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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 feeling

‘깊이의 공간’이 꿈틀대는 도심 속 힐링캠프

오래된 성당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깊이의 공간’이 꿈틀대는 도심 속 힐링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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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의 공간’이 꿈틀대는 도심 속 힐링캠프

충남 아산시 공세리성당 지하예배소.

공세리성당, 예산성당

내 기억의 또 다른 공간으로 충남의 공세리성당과 예산성당이 있다. 그야말로 어릴 적 교과서나 흑백영화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시골의 작은 성당, 해 지는 서녘으로 종소리 울려 퍼지는 그런 성당이다.

특히 공세리성당은 그 특유의 고색창연함으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벌써 널리 소개됐으니 요즘은 아마도 찾는 이들의 주차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공세리성당이 있는 아산은 조운선(漕運船)을 이용해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미의 보관창고가 있던 곳이다. 공세리라는 지명 자체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에서 거둔 조세를 보관했던 공세창(貢稅倉)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연히 전국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었고, 구한말에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선교사도 적지 않게 드나들었다. 한국 천주교의 또 하나의 뚜렷한 젖줄이 이 지역에서 비롯했다. 그중 한 사람, 드비즈 신부가 민가를 예배당으로 삼다가 1897년에 옛 곡물창고에 사제관을 세우고 1922년에는 직접 본당을 설계, 완공했으니 이것이 공세리성당의 시작이다. 중국에서 기술자를 데려온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해 완공을 보았을 정도로 문물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직접 조제한 한방 고약으로 환자들을 살폈는데,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었다가 이를 이명래가 전수받아 ‘이명래고약’으로 널리 팔리게 되었다.

만약 당신이 이 성당에 와서 본당의 안팎을 한 바퀴 둘러보고 곧장 언덕 아래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고 서해 백사장으로 헤엄치러 떠났다고 하면, 공세리성당을 제대로 다녀간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겠다. 햇살이 그윽하게 스며드는 오후에 본당 안에서 마음을 다독이며 차분하게 몇 분이라도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언덕 아래쪽의 예배소에 반드시 들를 것을 권한다. 신자냐 아니냐 하는 수준 낮은 질문은 삼가자. 그 안으로 들어가 잠시 무릎으로 앉아 있다보면 과연 여름이 왔다고 해수욕장에 가서 헤엄이나 첨벙첨벙 쳐야 하는가 하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예산성당도 그런 운치와 가치가 있다. 1933년 착공해 1934년 준공했다. 다른 근대 종교 건축물과 달리 예산성당은 한국인 신부에 의해 준공을 보았다고 한다. 이 성당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인근의 장엄한 수덕사와 고졸한 개심사 그리고 추사고택으로 이어지는 내포 지방의 문화적 저력과 아울러 봐야 한다.

‘깊이의 공간’이 꿈틀대는 도심 속 힐링캠프

서울주교좌성당의 고졸한 한옥.

도심 속 힐링 필링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좀처럼 도심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서울 도심의 더위는 너무 일찍 찾아왔다. 이제 두어 달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빌딩 숲의 참호들로 기어드는 것뿐인데, 그렇게 생각하자니 이 짧은 생애가 어수선하다. 이 여름을 몇 번 더 피하면 한 세월이 지나가고 한 세대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제아무리 축구광이라 해도 4년마다 다가오는 월드컵으로 인해 제 삶의 유한한 시간이 부쩍 짧아지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일과 같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라고 했던가? 히딩크 효과? 광장문화? 하긴 그러한 기억이 틀림없이 있었으나 어쨌든 그런 일도 어느덧 10여 년 전의 일이고 이제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순간에 12년의 세월이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 동아시아의 한복판, 그 서울의 한복판, 그 세종로 사거리의 한복판에서 잠시 더위를 피해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마당으로 도피해 있다. 큼직한 나무들이 로마네스크식 성당과 어울려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주고 있다. 간이 커피숍도 있어서 때 이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본다.

원래 이런 쪽에는 취미가 전혀 없어 어쩌다 글 쓰고 책 읽는 일에 종사한 뒤로 장안의 수많은 문예객의 와인 방담, 요리 한담, 커피 훈담 사이에 끼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들이 나누는 지극한 애호의 극한을 귓전으로 얻어듣기는 했으나 일부러 그것을 배우고 익혀서 나날의 취미로 삼고자 한 적이 전혀 없으되, 더위를 피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킨 까닭은 그것이 오히려 때 이른 더위의 광열에 의해 미지근해질 때까지 들고 있음으로 하여 딱 그 시간만큼의 시차를 즐기고자 하는 이유 외에 달리 없다.

성당은 고즈넉하다. 불과 몇 걸음, 코리아나호텔에서 덕수궁 쪽으로 가다가 그만 지쳐서 잠시 오른쪽으로 열댓 걸음 남짓 옮겼을 뿐인데, 세속의 번잡함은 뒤따라오지 못했다. 놀라운 일이다. 만약 이러한 공간을 애써 찾는다고 하면 저 멀리 지리산의 사찰이나 설악산의 은성한 숲이나 강화도의 갯벌까지 몇 시간을 달려가야 하건만, 이 도심 속의 성당은 일순 마음을 먹는다 하면 바로 그와 같은 세속과의 격절을 보여주니, 진경이란 저 깊은 산에 있는 것이 아니요 힐링의 처소란 굳이 돈 들여 어디 가서 가부좌를 틀어야만 하는 일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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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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