다.

번부가 바로 과거의 사이(四夷)다. 전연맹약 덕분에 동이는 번부에서 빠져나왔지만,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은 계속 번부로 규정돼, 지금은 중국의 일부가 돼버렸다. 중국은 중국 중심의 역사 기록을 남김으로써 외국을 삼킨 것이다.

그런데 ‘명사’는 조선전을 따로 만들어놓고도 조선전에서 ‘조선을 번부 또는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했다. 체재만 외국으로 분류했지만 내용은 중국의 일부로 본 것이다. 청나라가 이런 내용의 ‘명사’를 출간할 때 조선은 힘이 없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명사’가 조선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표현한 것은 조선의 지나친 사대(事大)와 임진왜란 때 명군의 지원을 받은 것 때문인 듯하다.

조선이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황실은 천하의 중심을 자처했기에 외국에서 무역을 하자며 선물을 보낸 것도 ‘조공’으로 표기했다. 그러니 조공을 했다고 해서 외국이 중국을 사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도 이를 잘 아는지라 조공만으로는 속국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봉은 다르다. 책봉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고려는 요(遼)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이는 외교상 의례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명에 대한 조선의 책봉은 그 내용이 심각했다.



조선은 유구(琉球·지금의 오키나와)와 더불어 새 임금이 들어서면 무조건 중국 황실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명이 책봉을 해줄 때까지 왕이란 칭호를 못 쓰고 ‘권지국사(權知國事)’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유구는 한술 더 떴다. 유구의 어느 왕은 명이 혼란에 빠져 책봉해줄 사신을 못 보내자 평생 세자 신분으로 있다가 죽었다. 그러나 일본 왕은 책봉을 받은 적이 없기에 중국은 일본을 속국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청에 두 번 항복한 조선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는 참으로 무능하고 한심한 임금이었다. 왜군에 쫓겨 의주까지 도주한 그는 중신들의 거센 만류에도 명에 ‘나의 망명을 받아달라’ ‘명나라 군대를 보내달라’고 거듭 간청했다. 명은 선조의 망명은 불허한 대신 명나라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계의 피가 흐르는 이여송이 병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에 들어온 명군은 행패가 심했지만 조선은 이들을 ‘천군(天軍)’이라 칭하며 환대했다.

명군 참전 후 전쟁은 정전(停戰)을 하는 등 답보를 거듭하다 명-왜 간의 협상으로 왜군이 철수하면서 끝났다. 외적을 자국의 힘으로 물리치지 못하고 외국 군대가 와서 협상으로 물러나게 했으니, 조선은 명에 더욱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명에 이어 중국을 통치하게 된 청은 조선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정묘호란). 이 전쟁에서 이긴 청(당시는 후금)은 자신이 형, 조선이 동생이라는 형제지국(兄弟之國) 관계를 맺고 물러났다. 그런데도 조선은 명에 심각하게 의존한 기억 때문에 청을 무시했다.

그러자 1636년 다시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인조를 붙잡았다(병자호란). 인조는 삼전도에서 황제에게 올리는 만주식 예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는데,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림)를 하며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된다”고 약속했다. ‘군신지국(君臣之國)’을 조건으로 항복한 것이다. ‘명사’는 이러한 청이 만든 것이니 조선을 외국전에 넣긴 했어도 속국과 다를 바 없었다고 쓴 듯하다. 이러한 청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청사고’이니 청사고에는 더 심각한 내용이 들어갔다.

조선을 두 번이나 항복시킨 청은 말기인 1885년, 26세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파견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조정을 마음대로 주물러, 식민지를 통치하는 총독(總督)과 비슷한 뜻의 ‘감국(監國)대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때문에 ‘청사고’는 과거의 정사에는 없던 ‘속국전(屬國傳)’을 만들고, 그 안에 조선을 집어 넣었다.

청나라는 1911년 쑨원(孫文)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쓰러졌다. 새로 들어선 중화민국은 극심한 혼란 탓에 쑨원이 아니라 당대의 실력자인 위안스카이를 총통에 추대했다. 위안스카이는 1914년 역대수사 전통에 따라 청사관(淸史館)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청사를 만들게 했다. 청사관 학자들은 대부분 청나라 과거에 급제한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청 실록과 공문서 등을 근거로 청사를 편찬했기에 청나라적 시각이 많이 반영됐다.

위안스카이는 총통에 만족하지 않고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꿔 황제가 되려 했다. 그러다 역풍을 맞아 실각하고 쉬스창(徐世昌) 같은 군벌(軍閥)의 대표가 총통에 올랐다. 그때의 중화민국은 일본 등 열강의 공격을 받고 있는 데다 내분까지 심한 내우외환 상태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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